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서울의 한 대형 서점. ‘4차 산업혁명’을 내세운 책으로 가득하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6월 15일 서울의 한 대형 서점. ‘4차 산업혁명’을 내세운 책으로 가득하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1 지난 4월 28일 고용노동부는 ‘제4차 산업혁명 대비 국가기술자격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직종에 대한 17개 국가자격증을 내년 하반기부터 발급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고용노동부는 로봇 부품, 소프트웨어 개발, 3D 프린터 운영 등을 자격증 항목의 예시로 들었다. 아직까지 정의도 명확하지 않은 4차 산업혁명을 국가 주도로 계량화해 자격증을 발급한다는 얘기다. KAIST의 한 교수는 이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얘기”라며 “정의도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어떻게 측량해 자격을 부여하냐”고 말했다.

#2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못 들어봤다. 책에서 내가 얘기하는 것과 비슷한 변화를 뜻하는 것 같은데, 영미권에서 쓰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해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등 세계화 시대를 진단하는 저서들을 펴낸 그는 지난 5월 30일 자신의 신간 ‘늦어줘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의 한국어 번역본 출판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정부의 신성장전략을 대표하는 용어 ‘4차 산업혁명’에 “거품이 꼈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간 영역에서의 혁신을 글로벌 기업 중심으로 추진해온 미국, 제조업 중심 성장전략을 숙고 끝에 채택해온 독일 등과 달리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구호만 남발할 뿐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관(官) 주도로 성장전략을 밀어붙이는 한국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 열풍은 과연 세계적인 현상일까. 우선 이 용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검색했다. 우리나라 최대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뉴스난에서 “4차 산업혁명”(“ ” 부호로 검색어를 묶어야 정확한 검색 결과가 뜬다)을 검색하면 6월 14일 기준, 약 13만8900건의 뉴스가 검색 결과로 나온다. 언론이 4차 산업혁명을 그만큼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의미다. 반면 미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구글 뉴스난에서 ‘4차 산업혁명’을 뜻하는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을 검색하면 6월 14일 기준, 약 2만2800개의 결과가 나온다.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면 6월 12일 기준, 9건의 뉴스만이 결과로 뜬다. 미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홈페이지에서 나오는 결과는 7건뿐이다.

용어만 수입, 알맹이 없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지난해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을 통해 유명해졌다. 클라우스 슈밥 WEF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저서인 ‘제4차 산업혁명’에서 4차 산업혁명을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생명공학, 물리학 등을 융합하는 기술혁명’이라고 정의하면서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정치·경제·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은 지난 5월 대선을 거치면서 불이 붙었다. 대선후보들은 앞다퉈 4차 산업혁명 관련 공약을 내세우며 미래 먹거리에 대한 자신의 관심도를 유권자들에게 내세웠다. 대선 결과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공약을 내세운 후보 시절의 기조를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최근 새정부의 과제를 꼽으면서 3대 우선과제로 일자리·저출산 문제와 함께 4차 산업혁명을 꼽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4차 산업혁명 관련 정책에 알맹이가 빠졌다고 지적한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었던 원광연 KAIST 전 문화기술대학원장(현 명예교수)은 지난 4월 참석한 한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에는 실체가 없다”며 “AI, 드론, 빅데이터라는 키워드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원광연 명예교수는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이해 못 하는 분이 많아 설명하던 과정에서 한 말이 걸러져 보도된 것”이라면서도 “4차 산업혁명이 국가적 차원에서 화두가 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 명예교수는 지난 4월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대전선대위 내 특위인 ‘제4차 산업혁명 특별시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을 과연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시각도 있다.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화인터뷰에서 “산업혁명은 혁명 이전과 획기적으로 다른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며 “현재의 변화는 생산성 증가에 따른 경제성장률 증가는커녕 ICT(정보통신기술) 혁명 이후 줄어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냐는 점에도 의문이 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에 실체가 없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우선 정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슈밥 WEF 회장은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서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혁명을기반으로 하며 21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출현했다”고 말했다. ICT를 기반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이 생명공학, 물리학 등 다른 분야에도 전파될 것이라는 수준의 피상적인 정의다.

경제학자들은 생산성의 획기적 향상을 가져온 혁명적 사건을 산업혁명으로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18~19세기 초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에 따른 결과였다. 19~20세기 초 2차 산업혁명은 전기와 대량생산 체제의 구축을 통해 일어났다. 일명 ‘ICT 혁명’으로 불리는 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났다. ‘3차 산업혁명을 산업혁명으로 봐야 하냐’를 두고는 아직까지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생산성의 극적인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2년간 연구 끝에 정책 발표

세계적인 흐름에서 최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기술 발전으로 인한 글로벌 산업구조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명확한 추세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을 뿐 일본의 ‘소사이어티 5.0’, 미국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등은 기술 혁신을 통한 현실과 가상의 융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유사하다.

문제는 최근 세계 경제의 흐름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범주화했을 때 전략적 목표가 불분명해진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AI, 빅데이터 등 최신 기술들은 각자 발전하는 것이다. 미국은 다 따로 하는데 우리는 뭉뚱그려서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관 주도로 성장전략을 택하다 보니 나오는 현상이다.”

정부가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졌다는 점도 문제다. 각국의 정부 주도 신성장전략 중 선도적 사례로 평가받는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은 2011년 1월 발의됐지만 발표된 지 2년이 넘은 2013년 4월에야 추진 방안에 대한 제안이 최종 발표됐다. 학계·산업계 연구자들 150여명이 추진 방안을 두고 심도 깊은 토론과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다. 일본도 지난 5월 30일에서야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등을 이용한 기술 혁신을 여러 분야에 도입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계획인 ‘소사이어티 5.0’을 발표했다. 미국은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심도 깊게 논의하고 있다. 미 백악관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인공지능이 경제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가져올 생산성 향상만이 아니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 등 인공지능이 낳을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다뤘다.

반면 우리나라는 기술 혁신이 우리 경제와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이준웅 교수는 현 정부의 4차 산업혁명 관련 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한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려면 이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 구체적 개념을 내세워서 배경, 근거, 논의를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없어요. 어떻게 신기술을 마련할지, 어떻게 하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투자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반성도 없이, 논의도 없이 그냥 진행하는 거예요. 딱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처럼 관 주도로 국가 차원의 위원회만 만들고, 제안서 쓰고 예산 받아서 하는 거죠. 한 나라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일인데 제대로 된 연구나 토론도 없이 핵심 개념을 그대로 수입해 온 나라 정책에 반영하고 있어요. 혁명을 하겠다는 혁명 주체가 정작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는 거죠.”

“긴급 수입된 4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 열풍은 우리가 수십 년간 채택해온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벗어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장우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이던 시절부터 4차 산업혁명 관련 공약 정책자문그룹 멤버를 맡아왔다. 그는 전화인터뷰에서 최근 4차 산업혁명 열풍을 두고 “우리의 추격자적 본능이 발현돼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과 내용을 긴급 수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던 과거 습관이 되살아나면서 ‘국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부 주도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발현된 결과라는 해석이다. 이장우 교수는 “우리나라는 외국의 주장이나 이론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측면이 강하다”며 “4차 산업혁명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경제위기감과 정부 주도 경제정책이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창조경제를 주창했던 이들이 출구전략을 찾으면서 창조경제를 연구한 지식인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담론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을 일찍부터 주창해온 지식인들 중 한 명은 이민화 사단법인 창조경제연구회 회장이다. 이 회장은 전화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은 ‘혁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같다”며 “창조경제는 지식과 창조성을 강조하고, 4차 산업혁명은 현실과 가상의 융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구호가 미래 먹거리에 대한 국민적 위기감을 일깨우는 등 순기능을 지녔다는 시각도 있다. 원광연 명예교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시급성을 정부 차원에서 깨닫고 중장기 플랜을 마련하는 동기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말 ‘혁명’인지에는 의문이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의 중장기 계획을 마련할 동기는 된다는 이야기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에 비해 과학기술이 매우 보수적인 편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란 화두를 통해 어떤 공감대가 국민들에게 형성이 되면 과학기술이 미래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동기부여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화성에 가겠다는 엘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죠.”

할 일은 안 하고 안 할 일은 하는 정부

전문가들은 ‘관(官)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준웅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미국이 잘나가는 이유는 이 분야의 혁신이 국가 수준이 아니라 기업 수준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4차 산업혁명으로 범주화되는 분야의 선두주자들은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글로벌 기업들이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축적한 기술과 데이터로 글로벌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미국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나라는 독일이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기술을 개발하고 거대 플랫폼을 구축해 데이터를 모아온 미국 글로벌 기업들을 후발주자인 한국 기업들이 따라잡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반면 독일은 정부 차원의 성장전략인 ‘인더스트리 4.0’을 추진 중이다. 인더스트리 4.0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4차 산업혁명에 비해 목표가 명확하다. 전방위적으로 추진되는 우리의 4차 산업혁명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수입한 4차 산업혁명의 기원이 바로 ‘인더스트리 4.0’이다.

인더스트리 4.0은 최신 기술을 통한 공정 표준화를 통해 기업이 주문 즉시 최종 제조물을 고객의 개별적 요구에 맞추어 생산하는 체계를 말한다. 이 체계가 적용된 ‘스마트팩토리’의 대표적 사례로는 아디다스사(社)가 독일 안스바흐에 세운 ‘스피드팩토리’가 꼽힌다. 3D프린팅과 로봇 기술을 총동원한 이 공장은 당일 제작, 당일 배송이 가능하다. 아디다스는 이 스피드팩토리를 통해 한 해 100만켤레의 운동화를 만들 수 있다. 올해 내로 미국 애틀랜타에도 연간 50만켤레의 운동화를 만들 수 있는 스피드팩토리를 가동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민간과의 역할분담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 회장은 “현재 정부는 할 일은 안 하고 안 할 일은 하고 있다”며 “민간 영역에 맡겨야 할 개별 기술 등을 스스로 개발하고, 정부만이 할 수 있는 클라우드 등 분야의 규제 개혁에는 소극적”이라고 했다. 신관호 교수는 “현재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은 최첨단 분야 기술인 만큼 기업이 스스로 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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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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