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중·고 남녀공학에서 여학생 전교회장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당시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에서도 한 여학생 후보가 남학생 후보들을 제치고 학생회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여학생 후보는 학생복지에 대해 현실감 있는 공약을 앞세워 남학생 후보들을 압도적 표차로 제쳤다.

당시만 해도 여학생 학생회장이 뽑힌 것 자체가 뉴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만 해도 회장·반장은 남자, 부회장·부반장은 여자로 미리 정해놓고 선거를 했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남자 회장, 여자 회장으로 어정쩡하게 나누어 뽑아놓고 대표 1명이 필요하면 남자 회장을 먼저 찾았다. 그런 시절을 거쳐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서야 남녀가 정정당당하게 표로 겨루는 시대가 왔으니 기삿거리가 될 만도 했다.

오히려 요즘의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실에서는 남학생들을 압도하는 여학생들도 많다. 그중에서도 요주의 대상인 여자 아이들을 선생님들은 농반진반으로 ‘기 센 언니들’이라고 부른다. 기 센 언니들은 대부분 목소리도 크고 욕도 잘한다. 화장은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하고 온다. 화장을 덜한 날에는 연예인처럼 검은 마스크를 쓰고 와서는 하루 종일 벗지 않는다. 말 한번 잘못 걸면 욕설과 고함이 돌아오니 솜털이 보송보송한 남학생들은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다. 게다가 중학교만 해도 남녀 간의 덩치 차이가 별로 없다. 가끔은 극성스럽고 무서운 여학생들의 횡포에 눌리다가 선생님에게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남학생들도 있다.

그런데 요즘 학교 안의 기 센 언니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 우리 사회의 ‘레드라인’을 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의 부산 중학생 폭행사건, 강릉 여고생 폭행사건,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등의 주범이 모두 앳된 소녀들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가장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인간 사회의 가장 저급한 해결 수단인 폭력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교실에 날벌레 한 마리만 들어와도 반 전체가 비명을 질러대서 수업을 할 수 없었던 여학생 교실을 생각하면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일들을 여학생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잘 믿기질 않는다.

교사들이 여학교에 근무하는 것이 엄청 운좋은 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일으키는 말썽이라고 해봤자 친구를 왕따시키거나 일진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학교 현장에서도 기 센 언니들이 저지르는 말썽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센 언니가 직접 때리기도 하고 좀 덜 센 언니에게 때리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자신의 지시를 잘 따랐는지 동영상을 찍어서 현장 중계를 하는 것은 거의 필수다. 조폭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여학생들의 현실세계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퇴근하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교실에서 뺀질대던 기 센 언니 둘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사복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은 아이들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어디 가니? 학원?” 고개를 끄덕인다. “수업 시간에 딴짓만 하고는 학교 끝나자마자 학원을 간다고?” 두 녀석이 씩 웃는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대답이 이상한가 보다. 이 아이들도 제대로 가르쳐서 졸업시켜야 할 제자들이라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진다.

강재남

서울 중계중학교 교사

강재남 서울 중계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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