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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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김일성 사망 때 우리 군은 아무 정보가 없었다.”

유정갑 전 국방정보본부장(예비역 중장)이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국방정보본부는 미국의 국방정보국(DIA)을 모델로, 전두환 정부 때인 1981년 합동참모본부(합참) 정보국을 확대 창설한 군사정보기구다. 육·해·공 전 군이 생산한 군사정보가 한데 모이는 곳으로 국군 정보사령부, 대북 통신감청부대인 제777사령부(쓰리세븐부대) 등을 예하에 거느리고 있다. 유정갑 전 국방정보본부장은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며 한반도 안보위기가 찾아왔던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국방정보본부장을 지냈다. 군사정보 총책의 입에서 나온 이 같은 언급은 충격적이다.

육군사관학교 20기 출신으로, 평생을 군 정보계통에서 종사한 유 전 본부장은 최근 우리 군의 대북정보 수집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다룬 회고록을 펴냈다. 북한 김정은·김여정 오누이의 위임통치 논란, 재선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언급 등과 맞물려 회고록 내용은 우리 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9월 8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유 전 본부장은 “대북 군사정보 수집능력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은 지배적”이라며 “우리 군의 대북정보 수집능력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오진우 프랑스 파리행도 놓쳐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 군의 취약한 대북정보 수집능력을 보여주는 일화는 김일성 사망 때만이 아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3개월 후인 같은해 10월, 오진우의 프랑스 파리 입원 사실도 우리 군의 레이더망을 비껴갔다.

오진우는 북한 권부의 핵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구소련 제88보병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출신으로, 인민군 총참모장, 최장수 인민무력부장,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지내고, 인민군 원수계급장을 달고 있던 북한 군부 최고 실세였다. 빨치산 시절 김정일을 업고 다녔다는 오진우는 김일성 사후에 아들 김정일로 원만한 권력승계가 이뤄질지 여부를 가늠하는 핵심키를 쥔 인물이었다.

하지만 폐암을 앓던 그가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을 우리 군은 그대로 놓쳤다. 김일성 사망과 달리, 6·25전쟁 때 한국을 도와 참전한 우방국인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인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군 당국이 파리 주재 국방무관을 오진우가 입원했다는 파리의 라에넥병원에 급파해 관련 정보를 캐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오진우는 이듬해인 1995년 2월 북한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94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우리 군의 대북정보 수집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실패 사례들이다.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으로 군 정보 총책이던 그는 반면교사(反面敎師) 차원에서 이 같은 일들을 담담하게 회고록에 기록했다. 그는 “김일성 사망 소식은 상부에서도 우리 능력 밖이라고 생각해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고 했다.

김영삼 정부 당시, 한국형 정찰기 도입사업인 ‘백두·금강사업’에 착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각각 백두산, 금강산까지 탐지할 수 있는 정찰기를 도입하는 사업이었다. 국방정보본부장으로 한국형 정찰기 도입의 필요성을 상부에 최초로 제기한 것도 바로 그다. 비록 도입 과정에서 터져나온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과 무기 로비스트 린다김 간의 스캔들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는 “한국형 정찰기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초 군 당국은 미국의 고고도 정찰기인 U-2기를 도입하려 했으나, 일찌감치 중국과 대치 중인 대만에 U-2기를 제공한 미국이 한국에는 끝내 U-2기 판매를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는 “U-2기는 북한 평양까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압록강 너머까지 통신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했다. 대만과 달리 한반도에 직접 미군을 주둔시키는 미국은 U-2기를 스스로 운용하면서 한국에는 판매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한국형 정찰기는 ‘꿩 대신 닭’이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대북 군사정보 수집을 위한 긴밀한 한·미 공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이 같은 소신으로 그는 국방정보본부장 취임 직후 매일 오전 7시 서울 용산의 한미연합사 영내에서 주한미군 정보책임자와 만나는 조조미팅을 정례화하기도 했다. 긴밀한 한·미 간 의사소통을 위해 정규채널과 별도의 핫라인을 구축한 셈이다. 미측에 부탁해 외교행낭 편으로 북한 관련 주요 정보를 받기도 했다. 그는 “주한미군이 없으면 깜깜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1989년 제4땅굴 발견은 성과

반면 그는 육군본부 기획보안처장으로 있을 때 발견한 ‘제4땅굴’은 우리 군이 이뤄낸 성과라고 자부했다. 군 당국은 북한군의 남침루트가 될 제1~3땅굴까지 찾아낸 뒤 한동안 땅굴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연간 10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으나, 추가 땅굴을 찾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그는 이종구 당시 육군참모총장(후일 국방장관)의 지시로 미국에 가서 갱도탐지 등에 쓰이는 장비를 직접 시찰하고 왔다.

결국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는 한국형 탐지장비를 생산해 1989년 강원도 양구에서 제4땅굴을 찾는 데 성공했다. 1978년 제3땅굴 발견 후 11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는 “육안으로 찾아낸 1~3땅굴과 달리 4땅굴은 최신 장비를 도입해 주도적으로 찾아낸 것이 결정적 차이점”이라며 “당시 땅굴을 찾는 과정에서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샅샅이 훑으며, 21개 주요 예상루트를 정리했는데 지금도 어딘가에 남침용 땅굴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간첩) 잡고 (땅굴) 찾자’란 말을 일상적으로 쓰던 과거와 달리 우리 군의 지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지난 7월에는 한강 하구의 강화도 배수로를 통해 월북하는 탈북민을 눈뜨고 놓치는 일도 있었다. 1989년 4땅굴 발견 이후 30년 넘게 추가 땅굴 발견 소식도 없다. “간첩 잡고 땅굴 찾으면 1억원의 상금을 주고, 헬기를 태워 휴가를 보냈다”는 그의 말도 이제 어느덧 전설이 됐다.

그는 “우리 군의 대북 군사정보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보예산의 뒷받침”이라고 강조했다. 대북정보 수집에 필요한 최신 정찰장비들을 확보하고 운용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든다. 소위 ‘휴민트(인간 정보)’망을 구축·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도 결국 돈이란 것이 그의 말이다. 유 전 본부장은 “북한에 있는 우리 공작원들도 돈을 많이 줘야 움직인다”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깡패들이나 북한 연고자들을 물색해 북한에 보냈는데, 우리가 보낸 공작원들은 (돈이 없어) 너무 불쌍했다”고 했다. 그는 “간첩은 3대(代)를 바라보고 키워야 한다”는 소신도 밝혔다.

주요 대북정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군의 정보경시 풍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작전계통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한 데 반해, 정보계통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하나회 역시 작전맨들 일색”이라며 “나는 하나회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악화된 한·일 관계의 최대 이슈가 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역시 대북정보 획득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소미아’는 ‘종료유예’ 상태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유정갑 전 본부장은 “일본이 못된 짓을 해서 밉긴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대북정보는 일본과 긴밀히 협력해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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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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