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新)왕조의 화폐 화천은 묻혀진 한반도 역사의 한 단면을 확실히 보여준다. 가야를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한 교역이 일상이었던 때의 모습이다.

그 교역 루트는 공간적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최소한 중국 황하 유역과 산둥반도로부터 한반도 서해안의 평양, 광주, 해남을 거치고, 남해안의 사천, 김해, 부산을 거쳐, 일본의 쓰시마, 이키, 규슈까지 이어진다.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인 낙랑군 출토 화천(왼쪽). 화천 출토 지역과 해류(오른쪽) 제공: 이진아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인 낙랑군 출토 화천(왼쪽). 화천 출토 지역과 해류(오른쪽) 제공: 이진아

이 광대한 루트가 서기 1세기 전반에 이미 안정적으로 정립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선 연재기사 ‘중국 신나라 때 화폐 화천은 어디서 주조됐을까’에서 다뤘듯, 화천의 통용 기간이 서기 14년에서 40년까지이며, 가야의 교역은 상당 부분 이 화천을 매개로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떠오른다. 가야의 건국은 서기 4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가야의 교역 루트에서 서기 40년에 사용이 끝난 화폐가 많이 발견되는 것일까? 당찬 포부로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이 중국의 망한 나라에서 썼던 화폐를, 그 모양 그대로 다시 대대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해서 동아시아 전체에 유통시켰을 것 같지는 않다. 신왕조가 망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이미 화천이 안정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면 계속해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 가야가 서기 42년보다 앞서 건국됐다면 어떨까? 가야가 기원전 1세기 중반 이전에 건국된 것으로 보면 이 시리즈를 통해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이 상당히 해결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의 환경 특성상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기원전 1세기는 지구 전체적으로 그야말로 지구환경위기에서 오는 대혼란과 변혁의 시대였다.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랭기로 지구상 대부분 지역에서 살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다가,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지구자기장이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기원전 1세기의 거시적 지구환경변화(왼쪽). 한랭기 끝에 대규모 화산 폭발 등 활발한 지각활동이 특징이었다. 지구자기장 틈새로 쏟아져 내려오는 외부 우주 전자파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합성 사진(오른쪽). 미국 시카고 대학 우주물리학부 교수 사이먼 스워디 작성. 출처: 미국 우주항공국 홈페이지
기원전 1세기의 거시적 지구환경변화(왼쪽). 한랭기 끝에 대규모 화산 폭발 등 활발한 지각활동이 특징이었다. 지구자기장 틈새로 쏟아져 내려오는 외부 우주 전자파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합성 사진(오른쪽). 미국 시카고 대학 우주물리학부 교수 사이먼 스워디 작성. 출처: 미국 우주항공국 홈페이지

지구자기장이 불안정해지면 외부 우주로부터 에너지 준위가 높은 전자파가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그 영향으로 금속 성분이 대부분인 지구 내부 지각 물질의 운동에너지가 강해진다. 화산, 지진, 해일 등 지각활동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가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커진다. 기원전 1세기에는 폼페이를 잿더미에 묻었던 베수비오 화산을 비롯, 거대 화산 폭발과 지진, 해일 등 대규모 자연재해가 줄을 이었다.

이런 시기엔 인간 사회에서도 정치경제적인 격변이 끊이지 않는다. 지중해에서는 그리스 제국이 무너지고, 여러 모로 악명 높은 로마가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의 거의 전 지역을 차례로 강점했다. 이집트에서는 3000 년 넘게 이어져 오던 고대 왕조가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죽음과 함께 종식하고, 그 방대한 옥토와 더불어 로마에 복속했다. 중국에서는 대륙을 통일해 안정적으로 통치한 최초의 제국이었던 한나라가 안팎으로 흔들리다가 결국 외척 왕망의 손에 무너졌다.

한반도에서도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동안 철기문명이 급격히 확대하면서 느슨한 연명체와 같은 고대국가들이 등장했다. 철기시대 초기에는 부여·동예·옥저 등이 북부에, 마한·진한·변한 등이 남부에 등장했지만, 기원 1세기 중반부터는 이들 중 더 적극적인 세력들이 신라·고구려·백제 등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지구자기장이 불안정한 시기에는 사람들의 내면도 불안해지며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공격성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1세기엔 지구상 모든 인간 집단이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기 것을 지키는 동시에 기회만 된다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태세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철기문명은 이런 시기에 확산하기 쉬운 특성이 있다. 철기 문명의 인류는 공격적으로 철광석을 채굴하고 삼림을 벌채해 더 많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한편 영토를 확대하고 식량생산을 늘리려 노력한다. 특히 기원전 1세기의 사람들은 그 이전 약 500년 간 기후변화 주기의 한랭기를 거친 직후여서, 춥고 배고픈 시절을 길게 보냈던 집단 기억을 갖고 있었을 테다. 다시는 굶을 수 없다는 의지가 더욱 공격적인 진취성을 낳았을 것이다.

한민족 국가 중에는 부여가 제일 적극적으로 새 땅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부여가 자리 잡은 곳은 위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아무리 기름진 대평원라고 해도 한랭기 동안에는 힘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름철에 백두산이라도 폭발했다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만한 땅을 찾는 필사적인 여정에 올랐을 것이다.

부여인의 확산 중 확인된 국명과 부여인의 육지 및 바다를 통한 이동 경로.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관행의 담론을 따라 표시한다. 제공: 이진아
부여인의 확산 중 확인된 국명과 부여인의 육지 및 바다를 통한 이동 경로.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관행의 담론을 따라 표시한다. 제공: 이진아

기원전 37년 고구려, 기원전 18년 십제(백제의 전신)는 부여인이 건국한 고대국가였다. 기원전 1세기 것으로 확인되는 부여 방식의 제철 흔적이 동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고, 사서에 나오는 실직국 같은 나라가 그 흔적의 주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야 역시 부여인이 세운 나라라는 게 현재 가장 폭넓은 공감대를 갖는 의견이다. 즉 부여인 중 상당수가 기원전 1세기 동안 부여의 원 근거지인 만주 평원을 떠나 한반도 도처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 광범위한 움직임 가운데 가야의 건국만 60년 이상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이유로. 고대 역사서가 통상 그렇듯 이 책들 역시 이전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을 취합해서 정리한 것이다. 오랜 세월 가야와 국경을 맞대고 경쟁 관계에 있다가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의 역사 기록자들이 가야의 건국시기가 신라 건국시기보다 더 빠르거나 비슷했다고 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정황을 고려하면 가야의 건국 시기를 동해안 철기 문명의 시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원전 1세기 중으로 추정하는 것도 논리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테다. 그 중에서도 전반부에 속한다고 볼 이유가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 번 나왔던 박창범 교수의 고대 천문관측지도에서 상대신라의 관측지가 양쯔강 중류인 까닭이 설명될 수 있다. 다음 회에 이어서 보자.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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