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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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워싱턴 방문 일정이 확정됐다. 시 주석은 9월 22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는 ‘미·중 인터넷산업 포럼’ 참석으로 방미 일정을 시작해, 2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뒤, 28일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연설한다. 붉은 카펫 위를 걷는 의장대 사열과 심야 만찬이 곁들여진 국빈초청이다.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미·중 간에 산적한 문제는 물론,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양국 간의 관심사가 논의될 전망이다. 북핵 문제 논의 과정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란 서울발 전망도 눈에 띈다.

중국 경제는 현재 내리막길이다. 증시가 폭락하고 수출도 엉망이다. 반대로 뉴욕행을 원하는 중국 부자들 덕분에 맨해튼 집값은 천정부지다. 양적으로 보면, 미국에 보도되는 중국 관련 기사는 한국의 10배 정도는 됨 직하다. 99%는 어두운 보도다. 경제·군사·외교·사이버보안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진핑의 방문을 통해 중국이 미국에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이다. 대동한 경제사절단의 대규모 쇼핑이나 투자가 이뤄지겠지만, 종전의 열기나 박수는 기대하기 어렵다. 높고 안정된 이자 덕분에 가만있어도 세계의 돈이 미국으로 몰려든다. 워싱턴에서 보면 예측 불가능한 골칫덩어리가 중국이다. 중국이 전체 미국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과 더불어 중국을 G2라 부르지만 사실 G2라는 말은 중국인조차 내심 꺼리는 용어다. 겸손해서가 아니다. G2라는 지위를 갖는 순간 직면하게 될 책임과 의무 때문이다. 기후변화, 난민문제, 환경문제와 같은 글로벌 차원의 이슈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약속해야만 한다. 중국이 그 같은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지킬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진핑의 워싱턴 방문은 ‘고전적 차원’의 마찰과 갈등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중국 내 인권문제다. 류샤오보(劉曉波)와 같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가택연금하고, 수십 명의 기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을 ‘증시폭락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미국은 그같은 문제에 대한 입장과 주장을 이번에 시진핑에게 확실히 밝힐 전망이다. 인권문제는 오바마만이 아닌,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인권운동가들을 통해서도 시진핑의 방미 기간 활발히 제기될 전망이다.

시각장애자 인권운동가인 천광청(陳光誠·44)은 그같은 움직임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2012년 봄, 가택연금에서 탈출해 베이징 미국대사관에 피신했다가 미국 망명에 성공했다. 올해가 미국 망명 3년째로 최근 ‘맨발의 변호사(The Barefoot Lawyer)’란 책을 펴내 화제가 됐다. 영국·프랑스·일본 등 6개국에서도 번역됐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월스트리트저널 등이 ‘인간 승리의 증거’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인권운동가 천광청을 시진핑 중국 방문 10일 전, 워싱턴 조지타운대학 인근의 피자집 등 레스토랑에서 세 차례 만났다. 워싱턴 싱크탱크들이 개최한 중국 관련 포럼으로 넘실거릴 때다. 천광청의 부인 위안웨이징(袁偉靜)이 매번 자리를 함께했다. 천광청과의 인터뷰는 9월 25일 그가 발표할 ‘특별한’ 연설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시진핑이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는 날이다.

“미국 국회의원들 초청으로 의회 연설을 할 예정이다.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는데 워낙 영광스러운 곳이어서 조금 힘이 든다. 외교인권위원회 소속 의원과 중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권문제가 집중 논의될 예정이다. 초청한 국회의원은 나의 메시지와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말한다.”

2012년 4월 가택연금에서 탈출 후 베이징 미국대사관의 보호를 받을 당시 어머니(왼쪽), 아내, 자식과 함께 사진을 찍은 천광청. ⓒphoto 연합
2012년 4월 가택연금에서 탈출 후 베이징 미국대사관의 보호를 받을 당시 어머니(왼쪽), 아내, 자식과 함께 사진을 찍은 천광청. ⓒphoto 연합

“통역이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영어로 연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어진 시간이 짧기 때문에 통역을 사용하면 많은 메시지를 담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천광청은 영어 알파벳도 모르던 인물이었다. 어릴 때 병을 앓으면서 시력을 잃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8살이 돼서야 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 들어갔다. 10년 만에 초·중·고 과정을 끝내고, 28살 되던 1998년 난징(南京)대학 의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고향인 산둥성(山東省) 이난(沂南)에 내려가 안마사로 일하던 중 인권운동에 투신한다. 영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경과 환경에서 자랐지만, 미국에 온 뒤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시각장애자가 영어를 공부한 지 3년 만에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담을 생각인가”하고 물었다. “중국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을 얘기하겠지만, 워싱턴에 올 시진핑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역점을 둘 생각이다. 현재 중국은 두 개로 나눠진다. ‘도시중국’과 ‘농촌중국’이다. 중국공산당이 발전했다고 자랑하는 중국은 인구 3할 정도의 도시에 그친다. 외국인에게 익숙한 중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구 7할에 달하는, 농촌중국에서 벌어지는 노예 같은 삶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거기서 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살아왔다. 나는 시력을 잃었지만, 중국 민중의 현실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시진핑은 두 눈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눈을 떠서 중국 민중의 모습을 똑바로 보기 바란다. 공산당만을 위한 축제나 부자들의 돈잔치에 빠지지 말고 농촌중국의 현실을 목격하고 그들의 인권 향상에 노력해주길 바란다. 나는 시진핑과 공산당이 그 같은 노력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나 기대는 접었다. 기본적인 인권조차 갖지 못하는 중국 민중 스스로가 일어나 쟁취해낼 것이다. 시진핑은 가까운 시일 내에 스스로 일어서는 중국 민중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천광청은 시진핑을 상대로 한 싸움을 결코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화 도중 곳곳에서 비쳤다. “공산당은 새로운 지배계급에 불과할 뿐, 보통 중국인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존재”라고 말했다. 천광청은 억압받는 중국인을 지칭하는 말로 ‘민중(民衆)’이란 단어를 선호했다. 인민이란 말은 1950년대 마오쩌둥(毛澤東) 집권 초기에나 의미를 가졌을 뿐,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의미로 퇴보했다고 해석했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도시중국, 농촌중국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제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듯하다. 시진핑이 아니라 중국 민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있을 듯하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한 천광청. 최근 저서 ‘맨발의 변호사’ 서문을 달라이 라마가 썼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한 천광청. 최근 저서 ‘맨발의 변호사’ 서문을 달라이 라마가 썼다.

“돈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우선시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중국인을 돈으로 몰아세운 인물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돈을 벌어 중국을 부강하게 하자는 생각인데, 삶의 가치를 무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작용이 대륙에 불어닥치고 있다. 환경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경제지상주의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돈의 노예가 될 뿐, 인간다운 삶이 없다. 삶의 가치를 모를 경우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무용지물이다.”

천광청은 시진핑의 워싱턴 방문에 맞춰 중국 인권운동가들의 항의시위가 있을지, 거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동료들로부터 들었지만 이번에 미국 정부가 중국 인권운동가의 백악관 주변 항의시위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항의시위가 허락된 다른 나라 정상에 비하면, 아주 특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오바마는 시진핑이 원하는 빛나고 화려한 특별 퍼포먼스를 전부 해줄 듯하다. 국빈 자격으로 초청하면서 예포도 쏘고, 초대형 연회를 베풀어주면서 성대하게 맞이할 것으로 본다. 시진핑의 국내 권력 기반 강화에 미국이 협조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시진핑은 자신의 특별 퍼포먼스를 빛내기 위해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시진핑이 미국의 환심을 사는 노력의 예로 중국 인권운동가들의 석방을 언급했다. “오늘 통화를 했지만, 그동안 억류돼 있던 궈위샨(郭玉閃)이 풀려났다고 한다. 내가 가택연금에서 탈출했을 때 1000㎞ 떨어진 베이징 미국대사관까지 안내해준 인권운동가이다. 나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 그의 건강이 어떤지, 그의 주변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겨뒀다.”

천광청은 100% 시각장애자다. 그러나 인터넷과 아이폰에 능한, 믿기 어려운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아이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음성으로 바꿔, 빠른 속도로 돌려가며 들었다. 특별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글을 소리로 바꿔 정보를 취득한다고 한다. 대화를 하는 동안, 최근 뉴스에 관한 정보력이 보통 사람 이상으로 느껴졌다. 북한 주민들이 서방 영화를 보다가 총살됐다는 얘기도 알고 있었다. 중국 내 인권운동가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중국 현지 사정도 마치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환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준 고향 사람들과도 수시로 대화한다고 한다. 3년 전 뉴욕에 처음 왔을 때는 “미국에 가서 거지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문이 고향 주민들에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거지가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확신시키기까지 무려 3년이 걸렸다.”

천광청은 시각장애자로서 인권운동에 매진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인물이다. “20살 되던 때 아버지가 책을 하나 줬다. 시각장애자로서의 권리 같은 것을 담은 법률서다. 책은 물론, 라디오의 법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자보호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인권활동에 나선 것은 1996년부터다. 동네에 손자가 마비증상으로 고생하는 장애 노인 부부가 있었다. 세금감면은 물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족이었다. 그들을 위해 세금감면과 지원 관련법을 지켜달라고 베이징 중앙정부에 탄원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천광청은 법률 공부를 한 적이 없다. 때문에 변호사 자격증과는 무관하다. 농촌의 안마사로 일하며 주민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던 법 지식을 전해줬을 뿐이다. 법을 모르는 주민들에게는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장애자 가족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중국 전역 장애인들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서방에서도 주목하는 새로운 인권운동가의 등장이다.

“작정을 하고 인권운동가로서 나선 것이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됐다.”

이후 천광청은 환경운동에 나선다. 고향에 들어선 제지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가 문제였다. “갑자기 동물들이 병에 걸리고, 피부병 환자도 늘어났다. 탄원서를 올리고, 지방정부가 토지법을 악용했다는 사실도 함께 고발했다. 승소는 했지만, 공산당의 무능을 폭로하는 인물로 지목됐다. 1가구1자녀 정책과 관련된 강제중절수술을 외신에 알리는 과정에서 2005년 9월 ‘반중국 외세주의자’란 혐의로 체포됐다.”

주간조선 인터뷰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기념관에 새겨진 루스벨트의 연설문 문구를 손으로 더듬고 있는 천광청.
주간조선 인터뷰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기념관에 새겨진 루스벨트의 연설문 문구를 손으로 더듬고 있는 천광청.

2006년 8월, 천광청은 기물파손과 폭동선동 혐의로 4년3개월의 감옥형에 처해진다. 이 선고 직후인 2006년 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천광청을 ‘글로벌 인물 100인’으로 선정했다. 천광청은 2010년 3월까지 51개월간의 형기를 채운 뒤 출감했다.

중국 인권운동가의 대부분은 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천광청은 시골을 기반으로 했다.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시골은 특히 공산당의 통제력이 강한 곳이다. 형을 전부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곧바로 불법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두 평 정도의 방 하나가 전부였다. 집 주변에 무려 7개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10명의 공안요원이 상주했다. 2012년 4월 탈출할 때까지 1년7개월가량 한 발짝도 못 나갔다.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매일 폭행을 당해야 했다. 물도 없고, 밥을 해먹을 만한 불도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갖다 주는 채소와 음식을 어머니가 받아와서 조금씩 나눠 먹었다. 전기도 아예 없고, 전화는 엄두도 못 냈다. 양초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밤 7시부터 암흑으로 변했다. 자식들도 왕따를 당해 학교에 가지도 못했다.”

천광청은 두 자식과 부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건너왔다. 뉴욕 생활에 이어 2년 전부터는 워싱턴 근처 메릴랜드주로 옮겨 살고 있다. “12살 아들과 10살 된 딸이 있지만, 공립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가끔씩 중국 친구들이 그립다고 하지만, 중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한다. 집사람과 어머니도 중국에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감옥과 가택연금을 합쳐 전부 6년간 고생했다. 당시의 악몽은 여기에서도 잊을 수 없다.”

2012년 5월 4일, 천광청은 중국을 떠났다. 중국에 남을 경우 많은 것을 보장해주겠다는 정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와의 인터뷰 도중 함께 있던 부인 위안이 말했다.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불가능하다면서 줄곧 말렸다. 그렇지만 남편은 성공을 확신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공안들이 7개의 감시카메라를 전부 확인하지는 못한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태해질 것이다. 그것이 공산당의 습성이다.’ 나는 남편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다. 그가 집에서 탈출하는 동안 병이 든 것처럼 빈 이불을 덮어씌운 채 거짓으로 병간호를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남편은 심야에 혼자서 집밖으로 걸어나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10여시간을 걷다가 길가의 공중전화를 통해 친구와 연락해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했다. 혼자서 10시간 걷는 동안 무려 200번이나 넘어졌다. 미국에 들어갈 때 그가 발목을 저는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남편의 탈출이 밝혀진 뒤 나는 공안으로부터 폭력을 당해야 했지만, 속으로는 너무도 기뻤다.”

천광청의 탈출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는 빨리 뛸 수도 없고, 검은 안경을 쓴 인상착의로 인해 발견되기도 쉽다. 잡힐 경우 아예 살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탈출 중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실제 천광청의 탈출을 도와준 사람들은 이후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궈위샨을 비롯해 천광청의 사촌과 마을 주민 등 10여명이 체포수감됐다.

2015년 한국의 가을은 ‘장밋빛 통일전야(統一前夜)’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천안문광장 위에서 시진핑과 함께 열병식에 참석한 바 있다. 천광청에게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중 간의 이 ‘특별한 관계’에 대해 물어봤다.

천광청의 최근 저서 ‘맨발의 변호사’.
천광청의 최근 저서 ‘맨발의 변호사’.

“나는 외교는 모른다. 다만 인권과 법에 주목할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천안문광장에서 군사퍼레이드를 지켜봤다는 뉴스를 들었다. 중국에는 광장이 없다. 천안문광장이 유일하다. 중국 민중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초대형 전시장에 불과하다. 더불어 민주주의 운동을 탱크로 몰아붙인 학살의 현장이다. 반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현장이 천안문이다. 민주주의 나라의 대통령이 시진핑·푸틴과 함께 천안문에 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중국 내 탈북자의 인권문제를 한국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다. 많은 중국 민중은 한국을 민주주의 선배의 나라로 받아들인다. 중국이 참고해야 할 법과 인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모델이기도 하다. 기대가 크다. 민주주의 없이는 인권이 있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한국은 일당독재 국가 중국의 영향권에 있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 한국이 중국에 영향을 줘야지, 거꾸로 영향을 받는 모순은 피해야 한다. 한국 국민들은 한국 정부가 일당독재 국가의 영향하에 놓이는지 여부를 항상 감시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선배이자 모델로서, 공산당 독재자가 아닌 중국 민중들과의 관계에 주목하길 바란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와 인근의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기념관을 찾았다. 루스벨트는 독점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중국 민중에게 닥친 것과 같은 문제점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20세기 초에 해결해냈다. 천광청은 내게 루스벨트 기념관 주변에 새겨져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문에 대해 물었다. 중국 인권운동에 어울리는 적절한 문구가 있기에 직역해서 알려줬다. “정의(Righteousness)와 평화(Peace)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정의를 선택할 것이다.”

천광청은 루스벨트의 연설 문구를 듣는 순간 중국의 현실을 비유한 것처럼 들린다고 감동했다. 평화를 앞세우면서 법이나 인권 같은 정의를 무시하는 곳이 중국이라는 것이다. 천광청은 연설 문구의 알파벳 하나하나를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더듬어 나갔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고대 중동의 현자 예수의 말이 떠올랐다.

전선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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