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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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리에 충실한 원칙주의자’.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며 2월 5일 석방 결정을 내린 서울고법 형사13부 정형식 재판장에 대한 주변의 평가다. 그는 온화하고 점잖은 성격이지만 재판에서는 법리 판단이 세밀하다고 알려져 있다.

정형식 부장판사는 서울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서울가정법원,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거쳐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및 수석부장판사 등을 지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인 민일영 전 대법관과 동서지간이며, 박선영 전 국회의원이 처형이다. 2014년 서울고법으로 발령 난 뒤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소속 변호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2015년 법관평가’에서 우수 법관으로 꼽히기도 했다.

“야간에 재판하지 않겠다”

그런 그가 이 부회장의 첫 재판에서 한 말은 “야간에 재판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쟁점이 복잡하고 기록이 방대한 사건이어서 재판장의 효율적인 소송 지휘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특검과 변호인단에는 “한두 마디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끝나야지 계속 공방이 오가는 것은 앞으로 허용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항소심 재판은 지난해 9월부터 4개월에 걸쳐 모두 17차례 열렸다. 그는 종종 “원하는 답변이 나올 때까지 질문하지 말라” “의견과 신문을 혼동해 질문하지 말라” 같은 일침을 놓으며 군더더기 없는 진행을 했다.

그러나 선고에 쏟아지는 관심과 함께 정 부장판사를 향한 도를 넘는 ‘신상털이’ 현상도 벌어졌다. 지난 2월 5일 저녁부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정형식 판사를 파면하라’는 게시글이 수백 건 올라오기 시작했고, 관련 기사에는 ‘적폐 판사’ ‘삼성 장학생’ 같은 비난 댓글이 이어졌다. 급기야 이튿날 서울고법 정문에 찾아와 ‘개 사료’를 뿌린 사람도 있었다. ‘재벌 봐주기 판결’이란 지적과 ‘소신 판결’이란 평가가 뒤섞이며, ‘정형식’이란 이름은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순위를 오르내렸다.

지난 2월 6일 오후 기자가 서울고법 형사13부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30여년 판사 생활의 경험이 이번 재판에 녹아들어 있었을 것이다. 한껏 짊어졌던 부담을 내려놓은 듯, 정 부장판사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파면하라’는 국민 청원이 쏟아진다는 얘기부터 꺼내자 그는 “그런 비난들을 알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 생각이 정리되면 판결에 대해 담담히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믿습니다.”

그는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번 재판을 하면서 없던 머리카락이 더 빠진 것 같다”고 했다.

“법리야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니,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결국 양형(量刑), 이재용 부회장을 풀어줘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었지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게 1심은 이른바 ‘묵시적 청탁’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의 민원 현안인 승계 작업 청탁을 ‘알아서 헤아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돼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항소심은 뇌물죄의 전제 조건인 묵시적 청탁, 그 대가에 해당하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뇌물의 상당 부분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없게 됐다.

정 부장판사는 “1심에서 법리적으로 문제가 된 부분들을 걷어내고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의 석방 여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했다”고 했다. 항소심은 최씨 딸 정유라씨에 대한 삼성의 승마 지원 금액 36억원만 뇌물로 인정했다. 애초에 특검이 기소한 수백억원대 뇌물 규모에 비하면 적지만, 그 자체로 보면 거액이다.

“사안의 본질에 주목했다”

그는 “사안의 본질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정치와 자본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봤던 원심과 달리, 항소심은 이 부회장의 범행을 ‘대통령의 겁박과 질책에 저지르게 된 뇌물 사건’으로 규정했다. 사건 구도가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의 압박에 의한 ‘요구형 뇌물’이었다는 점은 집행유예 선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결정은 실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사건의 성격을 고려해 석방을 결정했다”고 했다. “어느 기업인이 대통령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렇다고 이 부회장이 건넨 금액의 ‘뇌물 성격’이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이 점을 두고 배석판사들과 무수한 고민을 했습니다.”

여권 정치인들은 정 부장판사를 일제히 공격했다. 그가 2013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을 선고했던 일이 맞물리면서 비판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2월 7일 당 회의에서 “이재용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은 사법부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판결로 기록될 것”이라며 “상식을 깨뜨린 황당한 재판은 ‘신(新)판경(判經) 유착’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했다. 박범계 최고위원도 이 자리에서 “재판장 한 사람 취향에 따라 이뤄진 널뛰기 재판”이라고 했다. 안민석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재판정을 향해 침을 뱉고 심은 심정”이라며 “지나가는 개도 웃고 소도 웃을 판결”이라고 했다. 박영선 의원은 라디오에 나와 “삼법(삼성과 법관) 유착”이라고 했다. 정청래 전 의원은 이 부회장 항소심 선고 당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재판이 아닌 개판’이라며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암약하는 적폐는 그대로’라고 했다. 정 부장판사는 “예전에 선거 사건을 담당하면서 국회의원 재판을 많이 했었다”며 “정치 성향이나 여론을 보고 재판하지 않았다는 건 과거 판결문이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2012년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원혜영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는 무죄를 선고한 적이 있다. 2014년 솔로몬저축은행에서 4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이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항소심 재판에서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에 반대하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트린 혐의로 기소된 김선동 통합진보당 의원에게는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징역형을 선고했다.

“선고 당일 저녁 마침 법원연구회 모임이 있어 동료 판사들과 두루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판결의 내용을 떠나서 부담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석방 결정에 대해서는 법조인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 어려웠습니다. 이번 재판은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2월 7일부터 이틀간 연차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법원 안팎에선 “지나친 관심에 정 부장판사가 부담을 느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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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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