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시트 들여다보니...반짝 뉴스 뒤 '무거운 계산서'가 있었다

2025-11-22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1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한·미 팩트시트 타결 관련 발표 후 질문을 받고 있다. photo 뉴스1

‘포푸루스 불트 데키피(Populus vult decipi).’ 유럽 문명사 관련 책에 등장하는 유명한 라틴 경구(警句)다. ‘인간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환상에 빠져 현실도피로 치닫는 인간 사회를 ‘희극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를 원한다’는 말에 이어지는 또 다른 표현에 있다. 보통 생략돼 있지만, 유럽인들은 ‘포푸루스 불트 데키피’를 듣는 순간 또 다른 말을 떠올린다. ‘에르고 데키피아투르(ergo decipiatur).’ 직역하면 ‘그러니까 속여주자’는 말이다. 앞뒤를 합치면  ‘인간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속여주자’가 되는 셈이다.

마침내 ‘팩트시트(Fact Sheet)’ 모습이 드러났다. 지난 11월 14일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팩트시트를 발표했다. 크게 4개 부분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의 3500억달러 미국 투자로 이 가운데 1500억달러는 선박 관련 투자. 둘째, 미군 지원비용 2030년까지 330억달러. 셋째, 대미관세 15% 인하. 넷째, 안보 관련 한·미 협력과 원자력추진 잠수한 건조 합의.

‘포푸루스 불트 데키피’는 발표된 팩트시트 내용을 보면서 떠올린 단상이다. 25% 관세도 금방 내리고, 첨단산업에 대한 대미 투자도 늘고, 핵추진잠수함도 곧 한반도에 등장할 것만 같다. ‘인간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속여주자’는 유럽 경구가 한반도 상황을 집약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필자가 보면 팩트시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추진잠수함과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로 집약된다. 대미 투자 3500억달러와 미군 지원비 330억달러가 아닌,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핵추진잠수함과 선박 건조가 최대 관심거리다.

3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미군 지원비 330억달러를 5200만 한국인구로 나눠 보자. 1인당 7365억달러로, 대략 1000만원 이상이 미국에 넘어간다는 의미다. 물건을 살 때 단 1000원만 계산이 틀려도 고성이 오갈 판이다. 그런데 1인당 1000만원에 달하는 문제에 관한 국민의 관심을 보면 편의점 계산대 앞 1000원만도 못하다. 이는 핵추진잠수함과 마스가 관련 장밋빛 환상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왜 핵추진잠수함이 한국에 필요한지’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핵추진잠수함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선택이나 방향도 있을 텐데, 왜 어느날 갑자기 핵추진잠수함으로 올인하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한국인이라면 자긍심까지 느낄 만한 마스가 얘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마스가란 단어는 미국 미디어에서 생소하게 다룰 서울발 ‘조어’다. 한국발 관세협상을 다루는 과정에서 등장하긴 하지만,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원조 트럼프조차도 낯설어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발표장 분위기를 보면 1500억달러 조선 투자가 팩트시트의 대세로 부상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등장한 말로 ‘둠스크롤링(Doomscrolling)’이란 유행어가 있다. ‘파멸+손가락으로 넘긴다’는 말의 합성어로, 어둡고 무서운 얘기만 계속 접하다 보니 부정적인 뉴스나 정보만 강박적으로 계속 찾아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팩트시트 발표를 대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정반대다. ‘팩트시트’를 보고 있으니, ‘둠스크롤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한·미 관세협상 3막 4장 가운데 이제 막 1막이 끝났다. 시동만 건 상태로 2막, 3막에 밀려들 어두운 그림자가 팩트시트 전체에 넘실댄다. 1000원이 아닌 1인당 1000만원이 국민에게 전가되는 것은 물론이고, 핵추진잠수함과 마스가도 낙관적이지 않다.

한·미 관세협상의 ‘팩트시트’를 올려 놓은 백악관 홈페이지.

팩트시트, 법적 효력 없어 

‘팩트시트’란 것은 무엇인가? 이 대통령 발표를 보면서 접한 최초의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 양국의 관세·안보 분야 협상 결과를 담은 공동 설명문’이 팩트시트라고 한다. 문제는 법적 효력이다. 한순간 등장한 팩트시트가 갖는 정통성으로서의 법적 근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법적 효력은 제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정부 차원의 공식결정이라기보다 기본적인 합의 내용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팩트시트를 대하는 양국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악관이 발표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팩트시트는 언론 담당자가 확인 차원에서 인터넷에 올린 것에 불과하다. 장관은커녕 대통령이 나와서 팩트시트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팩트시트는 양해각서(MOU)보다도 낮은 단계의 외교 의전이기도 하다. MOU는 법적 구속력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팩트시트는 법적 구속력과 무관하다. 따라서 여차하면 팩트시트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런 문서를 국가정책이자 미래로 단정했다. 물론 팩트시트에 근거해 보다 더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분명한 것은 팩트시트를 기반으로 한 장밋빛 미래가 한순간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근 한국의 외교를 보면 정상 간의 공동성명(Joint Statement)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 어디를 봐도 공동성명은커녕 공동선언도 없다. 잘하면 공동 기자발표 정도지만, 법적 효력이나 문서와 무관한 말잔치다. 외교 의전상 팩트시트는 공동기자회견보다도 낮은 단계의 문서다. 팩트시트는 이 대통령 발표 하루 전인 11월 13일 백악관 홈페이지를 통해 공표됐다. 한·미 관세협상에서 트럼프는 갑, 한국은 을의 입장에 있다. 백악관 팩트시트 발표문이 정답이고, 한국의 팩트시트는 복사물에 그친다. 법적 효력은 없다 해도 일단 영어로 된 백악관 팩트시트가 원본이다. 국가 간 문제가 문서로 표기될 경우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자세히 대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결론이지만, 서울발과 워싱턴발 팩트시트 해석이 너무도 다르다. 너무 많아서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다. 백악관 팩트시트를 보면서 한국발 발표를 보면 ‘이어령 비어령(耳於鈴 鼻於鈴)’에다 아전인수의 극치다.

핵잠수함 문제를 살펴보자. 다소 길지만, 백악관 원문이다. ‘미국은 평화적 연료 목적에 사용될 민간 차원 우라늄 농축 과정을 지지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추진 공격용(Attack) 잠수함 건조를 허용(Approval)한다. 미국은 핵연료를 포함한 핵잠수함용 건조에 필요한 요건(Requirements)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과 함께 긴밀히 일할(work closely) 것이다.’

잠수함과 핵연료 문제는 백악관 팩트시트 제일 마지막에 기입돼 있다. 백악관 팩트시트의 핵심은 3500억달러 대미투자와 ‘어느 새’ 새로 추가된 330억달러 미군 지원비용에 있다. 한국이 강조한 핵잠수함 문제는 제일 끝부분 부록처럼 붙어 있다. 위성락 대통령실 안보실장은 이 대통령 발표 직후, “핵잠수함 건조와 보유 나아가 우라늄 농축 등 핵 에너지 관련 합의 사항은 ‘(한·미 간) 돌이키기 어려운 약속’이다”라고 강조했다. 필자는 안보실장 얘기를 들으면서 백악관 원문을 다시 읽어봤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 될 만한 근거가 뭔지부터 알고 싶었다. 일단 법적 구속력도 없고, 공동 발표문보다도 낮은 수준의 ‘팩트시트’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감이 앞선다. 동시에 ‘돌이키기 어려운 약속’이라 볼 만한 확정적 문구가 ‘단 하나’도 없다.

백악관은 세계 외교를 주도하는 최강국 미국의 정수(精髓)다. 활자로 발표할 경우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자신들에 유리한 해석과 의미를 심어둔다. 부사만 하더라도 수식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동사에 준하는 의미로 통한다. 강자의 논리지만, 부사도 형용사도 동사가 될 수 있다. 핵잠수함 관련 사안을 보면 ‘언제 어떻게 누가 어디서 얼마나’에 관한 얘기가 전혀 없다. 그러나 문장 전체를 보면 미국은 허락하는 입장이고, 한국은 허락받는 위치다. ‘돌이키기 어려운 약속’ 발언은 한국 안보실장 스스로가 ‘포푸루스 불트 데키피’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겠다.

 

팩트시트에 따른 한·미 입장 차이 

한·미 관세협상은 국가 차원의 논의인 동시에, 이재명 정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확인이란 측면도 갖고 있다. 정부가 아닌 ‘정권 차원’의 협상이란 의미다. 워싱턴에는 이재명 정부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기독교 관계자 체포와 교회 사찰, 윤석열 정권 요인들 투옥과 미군부대 조사와 관련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주 원인이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한·미 관세협상과 한·미 정상회담=워싱턴의 불신감 해소’의 무대라 볼 수도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뉴욕의 글로벌 비즈니스맨 트럼프가 그 같은 생각을 놓칠 리 없다. 지난 10월 29일 한·미 정상회담 시작 약 8분 뒤 트럼프의 말을 들어보자.

“(이 대통령의 환대는) 나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대단한 공헌입니다.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반대 의견과 달리) 당신을 주목해왔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대통령에 당선된 이래)인데도, 당신이 성취해내고 창조해낸 것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발언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반대 의견과 달리) 당신을 주목해왔습니다(I had it focused toward you as opposed to against you, which some people did)”라는 구절이다. 국가나 정부의 공식 차원이라기보다 정권 차원의 발언에 해당한다. 필자 판단이지만, 트럼프 개인이 이재명 정권을 지지하고 인정한다는 말로 들린다.

팩트시트의 핵심을 어디에 둘지는 각자의 정세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한국 정부, 특히 이 대통령 입장에서 팩트시트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핵잠수함 보유라는,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기는 팩트시트일까? 트럼프가 한국에 남긴 발언들을 팩트시트로 연결해 보면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 ‘팩트시트=둠스크롤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1막은 거의 끝나가고 2막과 3막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저기 뜬소문은 많지만, 15% 관세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행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둠스크롤링’이 언제쯤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