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일본 도쿄돔의 5만여 관중 앞에서 공연을 펼친 방탄소년단. ⓒphoto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지난 11월 13일 일본 도쿄돔의 5만여 관중 앞에서 공연을 펼친 방탄소년단. ⓒphoto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지난 11월 8일, 일본 도쿄의 가장 번화한 거리 시부야 한복판에 있는 음반 매장 ‘타워레코드’ 앞. 일본 최대 규모의 음반 판매 회사인 타워레코드의 본점인 시부야 매장은 8층 건물 전체에서 음반을 판매하는, 일본 음반시장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일본 내에서 한류가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곳의 몇 층, 어느 곳에 한국 가수의 음반이 전시되는지를 두고 한류 인기를 분석하는 보도도 있을 정도였다. CD 등 실물 음반시장의 규모가 줄어든 요즘에도 여전히 타워레코드 1층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어느 가수의 음반이 전시되는가를 보면 일본 대중음악 시장의 판도를 알 수 있다.

이날은 세계적 팝스타가 된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둘러싼 논란이 생긴 날이었다. 하루 전인 11월 7일, 방탄소년단은 일본에서 아홉 번째 싱글 ‘페이크 러브/에어플레인 파트 투(FAKE LOVE/Airplane pt.2)’를 발매했다. 이어 9일 일본의 대표적 음악방송 중 하나인 TV아사히의 ‘뮤직스테이션’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인 8일 갑작스럽게 방탄소년단의 뮤직스테이션 출연이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뮤직스테이션 측은 “이전에 한 멤버가 착용한 티셔츠 디자인이 파문을 일으켜 일부에서 보도”된 탓이라고 밝혔다.

논란이 된 부분은 방탄소년단의 멤버 지민이 지난해 월드투어를 하면서 입었던 이른바 ‘광복절’ 티셔츠다. 티셔츠는 유튜브에 공개된 방탄소년단의 다큐멘터리 ‘번 더 스테이지(Burn the Stage)’에서 몇 초간 노출됐다. 이 티셔츠에는 영어로 애국심, 우리 역사, 해방, 코리아 같은 단어가 적혔고 원폭이 투하된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지난 10월 26일 우익 성향의 ‘도쿄스포츠’가 이 티셔츠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이다/한국 인기 그룹 방탄소년단의 ‘반일 활동’이 한국에서 칭찬받고 있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는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과거에 트위터에 남긴 글도 함께 ‘반일 활동’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담겼다. 곧바로 혐한·우익 성향의 매체들이 보도를 이어나갔다. 방탄소년단의 방송 출연이 취소되고 콘서트를 중지하라는 인터넷 게시글이 이어졌다.

시부야 타워레코드 앞의 광경

그러나 시부야 타워레코드 앞의 일본인들에게서 ‘혼란’과 ‘혐한(嫌韓)’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앨범이 발매된 지 하루가 지났고 밤으로 접어드는 저녁 시간이었지만 타워레코드 앞에는 구입한 방탄소년단 앨범을 손에 든 일본인 여성 수십 명이 흩어져 서 있었다. 직장인 마루야마 사츠키씨는 CD 3장을 구입하고서는 타워레코드 입구 앞 인도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다. “방금 트위터를 통해 방탄소년단의 (김포공항) 출국이 취소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공항에 마중 나가 있는 친구가 화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TV아사히의 결정이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요즘 일본 TV를 보면 전부 한국 얘기예요. 역사 문제를 끌고 와서 방탄소년단을 깎아내리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요. 요즘 방탄소년단 인기가 최고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일주일 뒤인 11월 13일 발표된 일본 음반 차트,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에서 방탄소년단은 1위를 차지했다. 13일과 14일에 걸쳐 도쿄돔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10만여명의 팬이 찾았다.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공연이 시작하기 10시간 전부터 기념품을 사려는 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기념품을 살 수 있는 팬들은 지난 10월 추첨에 뽑힌 운 좋은 팬이었다. 이 보도를 보면 일본 방탄소년단 팬들은 이번 논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 팬은 “방탄소년단이 역사에 대해서 발언한 건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며 “팬들은 이미 다 알던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한국 방탄소년단 팬들로부터 종종 ‘외랑둥이(외국+사랑둥이)’라고 불리는 해외 방탄소년단 팬들은 이번 일이 일본 몇몇 극우 매체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논란이라는 점과 더불어 한·일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 널리 알리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지민이 입은 티셔츠가 원폭 피해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광복을 축하하는 의미의 티셔츠라며 ‘#LiberationTshirtNotBombTshirt’라는 해시태그를 붙이는 일이 유행했다. 또 일제강점기 피해 관련 자료와 최근 일본이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내용을 영어로 만들어 배포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세계화된 한류

사실 이번 논란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좀 더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일본 우익 매체의 ‘혐한’ 분위기에 맞서는 사건으로 티셔츠 논란을 바라보고 있다. 방탄소년단 소속사가 재빠르게 해명문을 내놓고 원폭 피해자 단체에 사과의 뜻을 표한 것을 두고 ‘친일(親日)’ 논란으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최근 소셜미디어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강하게 불고 있는 반일(反日) 감정과 연관 지어 해석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중문화적으로 보자면 티셔츠 논란은 현재 전 세계 대중문화에서 한류의 위상과 의미, 영향력에 대해 분석해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혐한 논란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일본 내 방탄소년단 팬덤과 관련돼 있다. 맨 처음 한류는 일본 대중문화에 선을 보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중년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해봐도 그렇다. 한류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배우와 가수들은 일본에서 자리 잡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여겼다.

한국에서는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으로 손꼽혔던 ‘동방신기’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초기에는 오리콘 차트 50위권에도 못 들어가는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소규모 라이브 공연장을 돌면서 공연을 펼쳤고 방송 출연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 동방신기는 일본에서 신인 그룹으로 분류됐는데 한국보다 ‘더 큰’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철저하게 ‘현지화’를 해야 한다는 매니지먼트 회사의 전략 때문이었다.

현지화 전략은 확실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방신기, 카라, 소녀시대 같은 1세대 한류 가수들은 일본어로 된 앨범을 내고 일본어를 배워 일본 방송에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뽐냈다. 한국 가수가 일본 음반 차트인 오리콘 차트에서 몇 위를 하느냐는 한동안 언론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세계 진출’이란 곧 ‘일본 시장 진출’을 의미하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류는 일본에 머물지 않는다. 동남아에서, 남미에서,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각자 나름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팬들이 한류를 이끈다. 한때는 일본 시장에서 현지화에 성공한 ‘한국에서 시작한 일본 음악(제이팝)’으로 케이팝을 즐기던 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제이팝과 케이팝은 완전히 다르다. 콘텐츠 유통 플랫폼의 변화는 제이팝을 거치지 않은 케이팝의 독자적인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 ‘2018 글로벌 한류 트렌드’ 보고서를 참고해 한류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이 보고서를 보면 한류는 IT·자동차 같은 경제 분야나 북한과의 갈등 같은 정치적 문제를 뛰어넘어 ‘한국’ 하면 연상되는 첫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 16개국 78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케이팝’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6.6%였다. ‘북한’과 ‘IT산업’이 각각 8.5%와 7.7%로 뒤를 이었지만 케이팝의 비중에 미치지 못했다. 한류를 접해본 적 있는 이용자들은 특히 케이팝과 한식은 소수 매니아를 넘어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분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팝과 한식이 자국 사회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소수 매니아만 이용한다는 응답은 각각 34.1%와31.4%에 그쳤다.

이 말은 한류가 명확히 한국에서 비롯된 문화 콘텐츠로 전 세계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예전에는 일본 대중문화를 즐기던 서구 매니아층이 우연히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등장한 한국 가수에 관심을 가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직접 미국과 유럽 시장을 공략했던 연예 매니지먼트사들을 통해 자생적인 시장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2012년 전 세계적 인기를 얻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케이팝을 독자적인 음악 장르로 인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콘텐츠 공급자가 제공할 콘텐츠를 결정하는 기존의 미디어가 아니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한류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한국 대중문화처럼 기존의 주류 사회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변방’의 문화는 이용자가 직접 취사선택하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10~2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먼저 한류가 확산됐다는 사실이 가능한 이유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 따르면 해마다 한류 콘텐츠를 온라인·모바일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2016년에만 해도 케이팝을 TV로 주로 접한다는 사람은 52.2%였는데 1년 사이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주로 이용한다는 응답이 62.3%로 크게 증가했다.

티셔츠 논란 적극 방어한 해외 팬덤들

자생적으로 한류가 전파되었다는 점은 지금 한류가 정치적인 것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위의 조사를 보면 한류 콘텐츠를 접하고 나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60%가 넘었지만 거꾸로 한국 관련 이슈가 한류 콘텐츠 소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북핵 문제로 심각한 뉴스가 나와도, 자국과 한국 사이 외교·정치적 갈등이 생겨도 “영향을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35.2%에 그쳤다. 아예 영향이 없다는 사람도 30%에 달했다.

황선업 대중음악평론가는 “일본 내 방탄소년단 팬덤에서는 사건이 정치적으로 불거지는 것에 대해 반감을 보이는 팬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한류는 더 이상 정치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황 평론가는 “한류를 즐기는 일본 팬들은 대부분 정치적 관심도가 낮고 한류를 문화 콘텐츠 자체로 접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팬들은 한류 콘텐츠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오히려 꺼린다.

“한류를 두고 일어나는 정치적 논란은 일부 미디어나 네티즌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경향이 큽니다. 한류 당사자와 관계자들은 한류가 비정치적인, 산업적인 측면에서 콘텐츠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이번에 방탄소년단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재빠르게 사과문을 내놓은 것도 한류는 정치나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즈니스 영역에 속한다는 자세를 잘 보여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류가 자생적인 문화 장르로서 전 세계 팬들에게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은 수없이 많다. 해외에서는 케이팝, 한식을 비롯한 한류 콘텐츠가 마이너리티(minority)를 추구하는 ‘힙스터 문화’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주류 문화와 동떨어진 채널을 통해 수용되고 있다는 점, 서구의 주류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한류는 힙스터가 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의 한식당에 가면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젓가락질을 하는 세련된 젊은이들이 많다. 젊고 ‘힙’한 할리우드 스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한류 콘텐츠에 빠져 있는지를 경쟁적으로 자랑한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와 ‘신비한 동물사전’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에즈라 밀러나 영화 ‘라라랜드’로 세계적 여배우가 된 엠마 스톤이 그렇다.

팬덤 문화도 주목할 만하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격월간지 ‘한류 나우’ 9월호에서 스타에게 갖가지 선물을 사다 안기는 ‘조공’ 문화와 스타의 이름으로 사회에 ‘기부’하는 한국식 팬덤 문화가 해외 팬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한국 아이돌 팬덤은 처음에는 개인화·파편화돼 있었지만 이후에는 점차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바뀌었다. 유튜브나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거의 동시에 케이팝을 받아들이고 있는 해외 팬덤은 한국 팬덤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다. 각자 TV나 컴퓨터 앞에서 콘텐츠를 즐기고 마는 서구식 팬덤 문화가 아니라 스타를 위해서 무언가 행동하고 스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팬덤으로 변화하고 있다.

당장 이번 방탄소년단의 ‘티셔츠 논란’에 해외 방탄소년단 팬덤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 유대인 인권단체가 방탄소년단이 입었던 의상 중 하나에 독일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자 해외 팬덤이 나서 인권단체와 언론사에 연락해 해명을 했다. 해외 팬들에게 방탄소년단은 우러러보는 스타일 뿐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의 역할을 한다. 한국 아이돌 팬덤이 변화해온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제 한류는 어느 한 국가에 깊이 연관되거나 정치·사회적 영향을 받는 장르가 아니다. 굳이 해당 국가의 언어로 노래를 번안하지 않아도, 해당 국가의 방식으로 음식을 재창조하지 않아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화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마치 일본 문화가 예전에 그랬던 것과 같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스시’는 ‘스시’,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고쿠(손오공)는 일본어 그대로 통용된다.

여기에서 한류 관계자들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한류 콘텐츠는 특별히 우수하거나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침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한 콘텐츠 공유 흐름에 걸맞은 콘텐츠였던 것이지, 일본 문화나 베트남 쌀국수가 그랬듯 한류 콘텐츠 역시 일시적 신드롬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하는 외국인들이 날이 갈수록 한류 콘텐츠의 상업화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2018 글로벌 한류 트렌드’ 보고서의 조사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자면 방탄소년단은 세계화된 한류의 출발점이자 그 과정과 결과의 상징 같은 존재다.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게 된 과정이나 방탄소년단 팬덤의 모습은 새로운 한류의 모습을 대변한다. 더불어 ‘티셔츠 논란’은 세계화된 한류가 어떤 장애물에 부딪힐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논란이 어떻게 이어져 나갈지 지켜보는 것이 새로운 한류의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정치와 비정치, 지역과 전 세계의 사이에서 한류는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장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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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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