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치권이 여당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 액면변경) 논의 착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리 경제가 성장한 만큼 국격에 걸맞은 화폐단위 정착을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쪽과 리디노미네이션 실행에 실익이 별로 없다며 반대하는 쪽이 대립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되 표현하는 단위만 줄이는 화폐개혁의 일종이다. 액면변경이라고도 한다.

현재 리디노미네이션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지난 3월 말 국회 기재위 업무보고 때 한국은행에 ‘리디노미네이션 준비 여부’를 질문해 화제가 된 이원욱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 17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기재위 업무보고 때 한은이 국회에 (리디노미네이션) 공론화를 시켜달라고 요청했었는데 그러면 우리 의원실 주최로 토론회를 할 테니 한은이 협조하겠냐고 했더니 한은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었다”며 “법제화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회에서 사회적 논의를 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이원욱 의원은 5월 13일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의원실 주최로 열릴 토론회에는 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 심기준 민주당 의원 등 기재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주로 참석할 예정이다. 이 의원은 “일단 이 문제를 의제화해서 정부와 의회가 이 문제를 검토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5월 민주당 의원들 주도 토론회

그간 민주당에서 꾸준히 액면변경을 주장해온 인물은 정무위원회 소속 최운열 의원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출신인 최 의원은 전화통화에서 “나는 2016년부터 (리디노미네이션은) 빠를수록 좋다는 입장이었다”며 “시장은 앞서가는데 제도가 뒤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대론자들은 인플레이션 우려를 하는데 지금은 물가가 상당히 안정돼 인플레이션 우려가 적은 시점이고 곧 한 해 국가예산 규모가 조 단위를 넘어 경(京)원으로 들어서는 만큼 사회적 비용이 상당히 크다. 그러므로 가급적 가까운 시일 내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두 의원은 모두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을 고려해볼 만한 시기”라는 의견이지만 당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정책이라는 입장은 아니다. 이원욱 의원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경제적 위상과 맞지 않는 화폐가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걸 의제화하자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라며 “아직 토론회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고 정부 쪽과 논의한 건 전혀 없다”고 했다. 최 의원도 “사실 리디노미네이션이 경제수단을 활성화하는 경제정책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시급한 처리를 요하는 정책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라며 “해외 다녀보면 알겠지만 일단 (원달러환율이) 4자리 단위로 가는 게 국격에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제도를 선진화하자는 차원에서 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하게 될 경우 주 담당기관이 될 한국은행의 입장은 어떨까. 한은이 오래전부터 1000 대 1의 리디노미네이션을 내부적으로 준비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때 한은 총재를 맡았던 박승 총재의 회고록에는 2004년 그가 한국은행 총재를 맡던 시절, 2008년 1월 1일을 기해 화폐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던 계획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2002년 총재 취임 직후 그는 17명으로 구성된 ‘화폐제도개혁추진팀’을 만들어 1년 동안 비밀리에 1094쪽짜리 종합계획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000원을 1환으로 화폐단위를 바꾸고 고액권 100환(10만원)과 50환(5만원)을 새로 발행하고 지폐 크기를 줄여 선진국 화폐 규격에 맞춘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한은의 계획은 기획재정부의 반대에 막혀 무산됐지만 이후 국정감사 때면 한은은 종종 리디노미네이션 실행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받아왔다.

현재 한은은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리디노미네이션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쐐기를 박는 모양새다. 이주열 총재는 4월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분명한 건 우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추진할 계획도 없다”며 “엄중한 경제 현실을 고려할 때 리디노미네이션보다 우리 경제 활력과 생산성 제고를 위해 집중해야 할 일이 훨씬 많고 중요한 때”라고 선을 그었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현 (이주열) 총재는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이라며 “불확실성이 높은 리디노미네이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기재부 관계자도 “아직까지 기재부 내에서는 전혀 논의되지 않는 주제”라고 했다.

물가, 환율지표로 봤을 때 적기

시중에서도 아직까지 리디노미네이션의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전문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NH은행의 한 PB센터 관계자는 “2004년에는 지금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왔다. 총리랑 국회에서도 검토한다고 했다가도 조용히 사라진 적이 있었다”며 “다시 얘기가 나와도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리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하자는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높은 화폐 간 교환 비율을 생각하면 언젠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 물가·환율 등 거시경제지표로 봤을 때 지금만큼 좋은 시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한은 출신의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전화통화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제일 먼저 예상되는 부작용이 인플레인데 지금은 디플레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기 때문에 우려가 적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할 때는 거시경제지표가, 그중에서도 특히 물가가 기준이 된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할 경우 물가상승이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매년 2% 내외의 낮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이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해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적은 지금이 적기라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개방 통상국가인 한국으로서는 원달러환율도 리디노미네이션 시기를 가늠할 중요한 지표다. 환율이 지나치게 높거나 낮아지는 등 불안할 때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하면 통화의 안정성이 떨어지면서 자금의 해외유출이 가속화돼 외환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지금은 수년간 1100원에서 1200원 정도의 원달러환율을 유지해 상대적으로 환율이 안정돼 있는 상황이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은 전화통화에서 “앞으로 원달러환율이 더 내려가면(원화 강세) 리디노미네이션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다시 떠오르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졌다는 점이 작용한다. 1962년에 비해 2018년 한국의 명목GDP는 3658억원에서 1782조2689억원으로 4872배 높아졌다. 이 때문에 국가의 대외 위상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논의를 주도하는 여당 의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OECD 주요국 중 달러와의 환율이 네 자릿수인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우선 내수를 부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새 화폐를 발행하면 은행 자동화기기 지폐인식 프로그램과 지폐가 투입되는 자판기 프로그램을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신규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일단 상품가격 단위가 작아지면 심리적으로 더 쓰게 되기 때문에 소비를 촉진하는 경향도 있다.

(좌)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 (우) 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 ⓒphoto  뉴시스
(좌)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 (우) 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 ⓒphoto 뉴시스

“10조원 안팎의 비용이 들 것”

지하경제 양성화에 따른 세수 증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2009년부터 5만원권이 유통되기 시작했지만 다른 권종에 비해 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가 여럿 있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에 묻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정근 회장은 “대략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25% 정도로 추산되는데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세원이 노출되기 때문에 세수가 증가한다”며 “여러 복지정책을 하는 여당으로서는 세원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할 동기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만 부동산 가격이 높아질지 낮아질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오정근 회장은 “지하경제에 숨어있던 돈이 부동산에 투입될지 아니면 오히려 세금을 걷는 과정에서 투기수요가 줄어 부동산 가격이 내려갈지 플러스마이너스 요인이 모두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어떻게 변할지를 예단하긴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해 기대되는 여러 장점이 있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소비자물가의 정수 단위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 우려가 제기된다. 일명 ‘우수리 인상’이다. 1000 대 1로 액면이 변경될 경우 2600원이나 2800원이 2.6원, 2.8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3원이 되면서 전반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효과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초대 금융위원장을 지낸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전화통화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긴 안목에서 보면 언젠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면서도 “중요한 건 지금이 적기(適期)가 맞냐는 것”이라고 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할 경우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일견 주식 액면분할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부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액면변경 과정에서 수반되는 비용도 결국 국민의 세금이다. 2004년 김효석 당시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에 소요되는 총예산을 2조6700억원으로 추산했다. 이를 통한 이익으로는 향후 10년간 수표발행 비용 절감 6조원 등 8조6000억원이 예상된다는 것이 개정안에 담긴 추산 결과다. 하지만 액면이 변경된 화폐가 정착되기까지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 등을 합치면 실제로 드는 비용은 10조원 안팎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최근 페이스북 글을 통해 “최저임금 급등에 이어 또 하나의 생체실험으로 경제를 아주 망가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지 말아야 한다)”이라며 “금융시장 혼란 등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했다.

터키와 프랑스는 성공한 나라

주요국 중에서는 최근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OECD 국가 중 경제규모 상위 10개국에 속하는 나라들의 경우 화폐가치가 우리의 원화만큼 낮은 경우가 없다. 가장 근접한 일본과 비교해도 10배가량 차이가 난다.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례는 짐바브웨다. 21세기 초 짐바브웨는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물가가 오르는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2008년 짐바브웨의 물가상승률은 10만%에서 100만% 이상으로 높아졌고, 2개월 뒤에는 2억5000만%까지 높아졌다. 3년 만에 1000짐바브웨달러가 1조달러까지 높아지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유고슬라비아, 1990년 초반 브라질, 모잠비크 등 개발도상국의 경우 물가안정을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실패로 귀결됐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물가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개발도상국의 사례와는 다르다. 전광우 이사장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에 비교하면 우리 화폐가치가 너무 낮은 것은 사실”이라며 “짐바브웨 같은 후진국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하거나 금융위기를 겪는 와중에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경우이기 때문에 이런 곳과는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성공한 리디노미네이션 사례로는 터키가 꼽힌다. 터키는 비교적 최근인 2005년 리라를 신(新)리라로 바꾸는 100만 대 1의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도 물가상승률은 한 자릿수 수준으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관련 입법이 추진된 1998년부터 개혁안을 도입한 2005년까지 7년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한 것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1960년 프랑스의 리디노미네이션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구화폐와 신화폐 교환 기간에 대한 종료일을 못 박지 않아 사회적 불안감을 줄였다. 경제공동체 탄생에 따른 화폐 통합이라 경우는 다르지만 유럽연합(EU)의 유로 전환도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EU는 유로화를 3~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도입하면서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줄였다.

한은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정부가 수립된 뒤 두 차례 화폐 액면변경을 단행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1953년이었다. 한국전쟁 중 자금마련을 위해 통화를 대거 발행하면서 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폭락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00 대 1로 화폐 액면금액을 절하하는 조치를 했다. 화폐단위도 이전 미 군정하에서 도입한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에 단행됐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자금을 양성화해 경제 개발에 필요한 투자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액면금액은 10 대 1로 절하됐고 화폐단위는 현재의 ‘원’으로 변경됐다.

인위적 경제 이슈 바람직하지 않아

결국 지금 나오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는 경제적 효과를 노리기보다는 정치적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전광우 이사장은 “지금은 국내외 경제적 여건이 도전적이고, 지정학적 여건도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며 “더 시급한 노동·규제 개혁이 많은데 하필 지금 리디노미네이션을 화두로 올리는 건 경제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한다”고 했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도 “지금이 디플레이션 초입에 있는 시기라고 해도 큰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슈를 만들어서 리디노미네이션을 할 필요가 있나 싶다”며 “일종의 국면전환용 정책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이 정부 들어 복지지출 부문의 물가, 휘발유값 등이 꾸준히 낮은 수준을 기록하면서 디플레 우려가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조금 지나면 반대 국면이 될 수도 있다”며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 만한 이슈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인위적으로 이슈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해야 한다면 전문가들은 충분한 공론화와 여론 수렴 과정을 거치면서 천천히 도입할 것을 주문했다. 김인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가 꾸준한 고실업률, 가계소비 감소, 정책 신뢰성의 결핍 등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에서 급격한 충격요법은 경제활동을 얼어붙게 하고 사회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며 “충분한 여론 수렴과 계획 공포, 공유된 일정에 따른 점진적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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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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