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시니어모델 양성기관 제이액터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천황성씨(61·맨 왼쪽)와 소은영씨(74·왼쪽 두 번째).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서초구 시니어모델 양성기관 제이액터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천황성씨(61·맨 왼쪽)와 소은영씨(74·왼쪽 두 번째).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어깨 펴고! 당당하게! 웃으세요! 자신감 있게!”

마이크를 잡고 호통 치는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워킹 연습을 하는 모델 지망생들. 앞뒤, 옆 모두 거울이 둘러진 벽이나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만 보면 수퍼모델들이 연습하는 곳인가 하겠지만 학생들 면면이 낯설다. 교실 밖에 나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들을 60~70대 노인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우아하게 자세를 잡고 있다.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인근에 있는 시니어모델 교육기관 제이액터스에서 워킹 연습을 하고 있는 시니어모델 지망생들이다.

시니어모델 혹은 실버모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직업은 패션쇼나 패션브랜드의 모델로 활약하는 60~70대 이상 노인세대 모델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이라면 짧게 깎아 파마한 머리에 원색의 체형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니어모델 수업을 듣고 있는 노인들의 뒷모습만 보면 나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몸에 착 달라붙어 레이스로 장식한 원피스며 시크하게 소매가 부풀려진 흰색 셔츠에 하이웨스트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깨나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73살 소은영씨는 이 중에서도 돋보이는 ‘선배’ 모델이다. 2년 전 처음 시니어모델 세계에 입문한 그는 2017서울패션위크 박종철 디자이너의 무대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니어모델로서 런웨이를 밟았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남성 모델 한현민도 이 무대에 함께 섰다. 2001년생인 한현민과 소은영씨의 나이 차는 무려 54년이다.

“얼마나 떨리던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청심환도 한 알 먹었어요. 그래도 다리가 떨리고 몸이 움츠러들더라고요. 이러면 안 되지, 어깨를 펴고 ‘나는 나이가 많지만 당당하고 아름답다’ 속으로 되뇌면서 길고 긴 무대를 걸어 다녀왔어요. 쇼가 끝나고 무대 뒤에서 한숨 돌리는데 남편과 딸들이 달려와서 자랑스럽다고, 너무 아름다웠다고 토닥여주더군요.”

서울패션위크 경험을 되살려 이야기하는 소은영씨의 말투는 마치 여배우가 말하듯이 나긋나긋했다. 원래 패션이나 연기 쪽의 일을 했던 것이 아닌지 물어봤다.

“평생 아이 셋을 기르면서 가정주부로 살았어요. 결혼 전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기는 했죠. 하지만 엄한 가정환경과 힘든 육아에 지쳐 꿈꿀 새도 없이 살았어요. 그러다가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를 위해 해낸 것이 무엇이 있었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도 60대가 넘어 흔히 말하는 ‘제2의 인생’을 사는 노인세대를 보면 연령별 특징에 맞는 직업을 찾곤 한다. 모델이라는 것은 젊은이의 전유물일 뿐 노인들이 접근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소은영씨를 발탁해 키운 제이액터스 정경훈 대표는 노인세대 인구가 젊은 인구를 초월한 요즘에도 노인세대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우리는 60~70대만 돼도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백세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60~70대 노인들은 이제 막 인생의 반환점을 돈 분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어요. 노인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 패션 브랜드의 모델도 젊은 사람들이잖아요. 노인은 늙고 고루할 거라는 편견, 그런 편견을 깨고 활기차고 아름다운 노인을 대표할 수 있는 게 바로 시니어모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액터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20명 가까운 모델 지망생을 훑어보면 대개 노인에 대해 가질 법한 선입견에 걸맞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나름대로 한껏 꾸민 복장에서는 젊음까지 느껴질 정도다.

노인세대의 셀러브리티

이런 노인들을 일컫는 용어가 따로 있다.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 백발이라는 뜻의 그레이(grey)에 르네상스(renaissance)를 합친 용어로 미국을 중심으로 10여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다. 미국의 패션 전문지 BOF의 에디터 빅토리아 베레즈나는 그레이네상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젊은 세대의 셀러브리티(celebrity)처럼 영향력을 갖춘 60~70대 노인들이 젊은 세대와 다름없는 감각으로 사회의 선두에 나서는 모습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유튜브에서 45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브 스타 박막례씨는 그레이네상스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70살이던 지난해 1월 처음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는데 갖가지 화장품으로 화장하는 이른바 ‘뷰티 영상’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SNS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 젊은 세대의 유행과 아이템에도 관심을 가지고 수용하는 모습에 젊은 유튜브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1927년생으로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시니어모델로 꼽히는 박양자씨도 그레이네상스의 아이콘이다.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런웨이에서 당당하게 워킹하는 박양자씨를 닮고 싶어 시니어모델계에 입문한 사람도 많다.

외국에는 그레이네상스의 사례가 될 만한 사람이 더 많다. 대개는 패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미국 뉴욕의 포드햄대학교 교수 린 슬레이터가 대표적이다. 올해로 64살인 그는 뉴욕의 패션쇼장 밖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 하나로 패션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당시 뉴욕패션위크가 열리는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의 멋스러운 모습을 보고 패션쇼 취재차 참석했던 기자 중 일부가 패션계의 중요한 인물로 착각해 사진을 찍으면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우연의 아이콘(Accidental Icon)’이라는 패션 화보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한 린 슬레이터 교수는 금세 패션계의 실버 아이콘이 됐다. 스페인에서 시작한 패션 브랜드 망고(Mango)는 2017년 봄·여름 시즌 메인 모델로 린 슬레이터 교수를 기용했다.

미국의 화장품 브랜드 커버걸(Cover Girl)은 사상 최초로 노인을 브랜드 모델로 기용했다. 미국의 전기차 생산업체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인 메이 머스크다. 1948년생인 그는 50년 넘게 모델 활동을 해온 베테랑 모델이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 모델 활동을 못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이가 들고 나서 더 유명해졌다. 나이 든 사람의 아름다움을 대변하고 젊은 세대에 그것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사례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최고령 모델로 1928년생인 다프네 셀프는 탱크 매거진, 1931년생인 카르멘 델로피체는 뉴유 매거진의 표지모델로 나섰다. 조안 디디온은 80세가 되던 2015년 유명 패션 브랜드 셀린의 메인 모델로 발탁됐다. 같은 해 가수로 잘 알려진 1943년생 조니 미첼은 생로랑의 얼굴이 됐다.

미국이나 유럽의 패션 업계에서는 이렇게 그레이네상스, 노인세대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모델을 찾는 일이 점점 늘고 있다. 이는 노인들의 구매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KOTRA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 즉 1946년부터 1964년까지 태어난 노인세대의 구매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인세대가 주요 고객층이던 건강과 복지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의 노인세대의 구매력은 연애, 취미활동, 야외활동 등 보다 활기차고 역동적이며 관계적인 분야에서 이뤄진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구매력 있는 노인층을 ‘골드실버’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KOTRA 이정선 덴마크 코펜하겐 무역관 차장은 “덴마크의 골드실버 세대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품을 구매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50~6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화장품시장이 매우 커지고 있는데 이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도 마찬가지다. 2019년이 되면 50세 이상의 여성 인구가 전체 여성 인구의 5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그만큼 화장품시장에서의 소비력도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시세이도나 가네보 같은 일본 화장품 브랜드는 아예 50대 이상 여성을 위한 제품을 새로이 개발해 출시하고 있다.

그레이네상스를 대표하는 린 슬레이터 교수. ⓒphoto Accidental Icon
그레이네상스를 대표하는 린 슬레이터 교수. ⓒphoto Accidental Icon

노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다

한국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모바일 쇼핑 시장에서 50~60대가 40~5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마트에 따르면 2017년 10월을 기준으로 모바일 쇼핑 앱을 사용한 고객 중 60대 이상 고객의 비중이 41%까지 늘었다. 60대 이상의 노인들 중 능숙하게 IT 기기를 사용하는 ‘IT 실버’ 세대도 구매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60대 이상 노인세대는 예전의 노인세대와 다르다. 사고방식도 소비패턴도, 삶의 계획도 바뀌고 있다. 시니어모델을 교육하는 제이액터스에서도 흔하지 않은 남성 시니어모델, 1957년생 천황성씨가 그렇다. 천씨는 한때 군인이었다. 군을 제대하고 나서 사업을 하느라 평생 모르고 살았던 내면의 꿈을 발견한 것은 60살이 지나서의 일이다.

“셔츠에 스카프 하나 두르고 다니고 자세와 말투에도 신경 쓰는 제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농담 삼아 ‘모델이라도 하라’고 곧잘 말했습니다. 어느날 문득 ‘왜 내가 모델을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찾아보니 남성들도 시니어모델로 일하더군요.”

남성 모델도 낯설어하는 사람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시니어 남성 모델은 더욱 낯선 존재다. 천씨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남성 시니어모델의 선두주자’라고 표현했는데 말 그대로 남성 시니어모델이라는 직업 자체가 생경한 현실을 짚어내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제 주변에도 피부관리에 관심 많고 몸매를 가꾸어 멋지게 살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우리가 왜 못 할까요? 저는 예순 넘은 할아버지도 멋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저부터 저를 가꾸고 있죠. 요즘은 아침마다 피부관리 기계로 얼굴을 다듬고 있습니다. 걸어다닐 때는 어깨를 펴고 곧은 자세로 당당하게 걸으려고 노력하죠.”

제이액터스의 정경훈 대표는 이런 시니어모델이 앞으로 한국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거라 장담했다.

“노인들을 위한 화장품 광고를 젊은 배우가 나와서 하고, 노인들이 입을 코트를 풍채 좋은 30대 모델이 하는 사회는 ‘노인을 숨기는 사회’일 겁니다. 노인들에게는 노인들이 보고 닮고 싶어하는 아이콘이 필요해요. 여전히 아름답고 당당하고 활기찬 노인 말이죠. 노인이 닮고 싶은 노인이 전면에 드러나고 늘어나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노인에 대한 편견도 바뀔 겁니다.”

정 대표가 시니어모델 교육기관을 세우고 나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경험이 있다. 한 자선패션쇼에 선 시니어모델의 딸이 패션쇼가 끝나자 무대 뒤에서 엄마를 끌어안고 울던 장면이다.

“엄마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인 줄 몰랐다며 우는데 저까지 울컥했습니다. 아름다운 노인이 늘어나고 그 노인을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레이네상스 시대가 얼른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키워드

#사회
김효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