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북한 초대 내각 합동사진. 김일성 수상(앞줄 왼쪽 네 번째)과 옆의 홍명희 부수상(왼쪽 세 번째)이 보인다. 일제 전범 기록이 존재하는 홍명희를 비롯해 초대 내각 요직 중 16명 정도가 친일파였다.
1948년 북한 초대 내각 합동사진. 김일성 수상(앞줄 왼쪽 네 번째)과 옆의 홍명희 부수상(왼쪽 세 번째)이 보인다. 일제 전범 기록이 존재하는 홍명희를 비롯해 초대 내각 요직 중 16명 정도가 친일파였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꼭 75년이 되는 해이다. 그 어느 때보다 경사스러운 날이고 마땅히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축복해야 하는 날이지만 한 사람의 언행으로 잔칫집이 되레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김원웅 광복회 회장의 8·15 기념 축사가 그 원흉이었다. 축사하러 나온 자리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축하와는 거리가 먼 적대감 가득한 말들뿐이었고 논리적 수준과 이분법적 역사 인식은 그가 대한민국의 광복회 회장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자리는 사견을 발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을 축하하고 희망적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자리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축사는 다시금 정치권을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으로 구분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완전히 둘로 쪼개버렸다.

‘빨갱이’ 프레임과 ‘토착왜구’ 프레임

‘색깔론’이라는 단어가 있다. 구태여 설명을 붙인다면 여기서 말하는 색은 빨간색이고 빨간색이 나타내는 상징은 공산주의 내지 북한이다. 좌빨, 종북세력 등의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 자주 사용되던 ‘색깔론’의 일부분이었다. 물론 현시점에도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세력이 아예 없다고 볼 순 없겠지만 대부분은 좌파세력을 핍박하기 위한 선동도구로 쓰였다. 한동안 ‘색깔론’을 이용해 보수세력이 유의미한 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현재 그러한 색깔론은 사실상 수면 아래로 내려갔거나 더 이상 활용가치가 없는,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하는 그런 낡은 사고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색깔론이 힘을 잃으면서 역으로 정부 여당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뉴(new) ‘색깔론’이 있으니 바로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이다. 저마다 해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통상적으로 일본과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라는 문제 제기 자체도 봉인된 요즘 이 프레임은 현 정부의 반일정책과 궤를 같이하며 사용 빈도가 훨씬 늘어났다. 어떤 이들은 미래통합당을 “토착왜구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빨갱이”라는 표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렇게도 색깔론을 싫어했던 민주당은 전세역전의 기쁨을 만끽이라도 하듯 앞장서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을 사용하며 보수세력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은 정치권을 넘어서 시민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래의 참뜻에서 훨씬 벗어나 이제는 문재인 정권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절반 이상이 ‘토착왜구’가 된 것이다.

김일성 초대 내각 16명이 친일파

‘토착왜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늘 주장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친일청산이다. 광복 이후 제대로 된 친일청산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토착왜구’ 세력이 판을 치고 있으며,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방해한다는 뭐 그런 논리다. 그러면서 그들이 늘 꼽는 올바로 된 예시가 있다.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완벽에 가깝게 친일파를 처단했고 그 재산을 몰수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논란의 당사자인 김원웅 회장 역시 항상 비슷한 논조의 말을 하곤 했다. 어쩌면 좌파진영 전체의 시각일지도 모른다.

정말 북한은 친일파를 전부 숙청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광복 직후 북한과 남한의 상황은 비슷했고 친일파는 어디에나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보다 먼저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친일 행적이 있는 지식인 계층을 모두 품는 대담함을 보였다. 정말 악질적인 행동을 했던 친일파들을 제외한다면 북한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소극적 친일파들은 생존을 유지했고 오히려 정권수립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과 군부 요직 중 16명 정도가 사람들이 친일파였고 김일성의 일가친척 중에도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가 있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7촌인 강양욱은 도의원을 지냈던 친일파 거물이었지만 그는 광복 후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부수상 홍명희는 일제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적극 활동했던 전범 기록이 존재했지만 그의 실무능력을 높이 산 김일성에 의해 중용되었다. 사법부장 장헌근 역시 중추원 참의 출신이었지만 북한 초대 헌법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고 북한 제1대 공군사령관 이활, 북한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모두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었다.

김일성(앞줄 가운데)과 북한 제1대 공군사령관을 지낸 이활(앞줄 왼쪽). 이활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김일성(앞줄 가운데)과 북한 제1대 공군사령관을 지낸 이활(앞줄 왼쪽). 이활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북한서 득세한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들

친일파를 전부 배제한다면 김일성 주변에 남는 사람들은 김일성을 도와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빨치산 출신이 전부였다. 그들은 무기를 다루고 소규모 부대를 통솔하는 능력은 있었지만 국가를 운영하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은 전무한, 한마디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서인 ‘조선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 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 결국 김일성은 현실을 인정하고 친일파들에게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이승만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김원웅 회장이 친일파라고 낙인찍은 한국의 이승만 정권 초기 내각의 면면을 살펴보면,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국방장관, 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청천(지청천과 동일) 무임소장관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인사들로 구성됐다. 다른 인사들까지 다 살펴봐도 친일파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반민특위가 제대로 일을 못했고 결국 해산된 것에 대한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순 없다.

필자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 갖고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붙이고 그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 부당함은 결국 이승만에게 친일파의 굴레를 씌우려는 의도의 불순함에 기인하고 있다. 좌파세력이 초대 임시정부 수장까지 지낸 이승만 대통령의 모든 공적을 무시하고 그에게 오로지 ‘친일’과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의도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보수세력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켜 결국 자신들이 장기집권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

역사는 도구가 아니다. 7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친일파가 아직도 생존해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지금 다시 반민특위가 꾸려지고 재조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그때 친일행적을 했던 모든 이들을 다시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을 하나하나 따지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할 수도 있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면밀한 확인이 필요하다. 6·25전쟁이라는 대재앙을 겪으면서 유실된 재산이 얼마일지, 또 산업화 과정이나 민주화 과정, 선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자손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도 동시에 조사를 진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로지 과(過)만 따져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의 재산을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부당한가? 오로지 친일 시대에 쌓았던 재산 덕분에 잘살고 있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히 입증되어야만 몰수의 정당성도 보장된다. 이 모든 일들을 공정하게 명확하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할 수 있는가?

‘토착왜구’ 프레임이 노리는 것

좌파사학자들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한 것을 교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2~4년이었다. 또한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기 이전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진국이었고 그로 인해 그 부역자들을 다 처단한다 하더라도 전후 프랑스를 이끌어가는 문제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드골 대통령은 대대적인 부역자 청산을 지시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공정성이 훼손되는 경우가 빈번했고 특히 처벌 대상 선정과 처벌 수위가 공정하지 않았고 형평성도 잃었다. 이로 인해 국론 분열이 극에 달하자 드골은 결국 부역자 처리를 포기했고 1953년 살인, 고문, 간첩행위 등 중범죄자를 제외하고 모든 부역자를 사면했다. 2~4년 동안의 과정도 조사가 이토록 어려운데 무려 36년 동안 진행되었던, 그리고 75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다시금 친일청산을 말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

‘토착왜구’라는 프레임과 친일청산은 결국 좌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애초에 이러한 것들에 큰 관심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 좌파세력의 뿌리가 상하이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각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여기고 있는 우파세력과의 프레임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에게 역사적 진실과 사실적 인식은 전혀 안중에 없다. 역사를 도구화하고 오직 자신들에게 유리한 면만을 조명하여 현재의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아집과 독선만이 가득할 뿐이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기록자인 동시에 역사를 외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자이다. 빨갱이 타령만 일삼던 우파가 무능력하게 몰락했듯이 토착왜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좌파 역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부정한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바꾼다고 해서 바뀌지도 않는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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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혁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유튜브채널 ‘난세일기’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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