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 대성동 고분 유적지.
김해시 대성동 고분 유적지.

가야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가락국(금관가야)을 맹주로 한 전기 가야연맹 지역인 낙동강 및 섬진강 하류 일대에서는 엄청난 양과 고품질의 철 덩이, 무기‧갑옷‧기타 도구 등 철제품들, 그리고 화폐와 도기 등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가야는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물질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그런 문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고(高)퀄리티 철을 생산하고 교역하던 능력이었다는 점이 확실해진다.

이 많은 철들은 다 어디서 생산된 것일까? 무덤에 그 정도 묻혔다면, 당시 가야 사회에는 훨씬 더 많은 양의 철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가야 지역, 특히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동아시아 철 교역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김해 일대에는 제철작업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왼쪽) 다양한 가락국 철기, (가운데) 가락국의 철정(쇠덩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경남 창원에서 발굴된 가락국 제철 용광로 흔적. 출처: 한국문물연구원
(왼쪽) 다양한 가락국 철기, (가운데) 가락국의 철정(쇠덩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경남 창원에서 발굴된 가락국 제철 용광로 흔적. 출처: 한국문물연구원

김해를 비롯해서 전기 가야연맹 지역인 밀양, 진영, 창원 등에서도 제철 관련 유적이 발굴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아주 소규모거나 철 자체를 생산한 곳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철을 가공해서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곳들이다. 좀 규모가 큰 제철 유적들은 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 시기의 것이다.

‘철의 제국’ 가락국에 제철유적이 없다? 이 미스테리에 대한 답을, 이 연재물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락국은 제철기지를 해외에 두었기 때문이다. 3D 제조업을 다 해외로 넘겨버리고 자신들은 교역을 통해 얻는 이익으로 자국에서 친환경적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는 현대의 선진국들처럼.

그 제철기지가 우선 중국의 우한 일대에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 시리즈를 통해서 확인했다. 그러다 더 이상 우한 일대를 가야의 제철기지로 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일본 규슈지역으로 가는 해로를 뚫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포운 이종기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규슈의 가야 제철작업장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야는 대체 어떻게 해서 그 옛날 해외에 그렇게나 견고한 제철기지를 둘 수 있었을까? 거기에도 오래 전부터 살던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안 그래도 자료가 태부족한데 이런 부분까지 속 시원히 밝혀줄 자료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간접자료와 정황 분석에 근거해서 추정은 할 수 있다.

가야의 활동이 보이기 시작하는 기원전 1세기 중반보다 훨씬 이전부터 우한 남쪽, 지금은 우한 외곽 신도시인 황시(黃石) 시 일대는 이미 중국 대륙에서도 앞서가는 제철 및 제동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양쯔강 유역의 제철은 인도 쪽에서 와서 기원전 8세기에 자리잡은 것으로 본다. 황하 유역은 북아시아 쪽에서 와서 그보다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제철 기술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산되어 간 경로. 검은 선과 회색 선은 기존의 학자들이 시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어도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경로이다. 진하고 연한 갈색 선은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제공: 이진아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제철 기술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산되어 간 경로. 검은 선과 회색 선은 기존의 학자들이 시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어도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경로이다. 진하고 연한 갈색 선은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제공: 이진아

아시아 북부를 지나간 제철기술의 흐름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인 오호츠크해 연안까지 도착했다. 이 흐름은 당시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강국이었던 부여국의 번영을 뒷받침해주었을 테다.

하지만 부여국은 당시에도 활화산이었던 백두산을 동남쪽 국경에 두고 있다는 약점이 있었다. 남동풍이 부는 여름철 화산이 대규모 폭발을 하는 경우엔 나라 전체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백두산 지질학 전문가 부산대 윤성효 교수가 밝혔듯이, 실제로 그런 일이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일어났다.

생존을 위해 긴 여정을 떠난 부여국 사람들 중 한 대열이 한반도 동남단 낙동강 하류에 이르렀다. 이 지역에서는 그 이전 변한 시절부터 원주민이 제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풍부한 삼림과 풍부한 철광석, 그리고 풍부한 수자원이 있는 곳에서는 으레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도 당대 동아시아 최대국가이자 최강국으로 스케일 큰 번영을 구가했던 부여국에서 온 사람들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이들 원주민들은 특별한 제철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조개껍질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을 철광석과 섞어 제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해평야 일대가 다 당시에는 바다였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퇴적지 물가에서는 조개가 많이 잡혔다.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거대한 김해 패총은 아주 오래 전 그 물가에서 얼마나 쉽게 다량의 조개를 이용할 수 있었는지 말해준다.

조개껍질을 잘게 부수어 숯으로 가열한 뒤 철광석에 섞어 녹이면 철에 포함된 불순물이 쉽게 제거되며, 같은 연료로 온도도 훨씬 올릴 수 있다. 강하고 탄력 있는 고(高)퀄리티 철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부여국의 철기 제작법도 이미 양쯔강이나 황하 유역의 그것보다 훨씬 효율성이 높은 방식이었다. 여기에 낙동강 유역 원주민의 제철 노하우까지 더해지면서, 가락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품질 철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갖게 됐다.

17세기 명나라 제철 작업장의 모습. 왼쪽 그림은 산화칼슘을 철광석과 섞어주는 작업. 철의 강도와 탄력성을 높이는 이런 공정은 1500년 지난 후에도 중요한 노하우로 기록되고 있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17세기 명나라 제철 작업장의 모습. 왼쪽 그림은 산화칼슘을 철광석과 섞어주는 작업. 철의 강도와 탄력성을 높이는 이런 공정은 1500년 지난 후에도 중요한 노하우로 기록되고 있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히타이트 제국이 있었던 소아시아에서 출발해 유라시아 대륙 북부를 거쳐 연해주에서 김해로 내려오는 긴 여정 중 이런 여건을 갖춘 곳은 김해가 첫번째다. 여기서부터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으로, 조개에서 나오는 탄산칼슘이 충분히 공급되며 철광석과 삼림도 풍부해서 좋은 제철기지가 될 만한 곳이 이어진다. 그런 곳에서는 현재 가야 유물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서해 건너편 중국 해안으로 가면 그런 곳을 발견하기 어렵다.

만일 가락국이 해외 제철기지 현지에서 철광석과 목재 등 주원료를 확보해서 그곳 원주민은 언감생심 따라잡을 수 없는 고(高)퀄리티 철을 만들었다면? 원주민 중 그걸 생산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이득을 취하는 집단은 가락국 사람들을 환영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게 이런 사람들은 권력집단이거나, 이를 발판으로 권력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철을 생산하는 게 가능한 동안에는 안정적으로 해외기지를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론에서 출발하면 가야의 해외 제철기지가 있었던 곳의 범위를 더 좁혀 역추적할 수 있다. 가락국으로 가는 고품질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물길로 쉽게 가락국까지 연결되며, 철광이 풍부하고, 큰 산지에 연해 있어 목재가 장기적으로 조달될 수 있는 곳. 지형에서 오는 독립성도 어느 정도 있는 곳.

그 중 하나가 일본 규슈 야쯔시로시 북부 히가와 강 주변 산림이라는 걸, 이종기 선생은 말한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해진다. 그곳에서 조개도 낙동강 하구에서만큼 많이 났을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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