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수첩의 일부분.
안종범 수첩의 일부분.

2018년 2월 한국은행 노조는 위원장 명의의 성명서 하나를 발표했다. ‘통화정책에 낀 미세먼지를 속히 걷어내라’란 제목의 성명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양적완화를 축소하던 시점에 한국은행이 오히려 금리를 인하해 가계 부채를 증가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다. 노조가 이 성명서를 발표한 시점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노조는 차기 한국은행 총재의 최우선 임무가 금리정상화와 가계부채관리라는 점도 지적했다. 사실 노조가 이 성명서를 발표할 때만 해도 외부에서 이 성명서를 주목하는 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가계부채에 대한 한국은행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국회를 중심으로 이 성명서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실 한 보좌관은 “성명서에 ‘금리정상화’란 표현이 들어갔다는 것은 이주열 총재 1기 재직 시절(이주열 총재는 2018년 4월 연임이 결정됨)의 금리가 비정상적이었다는 내부의 지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결국 ‘빚 내서 집 사라’는 지난 정부의 정책기조를 한은의 저금리 정책이 뒷받침하면서 부동산 과열을 불러온 셈”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12월 한국금융연구원이 발행하는 ‘금융연구’ 30권 4호에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김홍범 교수가 쓴 논문이 한 편 실렸다. 이 논문의 초기 버전은 한국은행 배준석 법규제도실장과 공동저술 형태였으나 추후 배 실장이 공저 불참의사를 밝히면서 김 교수 단독 논문으로 실렸다. 배 실장이 공저 불참의사를 밝힌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논문 일부에 한은의 독립성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 한국은행 내부 인사들의 추측이다.

김홍범 경성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쓴 논문에 인용된 표.
김홍범 경성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쓴 논문에 인용된 표.

이 논문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한은 입장에서는 불편해할 내용들이 다소 눈에 띈다. 일단 한국은행이 ‘서별관회의’라고 불리는 비공식협의체의 하위조직으로 표현된 부분이다.<표1 참조> 박근혜 정부 시절 활발했던 서별관회의란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금융감독원 원장 등이 참석해 경제 및 금융 관련 주요 현안을 비공개로 논의하는 협의체다.

또한 이 논문에는 한국은행이 지난 정부 경기부양정책의 하나로 실시했던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의 완화와 관련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은행이 (2014년 7월 LTV와 DTI 비율 규제 완화와 관련한) 금융위원회 서면회의에서 서면의견 제출을 통해 자신의 법률적 독립성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책임성이라도 마땅히 부담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한국은행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있을 예정인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의 금리 결정을 앞두고 정부 여당이 한국은행을 압박하는 발언이 잇따르면서다. 우리나라의 기준금리는 7명으로 구성된 한국은행 금통위에서 결정한다. 10월과 11월에 개최될 금통위 회의에서 결정될 금리인상 여부에 어느 때보다도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현재의 한국 경제 상황 때문이다. 전반적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 미국과의 금리 역전이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금리인상의 여파는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 여당은 금리인상을 주장하고 있고, 한국은행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내세워 인상 여부는 전적으로 금통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맞서는 모양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늘 뜨거운 감자다. 법률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가 많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이주열 총재는 올해 3월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연임됐다. 중앙은행 총재가 연임된 것은 44년 만의 일이기도 하지만, 보수정권에 이어 진보정권에서도 중앙은행 수장을 맡았다는 것은 한은 독립성 차원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이 나서서 금리인상을 압박하는 것은 임명권자의 뜻에 반하는 일이란 지적이 적지 않다. 저금리 정책을 통해 지난 정부의 경기부양책을 뒷받침했던 중앙은행 총재가 정권이 바뀌어 연임에 성공했으나, 그에게 현 정부 실정 1순위로 꼽히는 부동산정책의 책임을 묻는 지금의 상황은 과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끔 하고 있다.

일단 현 여권에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한 것은 이주열 총재 본인이란 시선이 많다. 특히 이주열 총재 1기 기간 중 세계 경제의 흐름과 상관없이 박근혜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펼친 것이 현재 부동산시장 과열을 불러왔다는 것이 여권에서 나오는 비판의 핵심이다.

지난 2월 한국은행 노조가 발표한 성명서에 첨부된 한·미 금리 차와 가계부채 연관성을 보여주는 그래프.
지난 2월 한국은행 노조가 발표한 성명서에 첨부된 한·미 금리 차와 가계부채 연관성을 보여주는 그래프.

현실은 한은 독립성 보장 안 돼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서 한국은행은 이른바 ‘초이노믹스’로 불리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을 충실하게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은행 노조의 성명서나 앞서 김홍범 교수의 논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한국은행 노조가 발표한 이주열 총재 재임 기간 미국 금리와 한국 금리의 차이, 여기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 여부를 보여주는 그래프에서 한국은행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당 그래프<표2 참조>를 보면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2월부터 Fed의 양적완화 정책이 축소되기 시작한 2013년 12월, 더 나아가 2014년 상반기까지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는 2.25%포인트 수준을 유지했다. 평행을 유지하던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취임과 동시에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한국은행은 최 전 총리 취임 이후인 2014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0.25%포인트씩 금리를 인하했고, 2015년 3월과 6월에도 또다시 0.25%포인트씩 인하했다. 이 기간 중인 2014년 10월 29일 미국 Fed는 양적완화 정책을 종료했고, 2016년 1월 오히려 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즉 미국이 양적완화를 중단하고 향후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하는 가운데 한국은행은 계속해서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초록색 막대로 표시된 가계부채 증가량이다. 2014년 8월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녹색 막대그래프의 성장세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그래프는 결과적으로 ‘초이노믹스’의 핵심 중 하나인 LTV·DTI 완화를 통한 경기부양책을 한국은행이 저금리 정책을 통해 뒷받침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2018월 6월 금융감독원도 비슷한 자료를 발표했다. 6월 19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금융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자산운용 현황 및 시사점’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말 가계 주택담보대출은 326조8000억원에서 2016년 말 441조8000억원으로 35.2% 급증했다. 2013년 3.8%에 불과하던 주담대 증가율은 2014년 11.4%, 2015년 10.1%, 2016년 10.2%로 계속 불어났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저금리 기조와 맞물려 부동산 규제 완화가 가계대출 수요를 촉진했다”고 분석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정권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부동산 가격 급등이 저금리 정책의 결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최경환 전 부총리의 발언이나 금리 인하 기간 금통위원들의 인적구성 등을 따져보면 청와대가 어떤 식으로든 금리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한국은행 안팎의 분석이다.

지금도 한국은행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대표적 사건이 2014년 9월 호주에서 있었던 최 전 부총리의 ‘척하면 척’ 사건이다. 최 부총리는 당시 호주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에게 통화정책의 협조를 요청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척하면 척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한은이 협조할 것이란 기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었다. 이 말은 한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비쳐질 수 있어서 한은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금통위는 다음 달 또다시 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5월 2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5월 2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안종범 수첩’의 의미

한국은행은 2016년 6월에도 또 한 차례 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금융통화위원 7명 중 4명이 한꺼번에 교체된 직후였다. 금융통화위원 중 5명의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각각 총재와 부총재가 당연직 위원이다. 한국은행 측은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금통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한은 안팎에서는 현재 금통위원들이 지난 정부의 정치 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된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당시 금통위원 중에는 청와대 안종범 경제수석과 가까운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지난해 말 기자와 만났던 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은 안 수석과 가까웠던 금통위원들의 명단을 이야기하면서 “이 중 안 수석과 함께 책을 냈던 사람도 있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있던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혜훈 의원은 한국은행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경제통으로 평가받는다. 이혜훈 의원의 말은 최 전 부총리나 안 전 수석이 상황에 따라서는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만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금리인하를 전후해 청와대에서 직접 금리를 챙겼던 것 아니냐고 추측할 수 있는 자료도 있다. 이른바 ‘안종범 수첩’이다. 지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안종범 수첩’에는 박근혜 정부 시절 안종범 전 경제수석이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거나 추진한 업무 내역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안종범 수첩’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관련자들의 유죄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증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52권 분량의 ‘안종범 수첩’ 중 2015년 3월 한국은행의 금리인하를 전후해 대통령이 직접 금리를 언급하는 부분이 2곳에 걸쳐 나온다.

‘3-22-15 VIP-1 가계부채 구조조정, 저금리: 고정금리 전환’(2015년 3월 22일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는 의미), ‘3-24-15 VIP 금리인하’(2015년 3월 24일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는 의미).

수첩에 적혀 있는 관련 사안들이 금리인하를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관련 내용을 체크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이 한국은행 금리를 인하하던 시점에 금리인하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앞서 언급한 수치나 안종범 수첩 같은 정황적 증거들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부동산 과열에 대한 한은 책임론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문재인 정부 역시 한은의 독립성에 영향을 미칠 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이주열 총재의 연임을 결정했는데, 각료들이 전혀 다른 뉘앙스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금리인상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했다.

“이 문제(기준금리 인상)에 대해 좀 더 심각한 생각을 할 때가 충분히 됐다는 데에 동의한다.”(이낙연 국무총리, 9월 13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

“(집값 폭등은) 지난 정부부터 지속된 저금리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유동성 과잉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며 금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10월 2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 질의 답변)

지난 4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접견실에서 연임에 성공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접견실에서 연임에 성공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곤혹스러운 한국은행

국무총리와 주무부처 장관이 이런 발언을 계속해서 쏟아내면 한국은행은 어떤 선택을 해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의 한 내부 인사는 “현 정부 인사들이 이주열 총재를 비롯한 한국은행 금통위원들이 지난 정부에서 독립성을 훼손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금리인상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독립성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며 “임명권자(대통령)가 총재를 연임시켰으면 금통위원들이 자발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일단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인상 여부는 한국은행 금통위가 전적으로 결정할 몫이라며 외부의 압박에 선을 긋고 있다. 이 총재는 10월 5일 인천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워크숍에서 “외부의 의견을 너무 의식해서 금리인상이 필요한데도 인상하지 않는다든가 아니면 인상이 적절치 않은데도 인상을 하는 결정은 내리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또한 부동산 가격 과열과 관련한 한은 책임론에 대해서도 “주택가격 상승에는 저금리 등 완화적인 금융 여건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서울 등 일부 지역 주택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은 수급불균형과 개발계획 발표에 따른 가격상승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어느 요인이 주된 요인이냐는 논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여당 기획재정위 소속 한 의원은 “한은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2.9%)를 더 낮출 가능성이 높은데 경제 전망을 어둡게 보면서 금리를 올리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많다”며 “지난 정부에서 제때에 금리를 정상화시켰다면 현재와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필요 이상의 저금리 정책을 폈던 현 이주열 총재가 지금 정권에서 한은의 독립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며 “다만 금통위원 구성이 정부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제도적으로 어떻게 독립성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추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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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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