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에서 한국 배우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탔다. 국제영화제 입상은 외국의 객관적 기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다. 베를린영화제는 칸·베니스와 더불어 ‘우아한’ 서양문화의 대표주자에 해당하는 이벤트다. 그러나 현실적인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영화제 수상=흥행’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특히 외국에서의 영화 관람은 사양길이다. 아무리 뜨는 영화라도 한 달 내로 끝이다. 흥행 실적도 미미하다. 애니메이션은 그 같은 영화산업 불황의 틈을 비집고 나타난 기대주다. 영화 하나만으로 끝이 아니라 비디오게임, 캐릭터산업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즈니스의 총아로 대접받고 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의 경험이지만, 20대 이탈리아인 앞에서 영화 ‘대부(代父)’의 노래를 흥얼거렸더니 “무슨 노래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배우 알 파치노 얘기를 들려주면서 음악의 배경을 전해주자 너무도 황당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게 오래되고 긴 영화를 어떻게 보냐?” 매년 열리는 베니스영화제에 대해 의견을 물어봐도 비슷한 반응이다. “그거 돈 많은 외국 배우와 노인들이 즐기는 일회용 파티일 뿐 이탈리아 문화나 청년들과는 무관하다. 무슨 영화가 수상했는지도 관심 밖이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베니스 청년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현지 문화 이벤트는 추운 겨울에 열리는 ‘코믹페스티벌’(www.veneziacomics.com)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코믹페스티벌은 2008년부터 시작된 국제페스티벌로, 애니메이션 국제콘테스트에 해당한다.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초청해 함께 보면서 베니스 청년의 이름으로 상을 수여하는 자리다. 돈이나 유명세와는 무관하지만 참가자의 연령 호응도를 보면 베니스영화제를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베니스영화제는 어제의 추억이지만 애니메이션은 초등학생은 물론 10대, 20대, 나아가 30대, 40대로 이어지는 오늘과 내일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코믹페스티벌에 대해 알아보면서 놀란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이다. 10년 동안의 페스티벌 수상작을 보면 사실상 일본 애니메이션 축제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수상작은 물론 초대작의 대부분이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10년간의 포스터 대부분도 일본풍 애니메이션이 차지하고 있다. 코믹이라고 하면 ‘미국식 동화’로 통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코믹=일본 아니메’로 통한다고 한다. 베니스가 창조해나가는 21세기형 문화제는 애니메이션을 허브로 하면서 만화, 게임, 캐릭터, 코스플레이 등 풀세트로 확산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베니스의 코믹페스티벌은 결코 이탈리아에 국한된 행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유럽 전역에 걸쳐진 팝아트로서의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뉴욕, 파리, 로마, 런던, 나아가 방콕과 베이징에 가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파워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파리와 로마의 경우 한국인 눈에도 익은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지금도 텔레비전의 주인공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당초 애니메이션을 어린이 장난 정도로 받아들였다.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저가로 수입해 어린이 방송용으로 활용했다. 어린이들이 장년이 되면서 그때의 추억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한 세대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직도 유럽을 호령하고 있다. 물론 부모세대에 이어, 자식들도 새로운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든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 세대의 호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유럽인이 갖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의 대부분은 바로 애니메이션이 창조해낸 환상에서 비롯된다.

2016년 9월 1일 기준으로 지난 100년간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총 1만1723편에 달한다. 하나의 타이틀 속에서 탄생된 에피소드로 나눌 경우 15만8442건 이상의 애니메이션이 선보였다. 2016년 한 해만 해도 무려 2500여 작품이 출시됐다. 세계 애니메이션시장의 60% 정도가 ‘메이드 인 재팬’이라고 한다.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도 유명하지만, 단발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시장에 뿌릴 뿐이다. 도라에몽(ドラえもん) 시리즈처럼 1969년 첫 출시 이후 지금까지 1주일 단위로 꾸준히 만들어지는 작품은 미국에는 아예 없다. 원작자가 세상을 뜬다 해도 후배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1963년이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원작의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이 시작이었다. 첫 수출지는 미국이었다. 당시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 6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공작으로 부상한다. 이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로 세를 넓히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유럽을 휩쓸었다. 사실 엄청난 양의 공급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를 석권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만화, 추리소설, SF스토리 나아가 캐릭터산업 등 대중문화 저변에서 일본이 우위를 지키고 있다는 점도 일본 애니메이션 파워의 원천이다. 그러나 양만이 아닌 질적 마케팅이란 차원에서 보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 크게 볼 때 5가지로 나눠서 설명해 볼 수 있다.

1. 가슴에 호소하는 팝아트

미국에 비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피드가 다소 느리다. 미국 애니메이션은 1초에 12컷을 사용하지만 일본은 8컷이다. 1초에 12컷은 그만큼 빨리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스토리 전개가 빨라서 관람객 입장에서 보면 따라가기에 정신이 없다. 일본의 1초 8컷은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타이밍이다. 미국은 뭔가 소란스럽고 빠르다. 일본은 느리지만 안정감을 준다. 정서적으로 볼 때 미국 애니메이션보다 일본이 한 수 위라 볼 수 있다.

2. 일본 전통 속의 스토리 개발

‘포켓몬’ 광풍에서 보듯 일본 전국에 있는 무려 800만에 이르는 잡신들에 관한 얘기가 모바일 세대의 주된 관심사다. 현재 유행 중인 요카이 워치(妖怪ウォッチ)도 800만 잡신에 근거한 캐릭터 창출이라 볼 수 있다. 상당수 일본 애니메이션이 이런 전통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3. 표준화와 현지화를 통한 글로벌화

일본 애니메이션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각국의 사정에 맞게 현지화한다. ‘도라에몽’ 시리즈 속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나오는 식이다. 미얀마라면 아웅산 장군, 터키라면 케말 파샤 장군의 모습을 집어넣어 현지인의 호감도를 높인다. 세계 청소년들이 환호하는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이미 전 세계 90개국에서 방영된 ‘드래곤볼(ドラゴンボ一ル)’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30개국 현지 상황에 맞춰 별도 제작했다고 한다. 현지 법이나 관습에 맞추는 것은 물론 도덕, 예의와 같은 각국의 문화에 대한 고려를 통해 표준화에 신경 쓴다. 따라서 전 세계가 문화적 위화감 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다.

4. 애니메이션산업의 일체화와 입체화

일본 애니메이션산업의 해외수출액은 2012년 최악으로 치닫다가 다시 수직으로 급상승하고 있다. 모바일 기기 보급은 애니메이션시장을 얼어붙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광을 되찾은 기념비적 작품인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진의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2011년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70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신카이 감독의 대성공은 막 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의 새로운 비즈니스 풍토와도 연결된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애니메이션산업을 종적·횡적으로 연결하면서 서로 협업하는 분위기가 정착된 것이다.

5. 애니메이션산업의 클라우드 플랫폼화

간단히 말해 IT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다.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됐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허브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일본어를 영어나 외국어로 바꾸고 현지화와 표준화에 주목하는 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전부를 글로벌 문화 콘텐츠로 새 단장해 전 세계에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것이 일본의 야심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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