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1980 밥상의 비밀은?
“감자볶음, 감자전, 감자국… 또 감자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네 밥상은 매회마다 화제가 됐었다. 감자를 한 자루 사오면 그걸로 일주일 내내 반찬을 돌리고, 된장국에 김치, 김, 깻잎, 콩이 박힌 잡곡밥이 고정 멤버였던 시절. 1980년대 서민들의 밥상은 대부분 그랬다. 식재료는 주로 채소로 단출했지만, 한 상은 언제나 든든했다. 그렇게 큰손 엄마가 차린 ‘소박한 진수성찬’은 옆집, 앞집, 뒷집 밥상에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1980년대 밥상은 영양학적으로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 대한영양사협회가 1980년대 국민 영양섭취 실태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2300kcal 안팎으로 지금보다 낮았지만, 채소·잡곡 위주의 식단 덕분에 식이섬유와 미네랄 섭취는 오히려 풍부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곡물·채소 중심의 전통 식단이 비만과 당뇨 같은 만성질환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당시 국민건강보험 통계에서도 고혈압·당뇨병 환자 수는 지금의 절반 이하 수준이었다.
30세를 바라보는 기자에게도 추석 하면 떠오르는 건 나물이다. 새벽부터 들려오는 엄마와 할머니의 달그락 소리에 눈 비비고 일어나 제사를 치르고 나면, 나물 열두 가지가 커다란 대접에 한데 담겨 비벼졌다.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애호박… 그게 곧 명절의 맛이었다. 기름진 전이나 고기도 물론 있었지만, 진짜 주인공은 밥과 채소였다. 그 슴슴한 맛은 자취방으로 돌아가 맵고 짠 배달음식으로 ‘혼밥’을 할 때마다 떠오르곤 한다. ‘괜히 먹었다’ ‘더부룩하다’ ‘만성위염이 더 심해지지는 않을까’…. 뒤늦게 걱정하며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헹구다 보면, 결국 그리워지는 건 집밥. 특히 추석 아침 채소의 건강한 맛이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2025년 현재 우리 식탁은 ‘풍요’를 넘어 ‘과잉’에 가까워졌다. 고지방·고당분 초가공식품과 배달음식 섭취가 늘어나면서 성인병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만 유병률은 1980년대 10%대에서 2020년대 들어 35% 이상으로 급증했다. 질병관리청 자료에 따르면 당뇨병 환자는 1990년 60만명 수준에서 2023년 400만명에 달했다.
과거 절제된 ‘부족의 식단’이 건강을 지켜주었다면, 지금은 넘치는 ‘풍요의 식단’이 오히려 질병을 불러오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육고기 대신 생선, 두부, 계란찜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에는 고기 없는 밥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외식과 가공식품의 발달은 식사에서 기름과 나트륨 섭취를 늘렸고, ‘맛있다’는 감각은 때로 ‘과하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과잉 섭취와 불균형이 한국인의 새로운 건강 위협”이고 분석하고 있다.
풍요의 상징이 건강을 위협하는 사례는 또 있다. 바로 흰쌀밥이다. 1980년대 잡곡밥은 영양학적으로는 훨씬 균형 잡힌 식단이었지만, 어린 세대들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음식이었다.
흰쌀밥의 역설
흰쌀밥이 귀한 시절,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흰쌀밥은 ‘특별식’이자 ‘보상’에 가까웠다. 까슬까슬하게 씹히는 잡곡의 식감은 “목에 걸린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당시 학교 급식 기록을 보면, 잡곡밥을 남기는 학생들이 많아 교사들이 남은 밥을 억지로 먹이거나 “밥풀은 남기면 안 된다”는 훈계를 반복하는 풍경이 흔했다고 한다.
1980년대 아이들에게 잡곡은 ‘부족의 상징’이었다. 반면 부모 세대에게는 ‘살림의 지혜’였고, 영양학적 균형을 지키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오늘날 중장년층이 잡곡밥을 건강식으로 반기는 이유는, 과거 경험이 축적된 덕분이다. 하지만 당시 아이였던 세대는 여전히 잡곡밥을 ‘억지로 먹었던 음식’으로 떠올리며, 오히려 초가공식품이나 흰쌀밥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한 세대 안에서도 잡곡에 대한 기억이 상반되지만, 잡곡밥은 사실 영양학 관점에서 보면 더 건강한 선택이 맞았다.
잡곡에 포함된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은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발표 되고있다. 대한영양학회에 따르면, 잡곡밥은 흰쌀밥에 비해 당지수가 낮아 혈당 조절에 유리하고, 비만·당뇨·심혈관 질환 위험을 낮춘다. 역설적이게도 과거 아이들이 싫어했던 음식이 오늘날 성인병 시대를 막아주는 ‘해답’이 된 셈이다.
금기에서 필수템이 된 조미료
조미료의 대중화도 우리 밥상에서 달라진 점이다. 1980년대 부엌의 찬장에는 으레 ‘미원’이 있었다. 한 스푼만 넣어도 국과 찌개의 맛이 깊어지는 ‘마법의 가루’였다. 당시 MSG는 식탁에서 친숙했지만, 사용량은 지금보다 제한적이었다.
집밥 중심이던 시절이라 조미료는 ‘감칠맛을 더하는 보조재’였을 뿐, 주재료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2025년의 밥상은 다르다. 초가공식품과 인스턴트 제품 대부분에 MSG 또는 유사 성분이 들어가면서 사실상 ‘밥상 위의 필수템’이 됐다. 햄·소시지·즉석라면은 물론이고, 냉동식품·스낵류·배달 음식까지도 감칠맛을 강화하기 위해 MSG를 적극 활용한다.
식약처와 세계보건기구(WHO)는 “일상적인 섭취는 안전하다”고 밝히지만, 문제는 양이다. 한국영양학회 조사에 따르면, 2020년대 들어 국민 1인당 나트륨 섭취량은 WHO 권장량(2000㎎)의 두 배에 달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조미료와 가공식품에서 기인했다. 전문가들은 “MSG 자체의 유해성보다, MSG를 다량 포함한 초가공식품이 불러오는 비만·고혈압·당뇨 위험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혈압 환자는 2002년 500만명 수준에서 2022년 1300만명을 넘어섰다. 짠맛과 감칠맛에 길들여진 입맛이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만들면서, 가정식보다 가공식품과 외식에 의존하는 현대인의 식습관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1980년대의 집밥 속 MSG는 ‘조금 더 맛있게 먹기 위한 양념’이었다면, 2025년의 MSG는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감칠맛의 코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