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그는 2년간 ‘평양의 이방인’이었다. 조영서(52) 한라대 경영학과 교수 얘기다. 조 교수는 2008년 1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평양에서 살았다. 평화자동차 총사장 자격이었다. 어느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평화자동차는 최초의 남북 합영회사였다. 남한의 평화자동차총회사와 북한의 조선민흥총회사가 함께 만들었다. 양측이 각각 70, 30의 지분을 가져갔다. 2000년 평양 부근 남포에서 공장이 문을 열었다. 한국, 중국,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의 제품을 부품 형태로 들여와 조립하는 공장이었다. 휘파람, 준마, 뻐꾸기, 삼천리 등 여러 자동차들이 이곳을 거쳐 북한 전역으로 흩어졌다. 평화자동차는 2012년 북한 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지난 6월 14일, 서울 광화문의 호텔 커피숍에서 조 교수를 만났다. 새정부 출범 후 남북 교류가 다시 시작될 분위기가 싹트고 있다. 남한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남북합영회사 CEO로 평양에 체류해 본 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도 이번에 방북 신청을 하고, 북측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평화자동차와 인연이 닿았는지 물었다. “원래 저는 공학 전공자다. 현대자동차에서 2년, 대우차 연구소에서 7년을 근무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북·일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족과 중국에서 살고 있는데, 평화자동차 총사장 자리를 제의받았다. 가족은 중국에 남고 혼자 평양으로 들어갔다.”

조 교수는 평양에서의 처음 10개월가량은 ‘전쟁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너무 힘들었다. 북한학 박사였는데도 북한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임직원들과 매일 싸웠다. 당시 전 직원이 400명이었다. 매일 노조위원장 400명을 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폐쇄공포증도 오더라.”

2008년 5월 3대혁명소조기념관에서 열린 봄철상품전람회에 참석한 조영서 전 총사장(가운데). 양옆의 여성은 평화자동차 직원들이다.
2008년 5월 3대혁명소조기념관에서 열린 봄철상품전람회에 참석한 조영서 전 총사장(가운데). 양옆의 여성은 평화자동차 직원들이다.

-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 “이런 식이다. 공장을 돌아보며 몇 번이나 ‘여기를 고쳐놓으라’고 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 해놓지 않은 거다. 후에 알고 보니, 지시를 따르려면 부품이 필요한데, 그 부품을 구입하는 데 결재 단계가 30개더라. 나까지 올라오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내가 사인하면 다시 확인을 거치며 내려가는 데 3개월이 걸린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부품이 북한 안에 없으니 중국에 주문해야 한다. 그러니 반년 넘게 걸린다. 많은 부분이 그런 식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직원들과 엄청 싸웠다.”

- 어떻게 극복했나. “내부 사정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직원들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결재가 필요한 일이 발생하면 아예 내 앞에서 서류를 작성하라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먼저 결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런 식으로 비효율을 찾아내 개선했다. 이렇게 진행하니 임원들이 ‘평화자동차는 빛의 속도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더라.”

- 당시 북한엔 자동차가 몇 대나 있었나. “2008년 기준으로 20만대라고 했다. 50년 된 목탄차부터 벤츠 S600까지 다 포함하는 숫자다. 특이했던 건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는 일본제 차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일제차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더라. 엉터리 중국제 새 차보다 오래된 일본차가 낫다는 식이었다.”

- 평화차에서 생산하는 차는 인기가 많았나. “쌍용의 체어맨을 들여가 이름만 바꾼 ‘준마’는 사실 당 간부들 사이에선 인기가 별로 없었다. ‘벤츠와 같은 세단인데 벤츠보다 못한 차’라고 생각하더라. 오히려 평양에 있는 외국 대사관에서 준마를 사갔다. 당시 북한에서는 개인 중에서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재일동포들이 차를 살 수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연료 소비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북한은 계획경제 아닌가. 원유수입량에 맞춰 개인의 연료(휘발유·경유 등) 소비도 조절한다. 연료 구입 허가를 받아야 차도 살 수 있다.”

조 교수가 북에 있던 시절, 남한으로 치면 기업 총수에 해당하는 총사장은 북한 전체에 총 스무 명 남짓 있었다. 당시 김정일은 평화차의 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평화차는 남북합영의 시범 사례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처음에는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1년 후에 달라지더라. 북한 내 기업 중 성장률 1등을 기록했다. 2007년에는 200대, 2008년에는 750대, 2009년 1750대로 생산대수가 올라갔다. ‘우리 땅에서, 우리 체제에서, 우리 사람들하고는 안 된다고 했는데 총사장 선생은 해냈다’며 당 고위간부들이 찾아와 비법을 알려달라고 하더라. 이후 주규창 기계공업부장을 통해 종종 교시가 내려왔다. 주로 ‘총사장 선생이 계획한 대로 하시라, 기대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항상 구두로 전해주더라.”

조 교수는 남한 사람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평양 최고위층들이 가는 곳을 드나들며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평양에 처음 도착하고 3개월 후였다. 새벽에 욕조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거의 실신했다. 북한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 남산병원이다. 여기엔 소위 로열패밀리와 ‘장군님의 방패와 성세’, 즉 최고위층만 갈 수 있다. 나는 남산병원 분원으로 실려갔다. 외교단지 안에 있다. 인상적이었던 건 청결함이다. 건물 벽면은 구소련의 1970년대 분위기인데, 침대 시트며 청소 상태가 정말 깨끗했다.”

로열패밀리와 마주친 일도 있었다.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살았다. 호텔 1층에 일본인 주방장이 있는 일식당 ‘몽란’이 있었다. 어느 날 좌석 주변에 파티션이 둘러쳐 있더라. ‘호텔에 아주 중요한 분이 오셨구나’라며 일부러 약간 큰소리로 종업원에게 말했더니 여자 얼굴이 보이더라. 김경희였다. 파티션 쪽에서 김경희 얼굴이 나타났다. 종업원에게 ‘요즘 남쪽에서 오신 손님들이 있니?’라고 묻더라.”

- 한국의 전경련처럼 총사장들 모임은 없었나. “총사장들 소집회의는 있었다. 한국인이니 나는 못 가고 제1부사장이 대신 참석했다.”

조 교수는 “현장에 가 보니 북한은 실용주의를 중시하더라”고 말했다. “테크노크라트, 즉 기술관료가 각광받는 곳이 북한이다. 현장에서 해결하는 자세를 좋아하는 듯했다.” 조 교수는 가장 보람을 느낀 일로 “2009년에 전년도 수익 중 50만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했을 때”를 들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였다.

- 북한과 중국의 기업 환경을 비교하면 어떤가. “중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있어서인지 자유로운 편이다. 각각의 특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다. 북한은 사회 전체가 경직되어 있다. 남한에서 북한에 들어가면 ‘안내’요원이 동행하지 않나. 이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감시만 하는 이들이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미안하더라. 전반적인 잠재력은 북한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어떤 파벌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 번만 변화의 모멘텀이 생기면, 지구의 그 어느 나라보다 빨리 변할 곳이 북한이다.”

키워드

#인터뷰
하주희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