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에 있는 ‘필립 2세’ 동상.
마케도니아에 있는 ‘필립 2세’ 동상.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원칙은 ‘시간’이다. 시간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이 변화를 생성과 소멸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로 옮겨졌다.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가 페르시아제국을 물리치면서 역사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스파르타와의 30년 내전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기원전 4세기 초에는 그 중심축이 무너졌다. 그리스에서는 국가나 도시공동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자 철학자들이 개인의 삶이 공적인 삶보다 가치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등장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퓌론의 회의주의, 그리고 제논의 금욕주의가 그런 시도들이다.

역사는 항상 중심축을 찾는다. 그 중심을 통해 역사가 회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중심은 환경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리더라고 부른다. 그리스 역사가 테오폼푸스는 유럽은 기원전 4세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리더 때문에 역사의 중심이 그가 사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리더의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다.

‘필립 역사시대’

우리는 그를 단순히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정도로 알고 있지만 필립 2세는 그리스 문명과 역사의 내용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했다. 고대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 중반을 ‘필립 역사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처럼 동서양을 하나의 문화로 엮는 헬레니즘시대를 구가하지는 않았지만 헬레니즘시대를 준비하는 기반을 굳건하게 닦았다. 그는 자신의 조그만 왕국을 재정비하고, 영토를 바다까지 확장했으며, 당시 최강국인 이란에 위치한 아케메네스 왕국을 제압할 만한 군사력을 축적하였다.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였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마케도니아의 식민지로 흡수하였다. 필립 2세는 그리스 변방국가 마케도니아의 왕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를 정복했고 페르시아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경제 체계를 구조조정하였고, 군대와 무기를 개량하였으며, 전략적인 결혼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결속을 다졌다.

필립 2세는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역사가인 니코메디아 출신 아리아노스는 마케도니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케도니아인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양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산속 깊은 곳에서 양과 염소를 치던 목동이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일리리아인, 트리발리아인, 그리고 트라키아인과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한다.”

필립 2세의 아버지 아민타스 3세는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리리아인들에게 항복했고 거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아민타스 3세가 기원전 370년에 죽자 필립 2세의 형 알렉산더 2세가 왕으로 즉위한다. 알렉산더 2세는 마케도니아가 일리리아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어린 동생 필립 2세를 볼모로 보낸다.

알렉산더 2세는 그리스 중동부, 에게해와 인접한 테살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테베와 전쟁을 벌였다. 그 후 알렉산더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민타스가 아테네에 보낸 사절이었는데, 아민타스가 죽자 그의 아내인 에우리디케와 사통하여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기원전 368년 알렉산드로스 2세를 암살하였다. 그는 테베와 휴전을 유지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동생 필립 2세를 테베 정치가 팜메네스에게 볼모로 보냈다. 팜메네스는 테베의 통치자인 에파미논다스의 친구다. 필립 2세는 어린 나이부터 주변국가의 볼모로 잡혀가 전쟁, 외교, 도시문화, 그리고 테베의 동맹국인 페르시아 제국에 관한 많은 지식을 몸으로 습득하였다.

볼모로 습득한 지식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 2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필립 2세보다 한 살 많은 페르디카스 3세를 내세웠다. 다시 페르디카스는 성인이 되어 마케도니아 가계를 혼란으로 빠뜨린 프톨레마이오스를 살해하였다. 마케도니아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고대하고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자신의 동생 필립 2세를 테베로부터 돌아오게 만들었다. 필립 2세는 새로운 군사전략과 정치적인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페르디카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이며 마케도니아에서 가까운 도시 암피폴리스를 차지하려는 전쟁을 벌인다. 암피폴리스는 해전에 필요한 커다란 나무를 제공하는 중요한 숲을 차지할 수 있는 스트리몬강을 끼고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아테네와 연합하여 암피폴리스를 점령하고 나서 아테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혼자 암피폴리스를 차지하였다. 암피폴리스는 군함 건설을 위한 나무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에서 트라케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광산이 있어 마케도니아가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암피폴리스는 마케도니아에 해상강국과 제국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페르디카스는 아테네 장군이자 연설가인 칼리스트타투스를 초청하여 마케도니아 경제와 세금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발전을 용인하지 않은 일리리아 왕 바르딜리스는 기원전 360년 전쟁을 일으켜 페르디카스와 마케도니아 군인 4000여명을 살해하였다.

필립 2세는 어릴 때부터 주변국가들의 볼모로 잡혀 생존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군사적 장점을 몸으로 익혔다. 필립 2세는 한마디로 군사 전문자이자 천재적인 전략가였다. 자신이 개발한 무기로 그는 그리스 전역을 정복했고 아들 알렉산더는 동서양을 통일하였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의 전통적인 장갑보병이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전술의 핵심은 자신의 기질, 정신, 그리고 전쟁에 임하는 마음이다. 그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도 수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쟁을 치르고 일시적으로 패배를 당했을 경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도망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에 더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잠시 후퇴했을 뿐이다.” 그는 이 삶의 원칙대로 살았다. 그 누구도 그를 영원히 정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길 때까지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필립 2세는 자신의 불굴의 정신에 알맞은 군사전략과 무기로 혁신을 감행하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장갑보병 전술에 새로운 군인들, 즉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을 배치했다. 마케도니아는 이제 마케도니아 정부군을 창설하여 훈련하고 전투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군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을 위해, 마케도니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마케도니아인이다. 이들은 이전 마라톤전쟁이나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처럼 밀집 대형에 자신의 창과 방패를 들고 나간 시민군이 아니었다. 이들은 전문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없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 양떼를 몰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하루 종일 군사훈련을 받는 전문 인력들이었다.

필립 2세는 암피폴리스에서 채굴한 금으로 이들의 월급을 충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제국의 군인들처럼 자신들에게 돈을 준 사람이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병이 아니었다. 필립 2세가 상상한 군대의 기반은 충성심과 자발적인 헌신이며 왕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이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국민이라는 자부심 위에 전문적인 훈련까지 받는 군인이었다. 필립 2세는 이들로 구성된 밀집 형태의 장갑보병부대를 갖추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페케타이로이’로 불리는 보병을 주력부대로 더하고 왕의 친위 기마부대인 ‘헤타이로이’를 첨가하였다.

필립 2세의 기마부대인 헤타이로이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는 보병부대와 기마부대를 적절하게 융합하여 개별 전투에 적합한 최적의 전술을 사용하였다. 귀족들로 구성된 헤타이로이는 완전군장한 채 말 위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전투가 전개되면 그 순간에 맞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부대다. 이들과 유사한 또 다른 군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벼운 방패를 들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방패잡이’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전선의 중심에서 싸웠다. 먼저 기마부대가 적의 전선을 흔들면 바로 뒤에서 ‘방패잡이’들이 그 전선을 파고들어 확대하고 주력부대인 밀집 대형의 보병들이 진군한다. 방패잡이는 기마부대의 초기 진압과 보병의 후방공격을 이어주는 핵심이다. 필립 2세는 전투조직을 세분화하여 기마부대, 방패잡이, 보병 이외에 마케도니아인들로 구성된 돌을 던지는 사람, 화살을 쏘는 사람, 그리고 창을 던지는 사람을 두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복원한 ‘필립 2세’.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복원한 ‘필립 2세’.

새로운 무기의 개발

마케도니아 군대가 이전 군대와 다른 점은 다양한 무기와 정교함이다. 군인들은 서로 다른 무기를 가지고 싸웠지만 이 무기들이 마케도니아 군대의 승리를 위해 조화롭게 협력하였다. 필립 2세가 서구 전쟁사에서 공헌한 점은 무엇보다도 마케도니아의 장갑보병을 그리스 전통적인 기능과 다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창을 사용하였지만 그 창 길이를 2.4m에서 4.2m로 늘렸다. 4.2m 창은 너무 길어 한 손으로는 들 수 없다.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창을 두 손으로 들었다. 창을 두 손으로 들다 보니 전통적인 그리스 보병이 들던 방패의 기능이 축소되어 작아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을 막는 용도로만 사용하였다.

이들은 근거리에서 육박전을 치른 것이 아니라 4.2m나 떨어진 거리에서 창을 찔렀기 때문에 청동으로 만든 정강이받이, 가슴받이, 그리고 투구가 불필요했다. 그는 이것들을 청동이 아닌 가죽으로 만들어 대치하였다.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우리가 보던 이전의 그리스 보병들이 아니었다. 기원전 2세기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마케도니아 군인들이 필립 2세가 고안한 방식대로 전투에 임했다고 기록한다. 폴리비우스는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로마군단과 마케도니아인들의 전투를 기록했다. 그는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서 싸우는 마케도니아 밀집 대형 군대를 묘사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군인들이 4.2m나 되는 창 10개로 로마 군인 한 사람을 찌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필립 2세는 전술개혁만큼이나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하였다. 이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필립 2세는 마케도니아 안에서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였지만 마케도니아 주위 야만민족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그래서 필립은 일리리아인과 다른 민족들을 물리치고 국경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케도니아를 늘 안전하게 보호하고 제국의 꿈을 꾸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달성해야 한다고 깨닫는다. 첫째, 필립 2세 자신이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위대한 군인이자 지도자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위상과 명성이 동맹국, 심지어는 적들에게도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다른 나라를 제압할 수 있는 최상의 군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필립 2세는 이전의 어떤 왕들도 누리지 못한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제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세계의 주인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리스 세계로 들어간다. 그가 아테네의 식민도시인 암피폴리스를 공격하고 쟁취한 사건은, 그가 아테네와 대결하여 승리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피폴리스와 그 안에 있는 판게이아산에서 대규모 금광과 은광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필립 2세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이 1000달란트 정도였다. 이 양은 아테네인이 그리스 전역에서 갹출한 금의 양과 비슷하다. 필립 2세는 이 돈으로 자신이 원한 경제·정치, 그리고 군사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에게 외교는 평화로운 시절에 사용하는 강력한 군사무기였다. 그는 외교를 조국의 이익을 개진하기 위해, 외국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목적을 이루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필립 2세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언변과 태도를 지녔다.

외교를 강력한 무기로

필립 2세는 암피폴리스를 통해 에게해 해변을 장악하고, 그곳에서 발견된 재화를 통해 제국적인 야심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아테네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먼저 주변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그는 기원전 353년 여름 테살리아를 공격하여 포키아인들에 대승을 거둔다. 이 전쟁으로 필립 2세는 에게해 지역의 군주가 된다. 그는 테살리아 남부 마그네시아 지역을 장악하였지만 아테네가 위치한 중앙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점점 필립 2세의 팽창을 의식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필립 2세는 기원전 352년부터 기원전 346년까지 발칸지역 정벌에 집중한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을 전부 마케도니아 식민지로 만든다. 특히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편이었다가 후에 아테네 편으로 돌아선 올린토스를 기원전 348년에 정복하였다. 필립 2세는 이제 그리스 남부 스파르타로 눈을 돌려 편지를 통해 정복이 가능한지를 외교적으로 실험한다. 그는 스파르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만일 내가 전쟁에서 이기면 너희들은 영원히 노예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지체하지 말고 항복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 농장을 파괴하고, 너의 백성들을 살해하고, 도시를 불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의 선전포고를 허풍이라고 여겼다. 필립 2세는 스파르타를 공격하지 않았다.

필립 2세는 그리스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정복이 가능한 도시국가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의 목적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그리스 연합군 결성이었다. 드디어 기원전 337년 가을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동맹국 회의가 코린토스에서 개최되었다. 필립 2세는 소아시아 공격을 통해 페르시아로의 진군을 알리면서 만장일치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를 연합한 코린토스 동맹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필립 2세는 페르시아 정복이라는 큰 꿈을 꾸다 기원전 336년 자신의 경호원인 파우사니아스에 의해 살해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파우사니아스의 살해 동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필립 2세에 이어 자신의 아들인 알렉산더 3세(후대 알렉산더 대왕)를 왕좌에 앉히려는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필립 2세는 동서양을 통일할 알렉산더의 등극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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