방미 앞둔 이재명, "트럼프 입맛 다실 카드 내밀어야"
한·미 방위비 분담금 인상 협상, 전문가 4인의 제언
지난 7월 31일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세 협정이 일단락됐지만, 관세협상과 안보 관련 문제들을 한데 묶어 딜을 하려는 우리 측 구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관세협의와 별개로 우리나라에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주한미군 주둔비용 중 한국의 부담액)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8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 동맹 관련 ‘안보 패키지’ 논의에도 본격 시동이 걸릴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절 이후 오는 8월 25일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다. 먼저 오는 23일 일본 도쿄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한 뒤 24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 테이블에는 지난 7월 말 타결한 관세협정 세부 조건과 함께 국방·안보 협상이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미국은 이번 회담을 앞두고 이른바 ‘동맹 현대화’ 기조 안에서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및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와 역할 조정 등을 요구할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한·미 양국은 지난해 4월 ‘제12차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논의를 시작해 그해 10월 최종 타결했다. 이번 협정의 유효기간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이다. 첫 해(2026년) 총액은 1조5192억원으로 전년(2025년) 1조4028억원 대비 약 8.3% 늘었다. 최근 5년간 연평균 방위비 분담금 증가율(6.2%)에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증원 소요, 국방부 건설관리비용 증액으로 인한 상승분 등이 더해졌다. 한·미는 현행 11차 SMA에 적용 중인 국방비 증가율(평균 4.3%) 대신, 앞서 8~9차 SMA에 적용했던 소비자물가지수(CPI) 증가율을 지표로 반영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연도별 분담금 총액은 전년도 분담금에 전전년도 CPI를 반영해 결정된다. 아울러 연간 증가율은 5%를 넘지 않도록 상한선을 설정했다. 현재 미국 CPI는 2%대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이전 합의는 무시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 스타일답게 자신의 집권 기간 전 합의된 내용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최근 한·미 상호관세 협상에서 방위비 대폭 증액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9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는 자체 입수한 ‘한·미 무역합의 초안’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8%(작년 기준 2.6%)로 증액할 것과, 주한미군 주둔비용 분담금을 10억달러(약 1조3891억원) 이상 증액할 것을 요구하려 했다”고 보도했다.
현행 12차 SMA에 따른 한국 정부의 내년 방위비 분담금이 11억달러(약 1조5192억원)인데 이를 두 배 가까이 늘리겠다는 것이다. 앞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연 100억달러(약 13조8910억원)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수차례 공개적으로 발언한 바 있다. 자그마치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어찌 보면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 없는 분담금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트럼프 미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배경으로 당장 금전적인 것보다는 자국 내 정치적 목적이 앞서는 것으로 꼽힌다. 대북 정책을 겨냥해 강한 외교적 메시지를 내는 것으로 지지층 결집을 꾀할 수 있다는 셈법에서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도 한·미 방위비 협정을 해봤자 한국 정부로부터 얼마나 받아내겠나”라며 “국제 질서에서 북한 김정은,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과 같은 ‘스트롱맨’들을 본인(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재하고 있고 미국 중심으로 평화와 타협을 이끌어 나간다는 방향이 자국 내 정치적 홍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북한과 미국 간 관계 개선에 밑거름을 깔아주거나 마중물 역할 등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방안을 가지고 한·미 방위비 협상을 한다면, 트럼프 입장에선 상당히 정치적인 매력이 있을 것”이라고 봤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트럼프 미 대통령은 양국 간 이익보다 자국 내 정치적 지지율이 떨어지면 외교적 메시지를 세게 한다”면서 “주한미군의 역할 확대를 내걸면서 방위비 분담금을 더 받아가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마냥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안보 청구서’ 실익 따져봐야
그렇다면 이른바 한·미 ‘안보 패키지’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어떤 ‘카드’를 활용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방위비와 국방비 인상이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면, 국방과 외교적 역할에 있어 얻을 건 얻는 ‘실리’를 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이슈와 논점’ 보고서에서 “미국은 상호관세 부과 후 철회와 조정을 대가로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재협상, 현지 투자에 대한 지원 확약 등을 요구할 것”이라며 “미국의 ‘안보 청구서’와 국가 산업 포트폴리오 전체 관점에서 손익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방위비 분담금이나 특정 업종에서 소폭 타격을 입더라도 더 큰 경제적 수혜가 가능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래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미래국방국가기술전략센터장은 “방위비 범위를 민간 영역까지 확장하는 등 기준이 모호한 영역을 최대한 넓힐 필요가 있다”면서 “방산 중에서 특히 조선업은 우리나라가 강점이 있고 미국은 도움이 절실한 분야”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필요에 따라 기술 이전과 여러 투자 등 조건을 방위비에 포함하고 레버리지(지렛대)로 활용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근 한화오션 등 국내 기업이 수주 성과를 내고 있는 미 군함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중심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예산과 경기 상황 등 의제를 다각화해 협상 포지션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상기 한국협상학회 부회장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연 100억달러’ 혹은 ‘두세 배 증액’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건 브라케팅(협차법) 협상 전략 중 하나”라며 “앵커링 이펙트(정박효과)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협상테이블에 오르기도 전에 ‘어차피 줄 수밖에 없다면’이라고 전제해 버리면 계속 말리게 된다”면서 “미국은 합의 이후 재협상 단계가 반드시 있고, 최종 합의 이면에 ‘사이드 레터’가 중요하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한반도 방위에 국한하지 않고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장하는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에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 대응 방안으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조기 전환’ 또는 이에 준하는 수준의 권한을 확보하는 것을 미국에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따른다.
김래현 센터장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전작권은 맞물려 있는 부분이고, 중국과의 관계 등 외교적 문제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면서도 “장기적으로 방위비 분담액이 늘어나고 전략적 유연성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전작권을 가져오기 위한 필요 예산 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반면 주병기 교수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은 한반도 정전 체제에서 평화 유지를 위해 북한에 대항하는 군사력으로서 역할이 있는 것이고, 대(對)중국 견제 등으로 역할을 확장하는 건 우리에게 이로울 게 없기 때문에 용인하면 안 된다”면서 “한·미 군사동맹의 신뢰 관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수용 가능한 방위비 분담을 논의해야 한다”고 신중한 접근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주 교수는 국방비를 두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GDP 대비 비중이 높고, 모병제가 아닌 의무병제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방서비스 비용은 더 높은 꼴”이라며 “국방비 예산을 늘린다면 의무병과 직업 군인의 인건비 체계를 높여야 한다. 가계소득으로 이어지면서 국내 소비와 분배 등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제언했다.
미·북 관계 개선책도 카드
이 밖에 한국이 미국과 북한의 대화와 관계 개선에 있어 화해 제스처를 취하는 등 외교적 ‘중재자’ 역할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조언도 따른다.
정은숙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은 지난 7월 21일 발간된 세종포커스 ‘2025 헤이그 NATO 정상회의 성과, 과제, 정책시사점’ 보고서에서 “유럽 동맹국들은 2035년까지 10년 내 GDP 5% 목표에 합의한 대신 위협인식 공유 및 집단안보 공약을 재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의 기지 내지 친화력이 큰 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주 교수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의 채널을 열거나 군사적 긴장 완화 등을 이끌어내면 자국 내 정치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며 “평화 무드 조성을 위해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과 구호품 등을 지원하는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 트럼프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과 북한이 평화적인 관계 혹은 협력 체제로 가면, 한반도의 정전 체제에 따른 불확실성을 낮춰주고 한국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해주는 측면도 있다”면서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큰 방향성을 가져가면서 다양한 협상안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