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중국 우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연안파 주요 인사가 모두 모여 있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연안파 주요 인사가 모두 모여 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였던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엔 현재도 20대 청년들이 팔로군 군복을 입고 마오쩌둥(毛澤東) 토굴집과 혁명기념관 등을 답사한다.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현대 중국 젊은이들에게도 옌안은 여전히 혁명의 성지이자 대장정의 종착지다. 하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같은 시기에 옌안에 머물며 항일전쟁을 함께 치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38년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의 총부와 군정학교가 옌안에 있었다. 지금도 그들이 살던 토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 터와 그들이 일군 밭이 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내 한인들의 정치결사대인 조선독립동맹 산하 무장조직이다. 중공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초기 북한 사회 건설을 주도했다. 이들은 산시성 타이항산(太行山)에 거점을 마련해 주로 화북과 동북 지방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옌안에서 머무른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연안파’라는 호칭이 붙었다.

이들 중엔 의열단원과 공산주의 이론가, 군인도 있었지만, 국문학자·조종사·음악가·소설가·교사·언론인도 있었다. 대부분 일본과 중국, 미국 등지에서 공부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출신도 지주의 아들부터 중간계급,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자녀까지 다양했다.

연안파는 마오쩌둥의 ‘자력동수 풍의족식(自力動手 豊衣足食)’ 구호 아래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해야 했다. 험준한 타이항산 비탈을 개간해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군복을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고, 학교를 지을 벽돌을 구웠다. 그렇게 지은 학교에도 책걸상이 없어서 맨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다. 연안파들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보조를 전혀 받지 못하자 타이항산 시장에 병원, 이발소, 상점 등을 세웠지만 장사 경험이 없어 손해를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화북 곳곳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같은 시기 김일성의 빨치산파는 일찌감치 1940년 겨울께 소련령으로 이동했다. 1940년 이후 동북 지방은 완전히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안파는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정치를 이끄는 지도적 위치에 올랐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를 비판하는 연안파에 ‘반당종파’라는 죄명을 씌워 9만여명을 숙청했다. 1956년 벌어진 반당종파 사건은 현재까지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북한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규모 숙청사건이다. 연안파는 북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에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역사 속의 미아로 전락했다. 이들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자들이었고 1920~1940년대 독립운동사의 주인공들이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한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중국 혁명의 성공 과정과 경험을 고스란히 공유했다. 입북 후엔 당 이론을 확립시키고 토지개혁을 주도했으며 치안·검열·선전선동 부문을 담당했다. 연안파의 궤적 자체가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지만, 최후는 비극적이다.

최근 숙청 후의 연안파에 대한 증언이 새롭게 발굴됐다. 반당종파 사건이 일어나면서 연안파가 숙청된 후의 모습에 대한 증언으론 최초의 것이다. 평안남도 북창군 출신의 탈북민 A씨는 최근 필자에게 “우리 가족이 수감돼 있었던 18호 수용소(북창관리소) 안 봉골지구라는 곳에 ‘8월 종파마을’이라고 불리는 통제구역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A씨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은 수용소가 처음 생겼을 때 온 사람들이었다. 18호 사람들은 종파마을이라고 하면 다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에게 어릴 때부터 들은 내용”이라고 전했다.

강제노역도 안 하고 단독주택서 지내

1960년생인 A씨는 국군포로의 자녀로, 평남 북창군 소재 18호 수용소에 어렸을 때부터 수감돼 있었다. 그는 1980년대 말 가족과 함께 사면돼 수용소에서 나왔고 2000년대 초 탈북해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고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회고록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2001)와 ‘북한인권백서’(2004)에도 ‘통제구역’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서 처음 유래했으며 정치범들의 씨를 말리려는 의도를 갖고 설치됐다고 기술돼 있다. 황장엽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은 “종파 분자들은 머리 꼭대기까지 잘못돼 있어 가족과 함께 산간벽지로 보내 격리시켜 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장엽의 증언으로 볼 때, A씨가 언급한 ‘8월 종파마을’ 역시 1956년 종파분자 숙청 후 설치된 통제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A씨는 “8월 종파마을에는 1동 2세대 20가구 정도 있었다”며 “이들은 탄광 일을 안 했다. 대신 강으로 낚시를 다니며 소일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학대를 당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중앙에서 (이들에게) 직접 배급을 해줬다. 배를 곯지 않게 넉넉하게 줬다고 한다. 자기 구역 안에선 자유롭게 다녔다”고 했다. 그는 이어 “현재도 이들이 살던 주택이 남아 있다”며 “초가집이 아니고 단독주택 형식으로 나름대로 잘 지어줬다. 군대가 돌로 지은 집인데, 튼튼하게 잘 지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수용소가 보통 초가집으로 이뤄진 마을 형태인 것에 비춰 보면, 연안파에 제공된 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북한 최초의 통제구역에 수감된 정치범들로 사형을 면한 ‘고위급’ 인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A씨에 의하면 수용소 관리자들뿐 아니라 18호 수감자들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들이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숙청된 ‘항일투사’라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연안파라는 용어는 처음 듣는다”고 했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러시아 문서를 보면 황장엽은 1959년부터 벌써 당 중앙위 부부장직으로 나오는데 그가 회고록에서 밝힌 통제구역에 대한 언급에 비춰 볼 때 A씨의 증언은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정 소장은 “무엇보다 A씨의 증언은 8월 종파 사건 관련자들의 숙청 후 생활이 처음 공개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A씨의 증언 속엔 실존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에게는 사상 교화를 많이 시켰다. 김일성이 림춘추를 보내 사상 교화가 됐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림춘추가 비행기를 타고 한 번 왔었다”고 말했다. 림춘추는 김일성 부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의사 노릇을 했던 인물로, 김정일을 추종해 그가 후계자로 지목된 뒤 출세를 거듭했다. 1983년엔 부주석 자리에까지 올랐다. 림춘추는 김일성 부대에 합류하기 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처럼 한약방을 운영했고 빨치산파 중 중학교를 졸업한 비교적 높은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김일성과 동료들의 빨치산 활동을 찬양하는 문학작품을 다수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6·25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6·25 당시 북창군 내에는 이미 북창비행장이 건설돼 있던 것으로 확인돼 ‘림춘추가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증언에 신빙성을 더한다.

정창현 소장은 “(숙청된 사람들을) 지방 배치하면 가끔씩 중앙당에서 지도원을 파견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는 예가 있다. 림춘추를 보낼 정도면 요주의 인물들일 수 있다”면서도 “지도원을 보낸 것은 다시 복귀시킬 생각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복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반대파의 근황을 살피기 위해 굳이 림춘추 같은 거물을 보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A씨는 8월 종파마을이 위치했던 ‘봉골지구’에 대해서는 “현 평남 북창군 봉창리·석산리 일대”라고 설명했다. A씨의 증언에 따르면, 봉창리 수용소에는 수용소가 해체된 1990년대 중반까지 수감자들이 머물렀지만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은 “1960년대 말에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A씨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이 14호나 22호(회령 수용소)로 간 게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집단학살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A씨가 언급한 14호와 22호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로, 한번 수감되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이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김원봉. 이 흑백 필름은 국민당 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광복 후 부산에서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극장 상영됐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김원봉. 이 흑백 필름은 국민당 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광복 후 부산에서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극장 상영됐다.

연안파 리더 최창익의 최후

그렇다면 북한 최초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연안파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이들에 대한 체포 및 심문은 1957년 7월부터 시작됐고 1960년 초에 재판이 열렸으나 그 이전부터 중국 및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병사, 옥사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우선 연안파 원로 김두봉은 국문학자로 광복 당시 이미 56세였다. 그는 강원도의 한 협동농장에서 재판이 열리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당종파 사건의 주모자이자 연안파 리더인 최창익은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창익은 권위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꼽혔다. 부수상까지 오른 그는 김일성의 측근인 박정애(베라 최), 박금철, 정일룡 등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김일성에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는 또 중공업 치중을 비판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최창익의 아내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로 이름이 높았던 허헌의 딸이다. 허헌은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를 무료 변론했고, 신간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허정숙은 연안파 중 유일하게 숙청을 면했는데, 부부가 광복 직후 이혼을 했기 때문이지만 허헌의 딸이라는 이유도 컸다고 한다. 허정숙은 그 후 당 비서까지 올랐고 1991년 사망하자 북한 정권이 국장으로 예우할 정도였다. 반면 최창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친척까지 모두 수용소로 보내질 정도로 극심하게 보복당했다. 그의 최후는 베일에 싸여 있으나 재판 당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보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진 연안파 거물 중 한 명인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 포병연대 사령관을 지냈다. 대부분의 한인 공산주의자가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는 류사오치(劉少奇) 계열의 대도시 공작자인 반면, 무정은 일찍부터 중국 남부로 내려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펑더화이(彭德懷) 등 중공 핵심그룹에 합류해 농촌 지역의 소비에트운동에 참여했다. 무정은 또 대장정에 참여한 10여명의 한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유격대로 시작한 홍군이 연안에서 첫 창설한 포병대 사령관 겸 포병학교 교장에 임명되면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김일성에겐 열등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무정은 1951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제거됐다.

연안파는 아니지만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김원봉이 있다. 김원봉은 1919년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의열단 의백이자, 좌우 연합의 상징인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지냈다. 좌우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항일 경력을 가졌다. 그는 코민테른이나 중공과 연계를 갖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국제주의자가 아니었고 계급보다 민족에 더 우위를 둔 민족주의자였다.

그간 김원봉은 연안파 몰락 때 함께 퇴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정창현 소장은 소련의 평양 대사를 지낸 프자노프의 ‘일지’(1958년 10월 24일) 중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를 인용해 그의 해임 및 체포가 청우당 당수 김달현의 간첩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 정 소장은 같은 일지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1958년 10월 1일)는 대목을 들어 “러시아 측 문서를 통해 김원봉에게 적용된 ‘죄목’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간 김원봉의 최후는 추측과 불확실한 진술만 난무했으나, 기록문서를 통해 죄목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김원봉이 조사과정에서 자살하지 않았다면 평양 인근에서 살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고,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사실 김일성은 1956년의 반당종파 사건 이전부터 경쟁자들을 하나씩 퇴출시켜왔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전후해서도 각 계파의 우두머리였던 박헌영, 박일우, 허가이, 이승엽 등이 차례로 퇴출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실무적으론 여전히 다수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8월부터는 숙청이 본격화됐다.

9만명 숙청, 허무하게 끝난 이상

반당종파 사건 때 숙청된 인물들은 연안파의 리더 최창익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김일성과 맞선 전력들이 있다. 예컨대 직업총동맹위원장을 지낸 서휘는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권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업상을 지낸 윤공흠은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윤공흠은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62년 강제송환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인물이다. 육군대학 총장을 지낸 김을규는 인민군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부수상을 지낸 소련파 박의완은 소련 주재 북한대사 리상조가 쓴 개인숭배를 배격하는 내용의 편지를 당에 전달했다가 김일성의 미움을 샀다. 이밖에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출신이자 당 중앙위원이었던 한빈, 황해남도당 위원장을 지낸 고봉기, 인민군 5군단장을 지낸 방호산, 자강도인민위원장을 지낸 박창식 등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당종파 분자로 몰렸다.

반당종파 분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숙청은 1956년 바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일성이 최창익과 박창옥(소련파)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처분을 제안해 당이 채택하긴 했으나 중국과 소련이 개입해 이들의 원상복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다음해 7월부터 대대적인 체포가 벌어졌다. 지방으로 좌천돼 있다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체포된 최창익과 박창옥을 비롯해 연안파가 모두 투옥됐다. 소련파는 50여명이 처형되거나 강제실종됐고 약 250여명이 소련으로 도망갔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에 의하면, 이들에게는 당내 투쟁, 즉 상호비판을 통한 권력 쟁취는 불가능했고, 폭력적 변혁(무력 동원)이 필요했지만 군부에 세력이 부족했고 중공이나 소련의 협력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광복 후 연안파가 여타 계파들과 더불어 요직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아직 20~40대의 젊은 나이였다. 혁명의 세기, 세계전쟁의 한가운데서 사적인 삶을 포기하고 조국 해방과 공산혁명을 위해 싸웠지만,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저항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들이 바란 것은 타 공산권 국가처럼 ‘집단지도체제’의 실현이었다.

정병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국가 건설에 미친 연안파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빨치산파는 연안파가 초기 북한 국가 건설 과정에서 당·정·군을 아울러 구사했던 변용된 중국식 정책을 수용해 독식함으로써 연안파를 북한 역사에서 사장시켜 버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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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미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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