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가믈랭이 그린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자크 가믈랭이 그린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위대한 리더는 위대한 사상을 소유한 자다. 그러한 사상을 묵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수련하는 과정에서 위대한 리더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질인 카리스마가 생기기 시작한다. 위대한 사상을 접해 본 적이 없고 실천해 본 적이 없는 지도자는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그런 리더를 양육할 교육 체계도 없고, 설령 그런 리더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직도 대중을 희망으로 인도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가 없다. 카리스마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임무를 깊이 묵상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는 대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배려와 공감의 능력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을 제안하고 숙고(熟考)하게 하는 자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상들이 등장하여 후대에 출현한 리더의 중요한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특히 당시의 사상들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헬레니즘시대를 열고 글로벌 문화와 정치의 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체제 철학인 견유파의 등장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시작한 서양사상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져왔다. 이 서양사상은 도시와 국가라는 문명 안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탁월한 개인의 가치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에 들어와 그 틀이 깨지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도시와 국가,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관습인 법이라는 틀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이 성취해야 할 최고의 덕, 자유와 이성만을 추구하는 사상들이 등장한다. 견유파 사상, 회의주의 사상, 에피쿠로스 사상, 그리고 스토아 사상이 대표적이다. 새롭게 등장한 사상들의 모체는 바로 견유파(犬儒派)다.

‘견유파’는 학파가 아니다. 학교가 존재하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등장한 반체제 철학 사조라 할 수 있다. 견유파 사상가들은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도록 스스로 냉소주의를 유지하고 무소유를 실천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쇠퇴하고 있었다. 5세기 말엽 스파르타와 벌인 30년전쟁으로 자원과 사기가 저하되어 회복할 기미가 없었다. 이제 그리스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에서 새로운 세력이 확장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그리스를 칠 재목(材木)으로 키우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과외를 받게 하였다. 아테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에 맞설 탁월한 정치·경제·군사제도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무시해왔던 ‘야만세계’ 마케도니아가 ‘문명세계’ 아테네를 전복하려는 상황에서 생존 가능한 사상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의 찬란한 철학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사상의 물꼬를 튼 인물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플라톤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안티스테네스(기원전 445~기원전 365)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안티스테네스를 러시아 문화 안에서의 톨스토이와 비교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까지는 아테네 귀족들과 지식을 교류하면서 편안하게 살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가 이전에 가치 있게 생각한 명성이나 부(富)를 경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테네의 가난한 사람처럼 옷을 입고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시장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자신이 배워왔던 정교하고 섬세한 철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자연 순응’을 촉구하였다. 거기에는 정부, 사유재산, 결혼, 그리고 기성 종교 체계도 없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노예폐지를 주장하였다.

행동으로 사상을 표현

안티스테네스를 뛰어넘어 견유파 사상을 정립한 자는 터키 동부 시노페 출신의 디오게네스(기원전 412~기원전 323)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디오게네스와 그 제자들의 몸가짐을 폄하하여 ‘시닉(cynic)’, 즉 ‘개’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후대 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견유파(Cynicism)’로 명명하였다. 견유파는 기원전 4세기에 태동하여 기원후 5세기까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를 작동하는 중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마지막 견유파 철학자 살루스티우스는 로마시대 신플라톤주의자 프로클로스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흡수되었다. 견유파가 담고 있는 냉소주의는 정치, 도덕, 종교, 문학, 그리고 철학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냉소주의는 오늘날 정치에 대한 신문과 TV 등 미디어 냉소주의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디오게네스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그는 극단적인 육체적 금욕주의가 자신이 원하는 도덕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아테네에서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깊은 생각과 말, 그것을 잘 전달하는 수사학적 능력이었다. 하지만 견유파는 생각과 말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의미에서 견유파는 서양철학의 창시자인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삶의 방식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주장한 존재론적인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와도 조금 달랐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라는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개인의 자유는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디오게네스에게는 개인이 가장 중요하며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체계가 아니라고 봤다. 이 사상은 후대 무정부주의의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견유파 철학자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의 글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리스, 로마, 그리스도교 교부(敎父), 이슬람 학자들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냉소주의를 비판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나 그리스도교 교부들, 그리고 냉소주의를 찬양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나 줄리안의 글들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디오 그리소스톰이 디오게네스에 대해 남긴 글들도 마찬가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디우스가 남긴 ‘탁월한 철학자들의 생애들’ 6권에 기록된 디오게네스에 관한 기록들도 스토아 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글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견유파의 철학적인 영감을 추려낼 수 있다.

견유파라는 이름의 유래

‘견유파’란 이름의 의미를 추적하지 않고는 견유학파의 사상을 논할 수 없다. 견유파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시니시즘(Cynicism)’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 설명은 ‘시니시즘’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흥했던 다른 학파들처럼 학파의 창시자가 자신의 이론을 주장했던 장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 스토아학파의 스토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시움처럼 견유학파의 창시자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가 가르쳤던 장소가 헤라클레스를 위한 신전이 있는 ‘키노사르게스 김나지움(Cynosarges gymnasium)’이라는 데서 시니시즘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당시 ‘김나지움’은 아테네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남아들이나, 자유인의 사생아들인 ‘노토이(nothoi)’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키노사르게스’의 의미는 ‘개 음식’ ‘흰색 개’ 혹은 ‘빠른 개’란 의미다. 두 번째 설명은 견유학파 철학자들이 ‘개들(쿠네스·kunes)’처럼 행동이 자유롭고 단순하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조차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견유파의 시작은 이전 아테네 철학과는 달리 사회의 부적격자들이 시작하였고 서양사상의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견유파는 다른 학파들처럼 특정한 학교나 일정한 가르침이 없다. 그들은 마치 개가 짖는 것처럼 길거리, 신전 문 앞, 원형극장 입구에서 소리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의 어머니는 트라키아인으로, 그 자신이 ‘노토이’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디우스가 남긴 ‘탁월한 철학자들의 생애들’에 의하면, 안티스테네스는 덕을 평이한 말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귀족이란 바로 덕스러운 사람들이며, 자신의 삶을 위한 최선을 찾는 열쇠가 덕이다. 덕이란 말이나 배움을 넘어서는 행위이며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자는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최선의 덕을 발현할 뿐이다.

디오게네스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기록은 ‘크레이라(chreira)’라고 부르는 일화들뿐이다. 아래 내용은 이 일화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디오게네스 아버지 트레시우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페르시아제국에 통용되는 주화를 중간에서 환전하는 상인이었다. 그러나 그와 디오게네스의 환전 사기가 발각되어 시노페에서 추방당한다. 이후 디오게네스는 그리스로 건너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아폴로신전이 있는 델피로 간다. 거기서 얻은 신탁 내용은 ‘주화를 망가뜨려라!’였다. 이 신탁에서 말하는 주화란 당시의 경제와 정치를 작동시키는 체계가 아니라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틀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무너뜨리라는 신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아테네로 가서 기성 관습과 가치에 도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악의 본질에 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은 관습과 습관에 의존할 뿐이다.

디오게네스가 에게해를 항해하던 중에 해적에 붙잡혀 크레타섬에 있는 코린토스 출신 크세니아데스에게 팔렸다. 크세니아데스는 디오게네스를 데리고 코린토스로 가서 자신의 두 아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삼았다. 디오게네스는 코린토스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최선의 자기조절’이라는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그는 코린토스에 위치한 크라네움 김나지움 근처에서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큰 항아리인 ‘피소이(pithos)’ 안에서 살았다. 피소이는 진흙으로 만든 포도주 통이다.

디오게네스가 남긴 일화들

그는 어떤 소년이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소유했던 유일한 나무 밥그릇마저 버린다. 그리고 “내가 저런 불필요한 것을 지니고 다니다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스스로 한탄하였다.

그가 플라톤과 만난 일화도 있다.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인간 정의’를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소개하였다. 인간은 “날개가 없는 이족보행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병아리 날개를 다 뽑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로 가져와 “자, 제가 인간을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외쳤다. 플라톤은 이 일이 있은 후 ‘판판한 손톱을 지닌’이란 부연설명을 인간의 정의에 첨가하였다고 전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코린토스를 점령하고 디오게네스를 찾았다는 전설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디오게네스 라에르디우스의 ‘탁월한 철학자들의 생애들’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디오게네스가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그를 찾아왔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만일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가 “만일 내가 디오게네스가 아니라면, 나 역시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열망하는 사람을 그대로 실천한 인간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칼리스테네스라는 코린토스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디오게네스는 “칼리스테네스는 불쌍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식사를 해야 하다니!”라고 한탄하였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고 자신의 선택을 통해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것이 디오게네스 삶의 목표였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부르면서 폄하하였다. 이에 맞서 디오게네스는 플라톤과 그의 형이상학적 학문 세계를 비판했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이성이 권위를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삶을 통해 자족(自足), 엄격(嚴格), 그리고 무치(無恥)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도시와 국가 안에서 남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입신양명을 삶의 목표로 여기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대담한 충고다. 디오게네스는 자신도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라고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인간의 행복이 물질적 환경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수치에 대한 견해는 견유파 사상의 백미다. 그는 사회의 관습이 자연이나 이성보다는 열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이 수치스럽지 않다면, 그 행동은 공개적으로 행했을 때도 수치스럽지 않다. 예를 들어 아테네인은 시장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배고프다면 그 장소가 시장이든 신전이든, 음식을 섭취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의 무치한 행위를 보고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오히려 이성이 결여된 사회관습을 비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가운뎃손가락을 펴서 보여주면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끼손가락이라면 화내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반응이며 전통인가!”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성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유일한 도구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관습이라는 끈을 목에 맨 개와 같다. 이성만이 자신에게 충만한 삶을 선사하며 관습이라는 허울로 포장된 강요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도구다. 디오게네스는 이전 철학자들의 지식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삶의 자유를 구속하는 가식적인 지식을 혐오하였다.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관습을 비판하고 정치권력을 폄하하는 디오게네스의 거침없는 행위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디오게네스는 이성과 덕을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인간다운 삶은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관습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는 자신처럼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료를 찾아다녔다. 그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며 “나는 인간을 찾고 있다!”라고 외쳤다.

이성적인 삶은 관습과 도시, 정치 안에서 사는 것보다 위대하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삶만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향으로부터 쫓겨나 집도 없고 가난했지만 자신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는 부에 대항하는 용기, 관습에 대항하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욕망에 대항하는 이성을 지녔다. 디오게네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 삶을 위한 최선의 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디오게네스의 유산을 간직한 미디어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성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회적 관습과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아테네 시장에서 등불을 들고 다니며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한 사람의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내가 찾은 사람이라곤 불량배와 건달밖에 없구나!”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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