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운데)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0억원 기부를 약정했다. ⓒphoto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난 3월 8일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운데)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0억원 기부를 약정했다. ⓒphoto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앞으로 3년간 개인지분을 처분해 1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배달의민족’ 창업자인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지난해 10월 페이스북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두 달 동안의 안식휴가를 끝내고 업무 복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김봉진 대표의 기부소식이 들려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공동모금회)에 50억원 기부를 약정한 것이다. 공동모금회에는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가 있다. 김 대표는 ‘아너 소사이어티’의 1811번째 회원이 됐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이처럼 거액을 기부할 때는 보통 재단을 만든다. 하지만 김 대표는 재단 대신, 재단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한국형 기부자조언기금(DAF·Donor Advised Fund)’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50억원 규모의 고액 기부자조언기금이 탄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5년 말 페이스북 지분의 99%를 기부한다고 공개한 마크 저커버그 사례에서 보듯, 벤처기업의 성공으로 젊은 부자가 늘면서 미국에선 수년 전부터 (예전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적극적으로 기부하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이 같은 분위기가 한국에도 생겨날까.

재단 대신 재단처럼 기부하는 ‘펀드’

김봉진 대표는 100억원의 절반 정도를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어 했다. 그는 미술대를 가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전문대를 나와 나중에야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얻어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다. 서른 초반에 개인사업을 하다 실패해 전세금까지 잃고 감당하기 힘든 큰 빚을 지기도 했다. 그는 “감사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며 “다 늦게 은퇴하고 죽기 전에야 사회에 환원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해서 기쁨과 변화를 느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동모금회 김효진 모금사업본부장은 “김봉진 대표가 처음에는 재단을 만들려고 했는데, 만드는 절차도 무척 까다롭고 연간 사업비 규모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재단 직원 인건비 등을 따져봤을 때 큰 사회적 임팩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통상 100억원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 경우, 이자율에서 인건비 등을 제외한 2% 정도를 사업비로 본다면 사업 규모가 2억원에 불과하다.

“네 번 방문해 대화를 나눴어요. 김봉진 대표는 원금은 소진돼도 상관없으니 아동·청소년을 위한 교육사업에 잘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재단 대신 재단의 효과를 내는 ‘기부자조언기금’을 추천했더니, 고민 끝에 이것을 선택했어요.” 김 본부장의 말이다.

기부자조언기금은 굳이 재단을 설립하지 않아도 재단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기부 펀드’라고 보면 된다. 금융회사에 이 펀드를 맡긴 후 운용수익을 내고, 그 수익금으로 기부자가 원하는 사업을 한다. 기부자 입장에선 세제 혜택도 받고, 원하는 사업도 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미국의 기부자조언기금은 28만5000개에 달하며 기부금액만 해도 230억달러(24조원)나 된다.(2017 DAF 리포트) 우리나라의 웬만한 부처예산(2018년 산업·중소기업 예산은 15.9조원)보다 더 많은 금액이 이 기금으로 모이는 셈이다. 물론 미국에선 수백억, 수천억원짜리 기금이 많아, 금융회사가 이를 운용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은행·증권 등에서 낯선 기부상품을 잘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이번에 김봉진 대표의 기금도 모금회가 직접 안정적인 예금에 넣어 기금을 관리한다.

김봉진 대표가 만든 기금의 이름은 ‘우아한 영향력 선순환 기금’. 김 본부장은 “재단 이사회를 꾸리듯 기부자가 추천한 10명의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뜻에 동참한 신병철 박사(배달의민족 최고자문위원)도 이 기금에 1억원을 보탰다”고 밝혔다. ‘우아한 영향력 선순환 기금’은 향후 5~10년 안에 아동·청소년 교육사업을 통해 원금을 모두 다 쓰는 게 최종 목적이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등 벤처 1세대 5인방이 만든 ‘C프로그램’도 기부가 바탕이지만 유한회사를 만들었듯, 기부의 혁신을 바라는 이들은 재단이 아닌 다른 형태를 선호하는 분위기다. 왜 그럴까. 재단의 경직성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재단을 설립하려면 최소 몇십억원의 기본자산을 출연해야 하고, 각 부처에 등록을 해야 한다. 목적사업을 하나라도 추가·변경하려고 하면 부처로부터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지난해 300억원을 출연해 재단을 준비했던 A기업 회장은 필자에게 “정부 부처 한 곳을 몇 달 동안 찾아갔는데 귀찮아하며 ‘제발 자신의 부처에서 안 만들면 안 되느냐’고 해서, 그 부처가 아닌 다른 부처 소속으로 재단을 설립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단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힘든 건, 실제 운영하는 것이다. 최근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2017년 배당금 16억원을 미래에셋박현주재단에 기부했다. 2010년부터 매년 배당금을 기부해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기부 액수를 따져 보니 총 216억원이나 됐다. 하지만 박현주 회장처럼 매년 개인 배당금을 기부하는 사례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소위 ‘무늬만’ 혹은 ‘유명무실한’ 재단도 상당수 존재한다. 아름다운재단의 ‘민간공익재단 기초연구’(2012)에 따르면, 4582개의 재단 중 33.2%만 국세청 공시를 하고 있었다. 또 36.9%만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고, 60% 이상이 공익재단 운영과 현황에 대해 공식 접근할 자료가 없었다. 운영이 그만큼 영세하다는 뜻이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공시된 공익법인 8993개의 총 자산은 238조4702억원으로 200조원을 훌쩍 넘는다.(2016년 기준, 한국가이드스타) 삼성생명공익재단(2조1066억원), 아산사회복지재단(1조9512억원), 현대차정몽구재단(8273억원), 삼성꿈장학재단(8189억원), 아산나눔재단(6209억원) 등 자산규모가 상당하다. 재단법인들의 금융·건물 자산을 합치면 20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재단법인 수 대비 평균자산을 보면 179억원으로 대폭 감소한다. 초대형 재단과 초소형 재단의 양극화가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재단은 합병이나 청산 절차도 까다롭다. 현행법에 따르면, 재단을 청산하려면 성실공익법인에 기탁하거나 국고로 귀속해야 한다. 실컷 좋은 일 하려고 기부했는데 국고로 귀속되는 걸 기부자들은 싫어한다. 김 본부장은 “기부자조언기금은 재단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잠재 고액기부자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며 “운용이 잘 안 되는 중소형 재단에 기부자조언기금으로 자산을 기탁할 수 있도록 확산해 볼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가 지난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photo 뉴시스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가 지난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photo 뉴시스

공익신탁으로 범죄 피해자 돕기도

재단 대신 재단의 효과를 얻는 상품 중에는 ‘공익신탁’도 있다. 공익신탁은 은행에서 예·적금에 가입하듯 기부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나만의 재단’을 만들 수 있다는 콘셉트다.

‘스마일공익신탁’은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소외된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공익신탁이다. 이 신탁은 원래 2016년 4월 법무부 직원들의 기탁금 3000만원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검찰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일반 국민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해 2018년 1월 말 기준 3억4000만원이 모였다. 살인·강도·성폭력·아동범죄 등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기부하고 싶으면 KEB하나은행 전국 지점 중 원하는 곳에 신분증과 도장을 갖고 간 후, ‘범죄피해자지원 스마일공익신탁’ 가입신청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 각 기부자마다 개별계좌가 만들어져, 이 계좌들은 하나의 펀드로 운영이 된다. 펀드운영 수익금과 기부금 원금을 합해 범죄피해자들을 지원한다. 지금까지 ‘스마일공익신탁’을 통해 범죄피해자 43명에게 1억8080만원의 생계비와 학자금이 지원됐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2018년 3월 말 기준 공익신탁상품은 17개로, 149억원 규모가 설정돼 있다”며 “발달장애인 교사가 작년 5월 발달장애인의 취업지원을 위한 공익신탁을 설정하기도 했다. ‘한비야의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 등 유명인사가 만들고 그 뜻에 동참하는 형태의 다양한 공익신탁이 있다”고 말했다.

공익신탁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다양하게 디자인돼 운영된다. 가수 이승철은 아프리카 어린이의 교육과 치료를 돕는 리앤차드(Lee&Chad)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팬들도 쉽게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승철의 희망 리앤차드 공익신탁’을 설립했다. 연기자 홍은희도 소아질환을 앓는 어린이들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분당서울대병원과 월드비전의 ‘난치성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에 참여하고 있다. 야구인 허구연(한국야구위원회 야구발전위원장)씨가 만든 ‘허구연의 야구사랑 공익신탁’은 야구를 매개체로 국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고 해외 저개발국의 야구인 지원을 위한 인프라 확충에 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 상담 과정을 통해 공익신탁을 만든 일반 고객도 있다. 공익신탁은 지정기부금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원하는 목적사업에 쓰이는 것은 일반 기부와 똑같다. 배정식 센터장은 “크게 확대되지는 못했지만, 가까운 금융기관에서 다양한 목적의 공익신탁을 골라서 가입하면 세제 혜택도 받을 뿐 아니라, 집행 후 처리내역이 법무부 공익신탁시스템에 공시되어 있어 투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고액기부자들의 실용적인 기부 흐름은 대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월 한양대에선 ‘휴온스 팹랩(FABLAB·이하 팹랩)’ 개소식이 열렸다. 팹랩은 제작(Fabrication)과 연구소(Laboratory)의 합성어로,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디지털 장비로 구현할 수 있는 실습공간이다. 곧바로 시제품을 만들고 창업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간이다. 윤성태 휴온스글로벌 부회장은 이 팹랩을 위해 10억원을 기부했다. 공간 내부에는 고가의 3D프린터를 갖춰놓았고 3D프린터룸, 메이킹룸, 공학입문설계 스튜디오, IoT룸 등이 있다. 안종길 한양대 대외협력팀장은 “예전에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걸 원하는 사례가 많았다면, 지금은 교육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비해 대학의 변화가 좀 느리다 보니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기자재나 연구시설, 콘텐츠 등에 지원하고 싶어 하는 고액기부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네이버 공동창업자이자 한게임 대표를 지낸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 또한 지난 연말 고려대 안암캠퍼스 창의·창업 전용 공간인 ‘파이빌(π-Ville99)’과 사회 혁신 리더 양성을 위한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에 각각 1억원씩 기부했다. 김정호 대표는 현재 발달장애인을 190명 남짓 고용한 사회적 기업가다.

기부금 10억원으로 만든 한양대 팹랩. 최근 대학에 고가 설비 등을 지원하는 기부자가 늘고 있다. ⓒphoto 한양대
기부금 10억원으로 만든 한양대 팹랩. 최근 대학에 고가 설비 등을 지원하는 기부자가 늘고 있다. ⓒphoto 한양대

기부와 금융상품의 결합 중요해

전현경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은 “초고액기부자의 경우 요구사항이 많고 까다로운 반면, 기부 경험이 부족해 운영단체와 갈등을 겪기도 하기 때문에 상호간의 기대치를 조정하는 등 운영 전문성이 필요하다”며 “기부자조언기금을 5억원부터 할지, 10억원부터 할지, 기준부터 앞으로 논의해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미국처럼 초고액기부자들을 대상으로 금융상품과 연계한 다양한 ‘기부상품’이 만들어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의 경우, 기부총액 3900억달러(417조원) 중 개인 기부가 72%에 달한다.(Giving USA 2017)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양한 기부 상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금융회사와 연계돼 있고, 세금 혜택도 떼놓을 수 없다. 기부자조언기금뿐 아니라, 기부연금(개인이 현금이나 자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여생 동안 연금 형태로 일정 소득을 보장받는 형태)이나 기부보험도 활발하고 유산기부도 많다.

한국모금가협회 황신애 이사는 “우리나라는 원금보전 개념이 무척 강해서 기부금을 투자하거나 운용하기엔 한계가 많다”고 말했다. 황필상(71) 전 수원교차로 대표는 전 재산을 구원장학재단에 기부하려다 200억원이 넘는 증여세·가산세 폭탄을 맞았고, 7년 동안 세무당국과 소송을 벌이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이 차일피일 미뤄지며 한때 수백억원대 자산가이던 그는 살던 아파트까지 압류당했다.

아직 한국에서는 금융과 결합된 기부상품이 드물고, 은행이나 증권 등도 큰 관심이 없다. 2012년 보건복지부에서 계획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부자조언기금을 신한은행과 함께 마련했고 제1호 출연자가 생겼지만 그 이후 흐지부지된 것도 은행권의 비협조가 영향을 미쳤다. 황신애 이사는 “주식이나 부동산 기부 등 초고액기부자들의 다양한 기부를 유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산기부 지원센터’ 모델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란희 공익플랫폼 ‘더퍼블리카’ 대표, 전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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