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협상 테이블에 '관세' 대신 올라온 것...韓은 원잠, 美는?
관세전쟁으로 시작된 한·미 협상은 ‘잠수함’으로 끝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500억달러’라는 숫자를 얻었고, 이재명 대통령은 ‘핵추진 잠수함’이라는 안보 ‘게임체인저’를 얻었다. 두 달에 걸친 한·미 간 치열한 협상은 ‘싱거운’ 윈윈 게임처럼 가볍게 마무리됐다. 막판까지 난항이 거듭됐다는 관계자의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미 양국은 가장 원하던 것들을 각각 얻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현금 2000억달러와 조선프로젝트 1500억달러를 합해 그가 원했던 3500억달러 투자를 확보하는 ‘힘’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약속받은 ‘5500억달러’와 함께 막대한 규모의 투자유치 성과로 미국 시민들에게 각인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얼마를 덜 주느냐’의 협상논리를 ‘우리는 무엇을 얻느냐’의 서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특히 트럼프 요구의 핵심인 ‘선(先)현금’ 지급방식을 한국 주도형의 ‘상업적 합리성’을 담보하는 ‘단계적’ 투자 프로젝트 개념으로 전환시켰다.
미국 아니면 선택지가 없던 협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문을 갖는다. 왜 한국과 일본 등 여러 국가들은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딘 베이커(Dean Baker) 미국경제정책연구소(CEPR) 수석연구원은 “관세 25% 인상은 125억달러의 수출감소 효과만 있을 뿐”이라며 “3500억달러 지불은 믿기 어려운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문제는 관세협상의 본질이 ‘관세’가 아니라 ‘생존’에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관세협상으로 국가들을 ‘줄 세우기’ 하고 있다. 중국에 편승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의 경제·정치적 ‘일체화’에 동의할 것인가가 이번 관세협상의 본질이다. 즉 관세협상의 본질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 등은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또 다른 의문이 있다. 왜 같은 형태의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더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나?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대부분의 외신들은 “한국이 일본보다 더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또는 “(일본보다) 덜 부담스러운 조건을 얻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협상당사자인 트럼프 대통령도 한·미 협상 타결 직후 한국의 ‘강한 협상력’에 대해 칭찬했다. 원하던 것들을 대부분 관철시켰던 미·일 협상과 달리 일정한 ‘양보’를 했던 한·미 협상에 대해 트럼프는 만족감을 표현했고 더 나아가 핵추진 잠수함 자체 건조 허용이라는 ‘번외 선물’까지 한국에 건넸다.
이재명 정부의 치밀한 협상준비와 전략이 유효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운’도 따랐다. 그 ‘운’은 다름 아닌 트럼프 정부의 ‘조지아주 현대공장 압수수색 및 체포 자충수’였다. 트럼프는 최근 방한을 앞두고 전용기에서 해당 공장 단속에 대해 “매우 반대했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트럼프가 ‘현대공장 단속’이 한·미 관세협상에 불리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발언이다. ‘현대 공장’ 건으로 이미 악화된 한국 내 대미 여론은 한·미 협상이 파국으로 끝나도 이재명 정부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만들었다. 한국 정부는 이런 국내 여론 기류를 협상과정에서 충분히 활용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한국을 밟으려 하면 발이 뚫릴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며 미국이 ‘협상 파국’에서 더 많은 손해를 입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렇다고 한국 내 불리한 대미 여론과 이재명 정부의 협상력이 트럼프 정부의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결정적 요인은 결국 트럼프 정부의 ‘국가 대개조 전략’에서 한국의 필요성이 일본보다 컸기 때문이다. 2023년 헤리티지재단에 의해 제시된 프로젝트 2025(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는 트럼프 정부가 국정 전반에 걸쳐 ‘국가지도정책’으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정책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통상정책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추진할 것을 강조하며 ‘제조업 대재건’ ‘경제동맹 압박모델’ ‘에너지 독립’ ‘반도체 및 첨단기술 육성’ 그리고 ‘공급망 리쇼어링’ 등을 실천과제로 제시했다. 한국은 거의 모든 영역에 해당한다. ‘경제동맹 압박모델’이 한국·일본 등의 대규모 대미 투자압박 논리로 활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제조업 대재건’과 ‘첨단기술 육성’에 한국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미국 조선업은 한국 기업들의 기술지원 없이 조기에 재건될 수 없고 반도체와 첨단기술 육성도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트럼프 정부는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이 필요했던 미국
이번 한·미 협상에서 한국이 얻은 최고의 성과는 단연코 ‘핵추진 잠수함’ 건조의 자율권을 확보한 것이다. 관세협상 테이블에서 핵추진 잠수함 보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예외적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핵추진 잠수함 자체 건조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하기 민감한 ‘중국’을 거론하며 한국의 ‘역내 견제역할 수행’을 암시했다. 트럼프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 대통령 요청에 화답했다. 더 이례적인 행태다. 공개석상에서 한국 대통령이 정중히 요청하자 이를 단시간 안에 결정하는 자신의 ‘개인적 결단’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뛰어넘어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라는 것을 공식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통령제니까” 가능하다는 말로 자신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음을 환기시켰다. 이는 자신과 거래하면 즉시 결과를 낼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세계 모든 국가들에 보여주는 ‘트럼프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트럼프가 ‘과시형’ 리더라고 해도 치밀한 이해득실 계산 없이 결정하지는 않는다. 트럼프의 결정은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가 미국에 ‘전략적 수익’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 팽창의 핵심전력은 전략잠수함 역량이다. 강력해진 잠수함 역량으로 중국은 인도·태평양 해양 및 항로의 통제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 ‘해양통제권’을 위협받는 미국은 2021년 호주와 영국을 포함하는 오커스(AUKUS)를 창설했고 호주에 2030년대 초까지 3척의 핵추진 잠수함 이전 결정을 하면서 중국 해군 견제역할을 맡겼다. 핵추진 잠수함은 장기간 잠항으로 선제공격하는 상대국가를 보복공격할 수 있는 2차 공격력을 갖는다. 이에 이미 2016년 프랑스로부터 디젤잠수함 12척 도입 계약을 했던 호주는 외교적 갈등을 감수하면서 계약을 파기했다. 이런 전략적 가치를 가진 핵추진 잠수함 보유 허용 결정은 한국을 ‘중국해양봉쇄동맹’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얻는 미국의 전략적·안보적 이익이 크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 관세협상은 ‘관세협상’이 아니었다. 특히 ‘누가 더 얻었는가’의 프레임으로는 이번 협상의 본질을 해석하기 어렵다. 방향은 분명해졌다. 더 이상 일방적 관계가 아니며 상호 전략자산을 교환하는 ‘경제·안보·기술’이 결합된 ‘통합형 전략동맹모델’로 이전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