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노예'를 구한 사람들...0.1% 공익변호사
2014년 2월 전남 신안군 신의면의 한 염전에서 임금체납과 감금을 당했던 장애인 2명이 경찰에 의해 구출됐다. 염전주가 “직업을 소개해 주겠다”며 피해자들을 꾀어내 감금하고 수년간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시킨 것. 이후 신안군의 다른 염전에서도 피해자가 63명이나 발견됐다. 이른바 ‘신안 염전노예 사건’은 장애인 인권유린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대표적 사건이다.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뒤에도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 상당수가 지적장애를 갖고 있어 피해 회복을 위한 법적 대응이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이들을 위해 법률 지원에 나선 사람이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다. 최 변호사는 2015년 11월 피해자들을 대신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2019년 피해자 3명에게 2000만~3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기까지 4년간 긴 법정 싸움을 이어갔다.
취약계층 위한 법률서비스 ‘프로보노’
장애인·이주민·국가폭력 피해자 등은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불린다. 이들은 높은 수임료 탓에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해 저보수 혹은 무료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을 ‘프로보노(Pro bono)’라고 한다. ‘프로보노’는 라틴어 ‘Pro bono(공익을 위하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법조계에서는 꾸준히 언급되는 개념이다. 일반 영리 변호사들도 프로보노 활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다.
약자를 위해 헌신하며 그간 사회변화를 이끌어낸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만난 최정규 변호사는 “소액 사건이 점점 늘고 있는 상황에서 서민이 500만원의 피해를 입고 변호사 비용으로 500만원을 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누구나 언제든지 법적 지원이 필요한 만큼 공익변호사의 존재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14년째 몸담고 있는 법무법인 원곡은 담당 사건의 70~80%가 공익 사건이다. 이 중 장애인 사건을 주로 맡아온 그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인 학대는 여전히 반복된다”며 “실제로 당시 피해자였던 발달장애인이 지난해 8월까지 또 착취를 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수임료 자체가 없거나 소액에 그치는 공익 변호활동을 해나가는 데 생활인으로서 재정적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 변호사는 “신안 염전노예 사건을 함께 대리했던 변호사 13명이 받은 소송구조금은 총 1300만원에 불과했다”며 “발달장애인 사건에서 착수금이나 성공보수를 받으면 가해자 측이 ‘피해자는 원치 않는데 변호사가 부추긴다’는 식으로 몰아간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재홍 법무법인 자연 변호사가 10년 가까이 대리했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프로보노 활동의 대표적 사례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시중에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 제품으로 1300여명이 폐질환에 걸려 사망한 대규모 환경 참사다. 2016년 피해자 400여명이 정부와 제조·판매업체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환경보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재홍 변호사도 이 사건에 뛰어들었다.
지난 10월 20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자연에서 만난 최재홍 변호사는 “사건 초기 30명가량이던 변호사가 지금은 여섯 명뿐”이라며 “그만큼 사건이 길어져 당시 미취학 아동이던 피해자들도 이제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됐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특히 환경보건 소송은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고, 패소 가능성도 높은 편에 속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최 변호사는 “한 후배가 ‘맨날 패소하는데도 어떻게 소송을 계속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우린 악법을 드러내기 위해 장렬히 전사하는 사람들’이라 답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싸웠던 기록은 제도를 바꾸는 근거가 된다”고 덧붙였다.
소송구조금, 수십 년째 ‘100만원’
지난 8월 법무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국내 변호사 수는 3만7368명에 달한다. 이 중 개업 변호사만 3만1007명에 이른다. 그러나 2023년 기준 ‘공익전업변호사’는 117명, 2025년 기준 법률구조 활동에 공헌하는 국선전담변호사는 46명으로 전체 변호사의 약 0.12%에 그친다. 매년 로스쿨 경쟁률과 개업 변호사 수는 늘고 있지만, 정작 변호사들 사이에서 공익 활동에 대한 선호도는 점점 낮아지는 실정이다.
고지운 ‘감사와 동행’ 변호사는 다양한 프로보노 가운데 업무 강도가 가장 높다고 알려진 ‘공익전업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고 변호사는 산재를 입은 이주민이나 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고 변호사는 “이주민 사건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주 발생한다”며 “비자 문제로 구금되거나 부당대우를 당한 현장을 직접 찾아가야 할 때가 많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이주민 사건처럼 기동성이 요구되는 문제는 법률구조공단이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며 “공익전업변호사는 그런 계산 없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조 현실은 ‘프노보노’들이 공익활동에 전념하기에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공익변호사 활동비’라고 할 수 있는 소송구조금은 수십 년째 100만~150만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영국의 경우 국선 변호만으로도 사무실 운영이 가능할 정도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활성화된 미국에서는 공익소송 피해자들의 충분한 배상을 토대로 공익변호사의 경제적 지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변호사의 공익 활동에 대한 교육과 경험 부족은 문제로 지적됐다. 대한변호사협회 프로보노지원센터장을 병행 중인 최정규 변호사는 “현재 온라인 변호사 연수원에는 공익 관련 강의가 전무하다”며 “기존에 있던 이주민 피해·장애인 학대·노인 학대 법률 지원 매뉴얼을 토대로 ‘공익 소송 강의’를 만들어 연수원에 탑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변호사가 되기 전 녹색연합에서 환경운동을 했다는 최재홍 변호사도 “대한변협 등 공적 단체가 신입 변호사들이 공익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