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검정색이었다. 검정 스커트에 검정 재킷, 검정 구두. 보이는 대로 집어 입고 나온 차림이 이상스레 이 모양이었다. 사소한 감상, 별다를 것 없는 9월 5일이 지나고 있었다. 오후 4시가 좀 안 됐을까. 책상 위 전화기를 붙들고 시민단체 활동가와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발암물질에 관해서다. ‘지금 나에겐 당신이 발암물질이다’ 막말이 혀끝까지 밀고 올라오는 판이었다.(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요즘 예민하다. 생리대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때문이다.) 분노로 갈팡질팡하던 눈길이 휴대전화에 닿았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광수 교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잠시 아득하게 들렸다. 뒷부분을 안 읽어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걸. 가만히 꼽아 보니 마 교수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올봄이었다.

마 교수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걸까. 근간은 시선집이다. 1월에 나왔다. 제목은 ‘시선’(페이퍼로드). 출판사에 연락했다. 다음 책을 준비 중이었는지 궁금했다. 최용범 대표는 당황한 목소리였다.

“직접 뵌 건 3월이 마지막이었다. 댁으로 찾아갔다. 마 교수님은 ‘주역’을 잘 아시지 않나. ‘주역’ 책을 내자 했더니 일단 새로 쓰는 건 미루고 싶어하셨다. 예전 책 ‘운명’을 다시 내기로 한 참이었다.”

마 교수는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에 글을 썼다.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나진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마 교수는 가장 진지하게 문장을 대하는 문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문장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지문처럼 쉽게 읽힌다. 그런 문장으로 여운을 남긴다. 얼마나 힘들여 썼을지, 상상해 보면 기가 질릴 정도다. “지금도 국어사전을 옆에 놓고 확인하며 글을 쓴다.” 문장을 어떻게 쓰시는지 캐묻는 기자에게 생전에 툭 던진 말이었다.

육필 원고의 행방이 궁금했다. 퇴고 과정에서 많이 고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마광쉬즘’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원고를 찾아서 들고 가겠다” 최 대표가 답했다. 조문을 가려고 이런 복장을 했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빈소로 향했다.

고인은 순천향대 서울병원에 안치됐다. 2년 전 마 교수가 모친과 이별한 곳이다. 생전에 이곳에서 치료도 받았단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빈소가 차려졌다. 유족은 두 명, 누나 조재풍씨와 조씨의 딸이다. 두 사람은 경찰 조사를 마치고 오느라 8시쯤 빈소에 도착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이성동복(異姓同腹) 누이는 한눈에도 마 교수와 외모가 비슷했다. “얼마나 똑똑했어요. 이렇게 갔으니 속상하지 않겠어요?” 조씨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79년 홍익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때 나이 스물여덟, 그야말로 주목받는 신예 교수였다. ‘천재’라 불리던 때였다. 1983년 모교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이전엔 박사과정 수료 상태였다. 지금에야 윤동주가 주인공인 영화(‘동주’)도 제작하지만, 그때까지 윤동주 시인은 근대문학사에서 미미한 존재였다. 윤동주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본 연구도 당연히 없었다. 마광수는 윤동주 시를 한두 편 들여다보는 수준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발견했다. ‘(윤동주 작품 중엔)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된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볼 때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 세계다.’ (‘윤동주 연구’)

마광수는 윤동주 생애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일제강점기 나약한 식민지 지식인에게서 내면의 갈등을 시어로 승화한 문학투사의 면모를 재발견했다. ‘윤동주의 저항은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윤동주 연구’) 한번이라도 윤동주 시가 마음에 와 닿은 이라면 마광수에게 빚을 지고 있는 이유다. 문학수업 시간, 서늘하게 아름다운 ‘서시’, 고뇌를 세련되게 정제한 ‘자화상’을 접할 수 있는 데는 마 교수의 공이 꽤 크다.

왜 윤동주였을까. “그냥 좋았다” 생전에 그가 밝힌 이유다. 모교 선배(연희전문)였다는 점도 한몫했을 터다. 마 교수는 학창 시절 교정에 서 있는 동주 시비를 자주 찾았다. “시비를 보며 ‘당신처럼 이해하기 쉽게 쓰겠다. 구어체로 쓰겠다’고 생각했다.”

1992년 강의 도중 긴급 체포됐다. 1991년에 낸 소설 ‘즐거운 사라’ 때문이었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의 삶은 교수직 면직, 복직의 연속이었다. 마 교수 스스로 ‘정년퇴임하는 게 기적’이라 표현했을 정도다. 빈소에 하나둘 마 교수의 제자들, 후배들이 모여들었다. 교수도 여럿이다. 김성수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김유중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문단에선 하재봉 시인, 김별아 소설가(연세대 국문과 졸업)가 보였다. 윤여창 영화감독은 운구할 남자 제자들을 모으느라 바빴다. 이들은 25년 전에도 마 교수 곁에 있었다. 연세대 제자들은 서초동으로 몰려가 시위를 했다. 1995년에는 공판 기록을 꼼꼼히 모아 ‘마광수는 옳다’는 제목의 백서도 냈다. 2000년 재임용 탈락이란 형식으로 연세대가 마 교수를 해임했을 땐 거세게 항의해 스승이 강단 위에 머무를 수 있게 지켜줬다.

1994년 연세대에서 강의 중인 마 교수. 이듬해 면직됐다. ⓒphoto 연합
1994년 연세대에서 강의 중인 마 교수. 이듬해 면직됐다. ⓒphoto 연합

시인의 마지막 말은 “친구야 와줄래?”

빈소에 온 이들이 실질적으로 마 교수의 마지막 제자다. 복직 후 강단에 설 순 있었지만 제자를 키울 순 없었다. 전공과목 강의를 맡지 못해서다. “집필과 강의 중 하나만 고르라면 강의를 택할 분이었다. 학생들 가르치는 걸 그 정도로 좋아했다.” 하재봉 문화평론가가 옆에서 말했다. 청하출판사 편집위원과 문단 후배 등 마 교수와 여러 인연을 맺은 그다. ‘즐거운 사라’가 나온 곳이 바로 청하출판사다. 교수사회의 집단따돌림, 마광수의 경우는 유난히 지독했다. 국문과 교수들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절반은 질투, 절반은 교수사회 특유의 완고한 보수성 탓이다.” 정신과 치료, 만성적 우울증, 모교에 버림받았다는 슬픔. 인터뷰 중에도 마 교수는 학교에서 겪은 일을 언급하며 괴로워했다. 특유의 자조적이고 위트 있는 말씨, 온몸에서 풍겨오는 악의 없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상처가 그토록 깊었음을 알아보지 못한 건.

빈소 한가운데엔 마 교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성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마 교수의 대광고 동기들이다. 대광고는 서울 안암로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다. 동기회장 이종홍씨는 그 속에 섞여 있다, 제단 앞에 섰다 안절부절못하며 빈소를 돌아다녔다. 우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는 유족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 빈소에 왔다. 마 교수가 세상을 떠나기 전 찾은 사람이 바로 이씨다.

“아침 11시30분쯤이었나, 광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이촌동에서 3학년 1반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알려줬다. 일부러 광수 집 근처에서 모이기로 한 거다. 한 시간 후에 다시 광수한테 전화가 왔다.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하더라. 일산 집을 나와 이촌동으로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광수가 목을 맸다고.”

삶의 마지막 즈음, 마 교수 곁엔 고등학교 동기들이 있었다. 작년 8월 퇴임 직후 부쩍 우울해하는 친구에게 이씨는 매일 아침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라’ 아침마다 전화했다. 광수는 매일 후회했다. ‘내가 왜 그런 걸 써서 이렇게 됐나’ 매일매일 후회했다. 거기서 벗어났어야 했는데…. 처음엔 나무라 보기도 했다. 나중엔 ‘잘하고 있어, 네가 잘한 거야’ 다독였다.” 그는 기자에게 물었다. “내가 광수에게 괜한 말을 했나. 토요일에 친구들 모임이 있다고 괜히 말했나. 아침에 통화하며 혹시 뭔가 잘못 말한 게 아닐까.” 그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게 아니라고,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반박해줘야 할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토록 좋아하던 강단에서 떠난 탓일까. 마 교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시들었다. 이씨의 말이 이어졌다. “술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마시더라. 지난주부터였다. 울화가 난다고 윗도리를 벗고 있기도 했다. 지난주 금요일엔 의사가 광수한테 입원하라 했다. ‘젊은 의사 말 못 믿겠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니 광수가 그때 의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잘 모르겠다. 오늘도 술을 마셨다더라. 쉬겠다고 방으로 들어간 게 마지막이었다.”

죄책감이라면 기자에게도 있다. 지난해까지 각계 인사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를 썼다. 예술서, 철학서, 역사서가 나름의 질서로 꽂혀 있는 서가를 들여다보며 ‘이러이러한 인터뷰 기사를 연재 중’이라고 말했다. 마 교수는 얼른 “나 그 인터뷰 할 거야. 해야 해”라고 답해주셨다. 몇 가지 사정상 하지 못했다. 정말 죄송한 건 따로 있다.

‘즐거운 사라’는 지금도 판매금지 도서다. 관련 정부 부처, 법조인들에게 해결방법을 물었다.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현실적인 방안은 일단 국민권익위원회에 고충민원을 내는 거였다.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책을 내줄 출판사도 있을 것 같았다. 본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마 교수는 즉시 거부했다. 반사적이다시피한 반응이었다. 지난해 말, 혹은 올해 초 일이다. 빈소에서 이때의 얘기를 꺼냈다. 하재봉 평론가는 “‘사라’ 때문에 구속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한 이들에겐 너무나 큰 충격인 것 같더라.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구속된 장정일 작가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판매금지 중인 ‘즐거운 사라’

최용범 페이퍼로드 대표가 보였다. 마 교수는 최근 몇 년간은 책을 내줄 곳을 찾아 출판사를 떠돌았다. “이젠 책을 안 내줘. 팔려야 말이지.” 2년 전 인터뷰 때였나, 마 교수가 남 얘기 하듯 꺼낸 말이다. 최 대표와 마 교수는 오랜 인연이 있다. ‘월간 사회평론 길’이 마 교수의 소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연재하던 시절부터다. 당시 최 대표는 ‘사회평론 길’의 기자였다. “마 교수 글의 정수는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 이번엔 니체에 대해 써보시죠’ 권하면 ‘내가 뭘 아나’ 답하시곤 했다.”

김성수 교수는 스승의 대표작으로 ‘상징시학’을 꼽았다. “얇은 이론서인데 탁월하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이 두 권엔 교수님의 사상과 생각이 다 담겨 있다. 교수님이 21살, 22살 즈음에 쓰신 논문들도 참 좋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네요.” 윤여창 감독이 말했다. 165㎡(50평) 남짓의 접객실은 적당히 붐볐다. 하나둘 일어서는 사람이 보였다. 윤 감독의 말이 맞는다면 2017년 9월 5일 밤 10시30분, 순천향대병원 7호실에서 우리가 보고 있었던 건 어느 시대의 뒷모습일까. 10년 후쯤 이렇게 회고할 수 있다면 좋겠다.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달랐던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시대, 권위주의를 향한 몇 번의 삿대질에 사회적 사형을 선고한 시대, 천재가 인기마저 얻자 패거리로 달려들어 인격살인을 한 시대가 마광수와 함께 스러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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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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