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곶자왈 가시덤불의 공생..."조금씩 내어줘야 함께 산다”
제주도를 여행하다 보면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바위 더미로 이루어진 기묘한 숲 ‘곶자왈’을 만나곤 한다. 제주 말로 ‘곶’은 숲, ‘자왈’은 가시덤불을 뜻하니, 곶자왈은 가시덤불 숲이라는 의미다. 화산 분출 때 흘러내려 굳은 용암이 만든 크고 작은 돌 덩어리와 나무, 덩굴이 마구 엉켜 있어서 생김새는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이 숲은 주로 한라산 동서쪽 계곡에 군데군데 분포한다. 경사가 가팔라 물살이 빠른 남북 계곡과 달리, 동서 사면은 완만한 까닭이다. 곶자왈은 제주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제주 속담도 많다. 그중 식물과 관련된 말 하나를 소개하자면 “낭은 돌 의지, 돌은 낭 의지.” 나무는 돌을 의지하고, 돌은 나무를 의지한다는 뜻이다. 곶자왈은 굳은 용암 위에 형성된 숲이라 바닥에 흙이 거의 없다. 나무는 돌에 뿌리를 내려야만 하고, 세찬 제주 바람을 견디려면 그 뿌리로 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돌은 나무에 엮여야 다른 데로 굴러가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곶자왈에서 나무와 돌이 공존하는 이 모습은, 사람도 서로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옛사람의 지혜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돌 위로 드러나 옆으로 퍼진 나무뿌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버팀뿌리, 곧 판근(板根)이다. 강한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수평으로 넓게 뻗은 뿌리를 통해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게 하는 생존 장치다. 돌 틈을 비집고 자라난 그 모습이 바람과 척박한 땅을 견뎌내기 위한 생명의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요철이 심한 지형 탓에 햇빛과 바람의 세기가 위치마다 달라, 곶자왈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비로운 숲이다. 겨울에 푸른 잎이 무성하기도, 봄에 낙엽이 흩날리기도 한다. 계절이 엇갈리는 듯한 이색적인 풍경이 한자리에서 공존하는 셈이다. 이런 곶자왈 매력에 홀린 듯 걷다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동아줄을 감아놓은 듯, 덩굴이 나무 몸통을 칭칭 휘감고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덩굴 하나가 올라가다가 중간에 끊어져 있었다. 숲 해설가에게 이유를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바깥쪽에서 감아 올라간 덩굴의 조임에 압사당한 겁니다. 다음 해엔 죽은 덩굴의 후손이 복수하듯 다시 밖으로 감아 올라갈 거예요. 그다음에는 상대방 후손이 되갚죠.”
‘생태지위의 상호 존중’
섬뜩한 설명이었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짠한 이야기였다. 서로를 휘감고 얽히며 살려고 애쓰는 생명의 또 다른 몸부림이니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도, 어느 쪽 편을 들 수도 없었다. 다만 그 끝없는 싸움에 끼어 상처 입은 애꿎은 나무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발길을 옮기다 시나브로 생각이 이어졌다. 숲의 덩굴처럼 우리 사회도 온갖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갈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충돌하는 상태.” 단어 그대로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두 식물이 한데 묶였을까? 흥미롭게도 그 안에는 생물학적 맥락이 숨어 있다. 칡과 등은 모두 콩과 식물로, 전 세계의 다양한 환경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둘 다 홀로 설 수 없기에, 곁에 있는 나무를 가리지 않고 휘감아 올라가며 생존을 이어간다. 제각각 뻗어 나가려는 생명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복잡한 얽힘,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생생한 증거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갈등’이라는 단어가 품은 본래의 의미다. 경쟁은 공생적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다.
생태학은 경쟁을 생명의 본질적인 상호작용으로 본다. 서로 겨루는 과정이 생물을 단련시키고, 장기적으로는 다양성을 키운다고 여긴다. 사실 자연에서는 앞서 소개한 덩굴처럼 사생결단 식으로 치닫는 경쟁은 드물다. 대부분 생명체는 갈등하기보다는 저마다의 타협점을 찾아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다소 무미건조하게 말하면 오랜 ‘진화의 결과’이고, 감성적으로 표현하면 ‘자연이 전하는 공생의 지혜’다.
그 지혜의 핵심은 ‘생태지위’의 상호 존중이다. 생태지위란 한 생물이 자연환경에서 맡은 역할을 뜻한다. 인간 사회로 비유하자면 직업과 같은 개념이다. 자연에서 생물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왔다. 서로 부딪히고 타협하는 과정을 거치며 서로 다른 생태지위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생태계는 더욱 다채롭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타협을 이루었다면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자 공존의 첫걸음이다. 심지어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세균조차 이 원칙을 지킨다. 썩은 생선이나 화장실 냄새의 주성분인 암모니아(NH3)를 분해하는 세균 무리가 좋은 본보기다. 이들에게 암모니아는 훌륭한 음식, 곧 에너지원이다. 화합물에 수소 원자(H)가 많을수록 에너지 함량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귀한 칼로리를 혼자서 독차지하는 세균은 없다. 한 무리가 먼저 암모니아를 분해하면, 남은 에너지를 다른 세균이 이어받아 다음 단계의 물질로 바꾸어 간다. 서로의 몫을 나누며 일을 완성하는 셈이다. 세균조차 해내는 일을 고매한 인간은 종종 실패한다.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 때문이다. 진정한 공생을 원한다면 서로 조금씩 내어주고 품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의 능력을 존중하고, 남보다 잘하는 일이 있다면 그 재주를 나누어 서로를 돕는 삶의 방식 말이다.
언뜻 성글어 보이는 곶자왈은 이제 ‘제주의 허파’로 불리며 그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2015년 조사 결과, 제주도 식물 약 2000여종 중 약 40%가 곶자왈에 서식한다고 한다. 한때 곶자왈은 불모지의 대명사였다. “곶들에 가그네 낭 해오라이, 갠디 자왈드랜 가지 말라이.” 숲에서는 나무를 해오되, 가시덤불에는 가지 말라는 말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버려진 땅으로 여겨졌던 환경이 오히려 나무에는 축복이었다. 돌무더기 위지만,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사람 손길에서 자유롭게 잘 자랄 수 있었다.
곶자왈의 재평가
시간이 흐르며 숲은 스스로 순환했다. 나무가 커질수록 키 작은 가시덤불은 점점 햇볕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훌쩍 자란 나무에 가려져 생을 마감하는 가시덤불이 늘어나면서 나무하려는 사람들 발길이 점차 잦아진다. 가시덤불 보호벽을 잃은 나무는 결국 베어진다. 그러면 그늘에서 시들어가던 가시덤불이 빛줄기를 받아 번성한다. 그리고 다시 인적이 끊어진다. 나무는 상처를 딛고 서서히 잘린 뿌리에서 잔가지를 내며 새 삶을 시작한다. 비록 또다시 잘릴지언정 뿌리가 살아있는 한 나무는 포기하지 않는다. 곶자왈 나무 대부분은 나이가 수백 년이 넘는다. 비록 몸통 굵기가 나이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대신 뿌리 하나에서 여러 줄기가 힘차게 자라고 있다. 이제는 땔감을 구하러 곶자왈에 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거친 땅바닥에서 거센 바람과 우악스러운 사람 손길을 견뎌내며 꿋꿋하게 살아온 곶자왈 나무가 시리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