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그리스의 위대한 리더 테미스토클레스
고대그리스의 위대한 리더 테미스토클레스

인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소통했다. 그렇게 공동의 기억을 구축하면서 문화를 만들어왔다. 한곳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해 기원전 1만년경 농업을 발견하고 편의상 계급을 만들어 리더를 선출하였다. 리더는 정교한 행정체계라는 ‘도시’를 만들어 문명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4만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당시 유럽과 중동에서 그전에 이미 정착하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신체적으로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우세했다. 오늘날 격투기 선수의 체격과 달리기 선수의 민첩함을 소유한 그들은 빙하기시대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들은 연약해 보이는 호모사피엔스를 경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들은 기원전 3만년 전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스페인 지브랄타의 고르함 동굴에서 마지막 유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이 난무할 뿐 정확한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외적인 조건에서 보면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우월했지만 결국 사라졌다. 그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유인원들처럼 그들이 멸종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유적지를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거주지에 남겨진 유골들의 수를 계산하면, 그들은 기껏해야 10명 정도가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란 원칙을 고수했고 10명 이상으로 공동체가 커지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다른 일원들과 충돌하였다. 그들은 10명 이상의 공동체를 만들기 힘들었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는 달랐다. 그들의 유적지를 분석해 보면 20~30명 이상 거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기원전 1만년부터는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는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자신하고는 다른 의견도 경청하는 톨레랑스를 연습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했다. 공동체의 다른 일원의 입장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수백 명이 함께 거주하면서 사냥을 기획하고 사냥감을 획득했다. 사냥감을 공동체로 가져와 함께 나누면서 연대의식이 생겼다. 다양한 사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소수의 제한된 의견으로 결정하는 네안데르탈인들보다 훨씬 효율적인 사냥을 했다. 호모사피엔스들이 자신들을 위한 최적의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리더’라고 부른다. 리더는 공동체 일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가능하면 모든 일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차선의 결정을 내린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런 리더를 ‘성인(聖人)’이라 불렀다. ‘성인’은 그 한자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 구성원들의 말을 ‘귀(耳)’로 수렴하는 자다. 따라서 리더의 첫 번째 조건은 ‘경청(敬聽)’이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것을 자신의 ‘입(口)’으로 말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스스로 ‘짊어지는(壬)’ 사람이다. 그러나 대중의 다양한 의견들을 천심(天心)으로만 착각해선 큰 해를 입게 된다. 대중은 항상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헤아리기 때문에 일치된 의견을 산출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과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대중이 공동체의 중요한 사항들을 투표로 결정하는 체계를 ‘중우정치(衆愚政治)’로 비판하였다.

동굴로 내려간 창조적 소수

인류가 도시와 문자를 만들어 문명을 구축한 후 ‘왕(王)’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구가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왕을 ‘루갈(LUGAL)’이라고 불렀다. ‘루갈’이란 수메르어를 번역하면 ‘머리에 왕관을 쓴 몸집이 큰 사람’이란 뜻이다. 인류 초기의 리더들은 힘이 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리더는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카리스마를 지녀야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리더는 자신을 깊이 응시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수련하는 것만큼 자신의 정신을 수련하여,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탁월한 시선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기원전 3만3000년, 유럽 전체는 수십 미터 빙하로 덮여 있었고 호모사피엔스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했다. 그때 창조적 소수들은 생존하고는 상관없는 일을 시작한다. 그 소수들은 빙하로 덮인 높은 산 속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한손에 횃불을 들고 동굴 속 깊이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과 자연, 자신과 동물,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들은 처음으로 생존하고는 상관없는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깊은 동굴에서 자신들이 낮에 보았던 동물들을 기억하여 그렸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는 기원전 3만3000년부터 농업을 발견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기원전 1만년까지 유럽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창조적 소수들은 왜 지하로 내려가 벽화를 그렸을까? 빙하가 뒤덮인 지상에서 공동체를 위해 사냥을 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동굴에 내려간 이유에 대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설명하였다. 동굴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공동체가 나가야 할 길을 깨닫는 공간이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자라나 그 환경이 강요한 세계관의 산물이 된다. 하지만 리더는 자신이 본 ‘형상’이 실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불 앞에서 의도적으로 비친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처음으로 동굴에서 자신의 오래된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는 빛의 근원인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 태양의 존재를 그 안에 거주하는 동굴 거주자들에게 알려준다.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감지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깨어 있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나갈 바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가 돌아가는 원칙을 오랜 수련을 통해 감(感)으로 아는 자다. 리더는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할 특별한 지식을 가진 자다.

우리는 한 사회나 국가가 운행하는 방식을 ‘섭리(攝理)’라고 부른다. 섭리는 자신의 손을 들고 두 귀로 공동체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길을 제3의 ‘귀’를 통해 듣고 행하는 자다. ‘섭리’의 ‘섭(攝)’자에 ‘귀 이(耳)’자가 세 개 있는 이유다.

리더가 타락하는 순간

리더는 일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공동체를 위한 최선을 찾아 대중을 설득하는 자다. 대중을 설득하는 수사학적 기술은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대중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성적인 사실에 근거한 ‘로고스(logos)’다. 그런 사실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파토스(pathos)’다. 이 ‘로고스’와 ‘파토스’를 지탱하는 원초적인 수학공식이나 문법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에토스(ethos)’다. 에토스는 흔히 ‘성격’ ‘습관’이라고 번역되는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차용된 단어이다. ‘에토’는 어떤 개인의 평상시 생각이나 말, 행동 등이다. 이것들은 그 사람의 평상시 습관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이에 비춰 보면 리더는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위대한 자신을 열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련하는 자다. 리더의 성패는, 그가 그런 자신만의 위대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또 그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수련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리더는 자신이 원래 탁월하여 리더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 타락한다. 그런 마음을 우리는 ‘오만(傲慢)’이라고 부른다. 리더가 자신에게 잠시 맡겨진 배역을 자신의 탁월함으로 착각하는 순간 장님이 된다. 장님이 되면 눈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는 곧 파멸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오만했다. 일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오만해진다. 그리고 자기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리더는 위대해야 한다. 위대함이란 자신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스스로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수련하는 과정 중에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러기에 위대한 리더는 항상 근신(勤愼)한다. 그는 대중이 마련한 단 위에서 명령을 내리도록 위임받은 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최선을 선택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자다.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마라톤전투에 참전하였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연합군은 다리우스 대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을 마라톤 평원에서 물리쳤다. 당시 다리우스 대왕은 23개국이나 다스리는 제왕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어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들의 승리는 우연이며, 페르시아 대군이 다시 그리스를 공격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도시국가 대부분과 아테네 시민들은 우연히 찾아온 승리에 도취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아테네를 침공하면 그리스는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란 사실을 아는 유일한 리더였다.

그는 기원전 483년경 수니온이란 지역에서 우연히 은광을 발견하여 그리스 문명을 구원할 묘략을 짠다. 그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 은광을 골고루 배분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도시국가의 모든 리더들을 ‘속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다른 도시국가 리더들에게 고한다. “도시 국가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해상무역이 중요하며, 해상무역을 약탈하는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 수니온에서 발굴한 은으로 삼단노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한다. 도시국가 리더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해적들을 물리칠 삼단노선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해적을 막기 위해 삼단노선을 구축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은 구실에 불과했다. 그는 그들을 속여 페르시아제국의 재침공에 대비했다. 그가 아테네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도시국가 지도자들을 속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윤에 눈이 어두워 자신들의 눈앞에 다가온 커다란 위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예에서 보듯 리더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자다. 만일 테미스토클레스가 대중의 말을 듣고 은광을 골고루 나누어 가졌다면, 3년 후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와의 살라미스해전에서 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테네는 잿더미로 변해 서양문명이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명은 리더의 비전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대중을 숙고하게 만드는 자

위대한 리더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자가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위대한 시민이 되도록 수련 방안을 마련하는 자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전쟁에 참여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위대한 리더는 대중을 숙고(熟考)하게 만드는 자’라고 판단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함께 인류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이벤트를 준비하였다. 그가 바로 페리클레스였다.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봄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축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술을 마시고 일탈하기 위한 종교의식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전통적인 종교축제를 민주시민을 위한 극장문화로 만든다. 아테네는 축제 1년 전부터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일주일 내내 한 공간에 모여 비극작품을 관람하는 신기한 문화를 체험한다.

당시 페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가 무대에 올린 최초의 비극작품은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뒤 언덕에는 아테네 시민 2만명이 앉았다. 당시 아테네 시민이 7만명 정도였는데, 대다수 남자들이 모두 참석한 셈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과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강대국 페르시아를 이겼다는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에는 그리스 군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연극에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와 어머니 아토사, 그리고 크레르크세스의 돌아가신 아버지 다리우스가 혼으로 등장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마라톤전쟁이나 살라미스해전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잘 싸웠고 용맹했는지 보고 싶었지만 페리클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비극작품 ‘페르시아인들’에선 페르시아 여왕 아토사의 슬퍼하는 소리, 거의 죽은 사람처럼 등장한 크세르크세스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탄하며 절규하는 모습만 나온다.

아테네인들은 자신의 부모형제를 죽인 페르시아제국의 왕을 보고 미움에 가득 차기보다는 그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린다. 아테네인들은 무대에서 흐느끼는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을 보고 마치 그가 자신인 것처럼 눈물을 흘린다. 바로 이 순간부터 인류는 스스로를 적의 눈으로 보는 능력이 배양되기 시작했다. 아테네인들은 무대 위의 원수와 하나가 되어 그를 위해 울고 있는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극장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테아트론(theatron)’의 본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보는 장소’이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이란 장르를 비극작가들과 함께 시작하면서 시민을 교육했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는 자신을 제3의 눈으로, 심지어는 원수의 눈으로 응시할 수 있는 시민들을 통해 완성된다고 믿었다. 지금도 이것은 모든 미디어의 본령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숙고하는 인간인가? 우리의 리더는 더 위대한 자신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하고 있는가? 다시 강조하건대 위대한 리더는 스스로 끊임없는 수련과 몸에 밴 겸손함으로 감동이란 카리스마를 전달하는 자다. 그는 때때로 테미스토클레스처럼 결단하는 용기가 있는 자다. 그는 위대한 시민을 만들기 위한 시민교육을 주관하는 자다. 하지만 우리의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미디어와 TV엔 온갖 훔쳐 보기, 흉내 내기, 그리고 마시고 먹기만 가득 차 있다. 그런 대한민국에 희망은 있는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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