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폼페이 카사 델 파우노 유적 벽면에 묘사된 이소스전투 당시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탈리아 폼페이 카사 델 파우노 유적 벽면에 묘사된 이소스전투 당시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4세기 전까지 인류문화는 문명발상지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 중국의 갑골문명, 인도의 모헨조다로-하라파문명, 이란의 아베스타문명,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강의 이집트문명, 그리고 지중해의 크레타문명과 미노스문명이 그 예들이다. 이 문명들은 기원전 9000년경, 지금의 유럽에서 빙하기가 끝날 무렵 시작됐다. 개선된 기후와 토양 덕택으로 우연히 ‘발견한’ 농경을 기반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며 각 지역에서 발전한 개별 문명들이다.

이 문명권들 간의 문화적 교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되었고 광범위했다. 그 교류의 예를 이집트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전인 나카다시대(기원전 4000~기원전 3000년대)에 발견된 상아로 만든 인형에서 찾을 수 있다. 풍요를 상징하는 이 인형은 가슴과 성기 부분이 강조되었다. 특히 눈에는 특별한 보석이 박혀 있다. 파키스탄에서만 출토되는 청금석인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다. 기원전 3600년경 이집트에 문자와 도시가 등장하기도 전에, 한 동네 유력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동네 세공업자에게 인형을 주문했는데 이 세공업자는 파키스탄에서 청금석을 수입하여 인형을 제작하였다. 최초의 무역로인 ‘청금석’ 무역로는 기원전 4000년부터 존재했다.

축의 시대

기원전 3000년경 그리스, 인도, 이란, 이라크, 그리고 이집트에서 도시와 문자가 등장하면서 독자적인 문명이 발흥하여 전개되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문명의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다. 독자적 문명이 발흥한 장소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축의 시대는 기원전 12세기경에 등장한 ‘구전문학’에 의존한다. 고대인들은 우주, 자연, 세계, 그리고 인간의 질서와 염원을 오래전부터 노래했고, 기원전 12세기경 ‘정형화된 형식과 내용’을 지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 지역에서 구전으로 부르기 시작한 노래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그리스), 모세의 ‘출애굽 노래’(이스라엘), 이란의 ‘야스나와 야스트’(고대 아베스타), 인도의 ‘리그베다’라고 부른다.

그들은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그러한 구전으로 내려온 노래를 문자로 남겼다. 우리는 그 문헌들을 경전(經典)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저술들과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을 후대 유럽 문명의 기준이 되는 ‘경전’으로 남겼다.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노래를 글로 결집하여 후대 유대인의 경전이 된 ‘토라’를 남겼다. 이란의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아베스타의 내용을 집대성하여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를 집필하였다. 인도에서는 붓다가 등장하여 고대 인도의 힌두교를 혁신하여 불교를 창시하였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붓다의 말을 집대성하여 경전을 제작하였다.

역시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한 황하문명을 제외하면 위에서 언급한 문명권은 원래 하나의 문화권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사하면서도 독창적인 문명을 각각 구축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고대 페르시아제국은 이 문명들을 ‘원래의 하나’로 되돌리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페르시아의 창건자 키루스와 페르시아제국의 완성자 다리우스 대왕은 서쪽으론 이오니아, 남쪽으로 이집트, 북쪽으로 스키타이와 박트리아, 그리고 동쪽으론 인도까지 하나의 정치체계로 통치하였지만, 이 거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을 정신적인 끈을 준비하지 못했다. 이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킨 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그 문화를 우리는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헬레니즘이 완성한 ‘하나의 문명’

독일 역사학자 요한 구스타브 드로이센(1808~1894)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제국을 물리치고 그 거대한 제국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치하기 위해서 차용한 그리스 언어, 문화, 관습, 정치체계를 ‘헬레니즘’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그리스 문화의 변경인 마케도니아 출신이었지만 그리스의 아테네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타인의 안디옥, 그리고 셀레우키아(바그다드의 남쪽)를 헬레니즘의 정신을 담은 도시로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전파한 헬레니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테네 정신을 거의 200년 동안 페르시아제국의 문화에 심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 탄생되었다. 헬레니즘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일률적인 문화가 아니다. 헬레니즘, 고대 그리스 문화, 페르시아제국의 경제·정치제도, 그리고 개별 지역의 고유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하이브리드 문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와 유럽이 각자 독립적인 문명을 구축하기 전, 동일한 문화에서 출발했다는 그 오래된 전통을 그리스 문명을 중심으로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헬레니즘 문명 정책을 거절하고 다시 개별 문명으로 돌아가 헬레니즘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당시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문필가들의 언어인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코이네(Koine)’ 그리스어를 자신이 정복한 지역들 간의 국제공용어로 사용하였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현대 그리스어의 조상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무장한 아테네 문화를 갖고 가는 곳마다 도시계획, 교육, 정부, 그리고 예술을 창조적으로 탄생시켰다. 헬레니즘의 근간은 기원전 6세기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사상들이다. 헬레니즘은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비잔틴제국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은 이전 수도인 아이가이(Aegae)에서 암살당한다. 필립 왕이 암살되기 전 에피루스의 알렉산드로스 1세와 필립 왕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를 위해 마케도니아 모든 왕족이 모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필립의 네 번째 아내인 올림피아스와 필립 사이에서 난 딸이다. 필립 왕은 결혼식이 거행될 도시의 극장으로 들어가던 참에 자신의 일곱 경호원 중 한 명이던 파우사니아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때 필립 왕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20살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두 친구가 도망치는 파우사니아스를 추격하여 살해하고,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후 2년 동안 자신의 정적들을 한 명씩 제거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도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동맹의 최고지도자인 헤게몬(hegemon)으로 등극한 후 페르시아제국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는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제국 영토로 들어가 그라니쿠스강 전투를 치렀다. 이곳은 고대 트로이가 있던 장소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을 방어하던 페르시아제국의 방백과 로데스섬의 멤논이 이끄는 대규모 용병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알렉산드로스의 전설들

알렉산드로스의 위상과 관련된 중요한 전설이 있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프리기아(오늘날 터키의 중서부)에는 왕이 없었다. 당시 프리기아에는 우마차를 끌고 도시에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다. 고르디아스라는 농부가 우마차를 끌고 도시로 들어왔다. 우마차는 권력과 군사력의 상징이다. 고르디아스가 도시로 들어오자 신의 뜻을 전달하는 독수리가 우마차에 앉아 프리기아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르디아스의 아들 미다스는 감사의 표시로 이 우마차를 프리기아의 신 사바지오스(Sabazios·그리스의 제우스신과 같은 존재)에 바치고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단단한 나뭇잎으로 만든 밧줄로 묶어 놓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제는 페르시아의 속국이 된 프리기아의 궁궐을 방문했을 때, 이 우마차는 여전히 기둥에 묶여 있었고 그 매듭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 당시 신탁에 의하면 이 매듭을 푸는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될 운명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기 위해 이 매듭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는 숙고에 들어가 매듭을 푸는 것이나 자르는 것이 차이가 없다고 판단하고 칼을 꺼내 두 동강이를 냈다. 이 전설은 알렉산드로스를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나 페르세우스와 같은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2년 팔레스타인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티레로 진격하였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평원에서는 밀집대형 전투에 능했지만, 티레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싼 섬 도시다. 알렉산드로스의 전략은 7개월 동안 포위하여 보급을 차단한 후 강둑길을 건설하여 성벽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대왕이 이끄는 부대와 지중해 연안 티레에서 만나 승리를 거뒀고 여세를 몰아 이집트로 들어가 가자를 점령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침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 반겼다. 그는 신탁을 받아 이집트 신인 아문신의 아들로 추앙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제우스-아문신을 자신의 아버지로 불렀다. 그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이집트 북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항구도시를 만들어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프리기아, 티로, 그리고 이집트 정복은 페르시아제국과의 정면대결을 위한 준비였다. 그는 기원전 331년 오늘날 이라크 북부 도훅(Dohug)인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3세와 운명적인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전투에서 패배해 아내, 어머니, 그리고 두 딸이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 3세는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외교를 통해 정면대결을 피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다리우스 3세는 굴욕스럽게 알렉산드로스를 찬양하며 페르시아제국을 함께 통치하자고 제안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친구 파르메니온과 이 제안을 숙고하였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내가 알렉산드로스라면,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라면, 내가 과연 그럴까”라고 말하면서 다리우스 3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자신이 아는 세계를 모두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후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로 도망하다 베수스라는 자신의 방백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수사,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를 전투 없이 정복하였고, 기원전 330~기원전 328년엔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이 정복했던 제국의 국경을 넘고자 했다. 그 이상을 정복하기 위해 인도를 침공하여 기원전 327~기원전 324년 3년간 인도에 거주한다. 그는 기원전 324년 수사로 돌아와 제국 건설을 위한 행정조직을 강화하다 마치지 못하고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바빌로니아의 궁전에서 열병에 걸려 죽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제국은 다양한 인종, 언어, 그리고 문화를 지닌 수많은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나라를 정복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는가.

호모노이아의 유래

고대 그리스는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하였다. 그리스인과 야만인.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크세노폰의 구분이며 그리스문명을 정의하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 자매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최고의 세계시민이었다. 인류가 하나라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 사상 ‘호모노이아(homonoia)’에서 유래한다. 호모노이아는 ‘모두 한마음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스인은 호모노이아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호모노이아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가치인 ‘경쟁’이 부재한 상태다.

그리스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2세의 스승이었다. 그는 플라톤이 주장한 ‘야만인들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리스인은 야만인들과 대결하여 그리스의 우월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야만인들은 페르시아인이다. 이소크라테스는 다양한 그리스 도시민들의 ‘호모노이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제국과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필립2세가 죽은 후 이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후퇴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향 마케도니아 출신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셔 사상적인 영향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소크라테스와 유사하게 ‘그리스인은 친구이며 이방인들은 동물과 다름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를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인종과 상관없이 인간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이런 구분은 자신이 정복한 수많은 인종들을 전략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통적인 ‘호모노이아’ 정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도 거절했다.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호모노이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호모노이아를 받아들여 사람들 간에 평화와 친교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인류 모두를 한 민족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은 인류 모두를 위한 공동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가 있다고 여겼다. 그 임무는 인류를 평등하게 대하고 조화롭게 살게 만드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호모노이아’ 사상은 헬레니즘의 성공 요소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세계를 자신이 익숙한 마케도니아식 정치나 경제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세계제국을 경영하여 성공을 거둔 페르시아제국의 형정(刑政)체계와 경제·조세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방백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마케도니아 군인들로 하여금 그 행정을 감찰하게 만들었다. 그는 행정과 재정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페르시아의 이상과 그리스 이상을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인 헬레니즘을 만들어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양한 인종을 이끄는 리더로 자리매김하며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호모노이아를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신격화한다. 그는 이집트에서 자신을 제우스와 아문신의 아들로 등극시켰고, 페르시아제국의 왕들처럼 스스로를 신격화하였다. 자신의 신격화가 제국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전의 어떤 정복자도 꿈꾸지 못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호모노이아’, 즉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려는 마음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글로벌 마인드’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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