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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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자리에서 ‘요즘은 골반 넓은 여성들이 인기가 있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갑자기 제 옆에 앉아 있던 교수가 저더러 일어나 보라고 말하더군요. 엉거주춤 일어났더니 양손으로 제 골반을 꽉 잡은 채 ‘너는 인기 많겠다’라며 골반을 흔들더라고요. 갑작스러운 공개적인 접촉에 저는 너무 당황했는데 웃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웃는 사람 대부분은 선배 레지던트(전공의)였죠.”

지방 대학병원 내과 2년 차 전공의인 김정미(가명)씨가 털어놓은 이야기다. 김씨의 대학 동기로 수도권 병원 전공의인 이영훈(가명)씨가 말을 거들었다.

“저희 교수님은 머리를 때리는 게 취미인가 봐요. 조금 전에도 머리를 맞았어요. 툭툭 치면서 기분 나쁘게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면서 빈정거리거든요. 그 상황에서 얼굴 찌푸리면 또 혼나요. 무조건 안쓰러운 얼굴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해야 해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가끔은 모멸감이 들 때도 있어요.”

이런 건 흔한 일이다. 경기도 한 대학병원 신경외과 4년 차 전공의인 박종현(가명)씨가 그동안 들었던 욕설이나 폭언은 기억이 다 나지 않을 정도다. “‘이 새끼 저 새끼’하는 욕은 너무 익숙해서 별 감정도 안 들고요. 다리로 걷어차는 거나 머리를 때리는 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예요.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일을 한다는 명목하에 조금만 실수해도 폭언과 폭행이 쏟아지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에요. 전공의 1년 차 때 선배들에게 기합받다가 발목을 다친 적도 있었어요. 전공의 2년 차 때는 교수에게서 뺨을 맞았는데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3년 차 때는 환자들 앞에서 ‘쪼인트’도 까였는데 다음 번에 그 환자가 ‘안됐다’며 음료수를 챙겨주더군요.”

보통 의대에 입학해 6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나면 국가고시라고 불리는 의사 자격시험을 보게 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의사는 ‘일반의’ 자격을 가진다. 각 과(科) 전문의가 되려면 여기에 수련 과정을 더 밟아야 한다. 상급병원이나 대학병원에서 전공의 과정, 즉 1년간의 인턴과정과 4년간의 레지던트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시험을 치게 되면 ‘OO과 전문의’라는 이름을 달 수 있다. 전문의가 대학병원에 남아 진료를 보면 전임의(펠로)라고 불리고, 이후 교수가 된다.

수련 과정 중인 전공의 인권 문제가 제기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각종 업무에 시달리느라 환자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15년 대한의사협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자. 주 80시간을 초과해 훨씬 많은 시간을 근무했다는 전공의가 전체의 52.9%였고 주당 100시간 넘게 근무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연속 수련시간, 즉 쉬지 않고 근무한 시간이 36시간을 넘긴다는 응답이 76.9%나 됐다. 심지어 연속 수련시간이 144시간을 초과한다는 응답도 24.9%에 달했다.

근무시간만 긴 것이 아니다. 전체 전공의 중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는 전공의는 33%, 성추행 경험이 있는 전공의도 13.7%나 됐다. 언어폭력 경험이 있는 전공의는 86.2%, 신체폭력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30.5%나 돼 대다수 전공의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수련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15년에는 ‘전공의 특별법’이 제정돼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됐다. 주 80시간 수련시간, 교육적 목적의 수련시간까지 포함하면 최대 88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병원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36시간 이상 연속 수련을 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규정이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게 전공의들의 말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 병원 중 조사대상 66개 병원 중에 주 80시간 수련시간을 지키는 병원은 8군데에 불과했다. 최대 88시간까지 수련시간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해도 23개 병원만이 정해진 수련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법적으로 강제한 덕분에 수련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인권 문제에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조사에서도 “상급자에게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당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전공의가 매우 많다. 인천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58.6%의 전공의가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빅5 대형병원에서도 적게는 23%, 많게는 37%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최근 불거진 몇 가지 사건을 봐도 전공의에 대한 폭행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3월에는 경남 양산과 서울에서 전공의들이 폭행과 성추행 등의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에서는 교수가 여성 전공의들을 상대로 몇 년간 “오빠라고 부르라” “사랑한다”며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울 한양대병원에서는 성형외과 교수가 전공의 두 명을 상습적으로 때리고 언어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8월에는 부산 부산대병원에서도 상습적으로 전공의를 폭행했다는 교수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이 교수는 2009년에도 간호사와 전공의를 상대로 폭언을 퍼붓고 폭행했다는 신고가 접수됐었지만 유야무야된 바 있었다. 전주에서는 전북대병원의 정형외과에서 1년 차 전공의가 선배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상습적인 폭행에 시달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주변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다른 병원에서 수련을 받으러 해당 병원에 온 피해 전공의는 본격적인 수련기간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각종 잡무를 떠맡았고 다리에 시퍼런 멍이 들 정도로 폭행당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전북대병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의사에게 정직 1개월이라는 가벼운 징계만을 내렸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병원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은 데다 처벌도 솜방망이 수준으로 가볍다는 점에서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결국 복지부와 대한병원협회 수련환경평가위원회가 병원에 대해 징계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관계자는 “아직 징계 수위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전북대병원에 대해 전공의 정원을 감축하는 형태로 징계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병원의 사각지대 전공의 인권

한국 병원의 수련 환경은 도제식(徒弟式)이다. 교수가 정점에 있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전임의(펠로), 전공의, 학생 순으로 위계 질서가 짜여진다. 특히 하나의 전공을 정해 전공의 수련 과정에 들어가면 폐쇄적인 의사 사회에 진입하게 된다는 얘기다. 4년 차 전공의 박종현씨는 “신경외과, 흉부외과 같은 비인기 학과는 물론 인기 학과도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안다고 할 정도로 폐쇄적인 사회다 보니 조그만 소문에도 민감하다”며 “하물며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교수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용기가 있는 전공의는 매우 적다”고 말했다.

기동훈 대전협 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최근 사회 문제로 떠오른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교수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전공의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나서는 것은 거의 내부자 고발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강압적인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얘기입니다.”

전북대병원에서 폭행 사실을 고발한 피해 전공의는 결국 정형외과 수련 과정을 그만뒀다. 이 전공의에게 남은 진로는 두 가지, 다른 과(科) 전공의로 처음부터 수련을 시작하거나 전공 과목이 없는 일반의로 보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의사 생활을 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알렸는데 그에 대한 대가도 고스란히 치르고 있다.

기동훈 회장은 병원들이 전공의에 대한 폭행 사건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 하면서 없었던 일로 지나가려는 병원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피해 사실이 폭로돼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지도 않는 곳이 많아요.”

일반적으로는 당연한 조치,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고 피해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는 일이 병원에서는 요원(遙遠)한 일이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의 연구를 살펴보면 폭행·폭언이 있는 전공의는 우울증상을 보일 확률이 확실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우울증상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발현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과도한 음주나 흡연 같은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아픈 사람을 고치겠다는 의사들이 “더 아프다”고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전공의들의 인권침해 문제는 단순히 전공의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잦은 폭력 피해 경험은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강화하면서 환자들의 진료에도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전공의들은 엄격하고 강압적인 병원 문화가 실력을 키우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오히려 이 기간 전공의들의 스트레스를 키움으로써 건강한 의료 인력으로 자라나는 것을 막는다는 얘기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2013년 대전광역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전공의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투신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그는 사망 직전 4개월 동안 병원 당직실에서 24시간 대기하면서 하루에 3~4시간씩 쪽잠을 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주일 동안 170번 전화를 받았으며 야간이나 새벽에 울린 전화는 44번이었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수련을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목숨을 끊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병원 문화는 물론 수련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재점검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 병원에서는 수련과 근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아직 경험을 쌓아야 할 전공의들이 환자 진료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연히 배우고 가르치는 병원 문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래서 전공의의 수련 비용을 국가가 일정 부분 지원해 병원의 인력 부족 현상을 막고, 병원이 의료 인력 계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나온다. 실제로 의료기관이 완전히 상업화된 미국에서도 전공의에 대한 교육 비용은 미국 의료보험제도 중 하나인 메디케어(Medicare)에서 20%를 지원하고 있다. 기동훈 회장의 말이다.

“전공의의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전공의 집단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것뿐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 서비스의 질을 올리고 나아가 의료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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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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