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홈을 살피다가 그것이 굴뚝임을 알 수 있었다. 홈통을 이룬 석회암 표면에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을음이 껍질처럼 벗겨졌다. 쇠를 제련할 때 나오는 철매(鐵媒)였다. 이곳에는 분명히 쇠를 녹이고 합금하던 풀무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두꺼운 철매층을 남길 만큼 불을 땠다면 어딘가 땅 위로 굴뚝 끝이 닿아 있었을 것이다. 또 종유동이란 게 원래 흐르는 지하수의 용해작용으로 생겨난 굴이고 보면 산 위 어딘가에 빗물이 스며드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굴에서 빠져나와 종유동 꼭대기로 추정되는 봉우리 위를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마침내 수풀 사이로 굴뚝 끝으로 보이는 구멍을 발견했다. 지름이 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제법 큰 구멍이었다. 구멍 입구는 굵은 쇠창살로 박았는데, 주변의 나뭇가지를 밀치고 전등빛을 비추니 끝없이 동굴을 향해 아래로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난도상(あなんどさ)’, 우리말로 ‘구멍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는 이곳의 장長이었고, 그가 자리한 곳은 그 옛날 철을 제련하던 비밀 작업실이었던 것이다.

포운 이종기 선생의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에서 또 한 대목 따왔다. 1979년, 이 지역에 대한 2차 탐사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차 탐사 때 보았던 움푹 패인 구멍 속에 있었던 철 뭉치와 함께, 이 동굴이 그 옛날 제철 작업장이었음을 알리는 생생한 증언이다.

이곳의 발견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야쯔시로에 도착한 날부터 이종기 선생은 운 좋게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전거도 빌리게 된다. 그리고 가락국의 공주 출신이며 이곳에서 일본 최초 고대국가의 초대 여왕으로 지냈다고 믿었던 비미호(히미코) 여왕이 살던 궁 터를 찾기 시작한다. 간선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무작정 달리다가 ‘궁원(宮原, 미야바라)’이라고, ‘궁’자가 들어간 도로표지판을 보고 들어온 길이다. 어찌어찌 가와하라 다이진구 신사로 이어진다.

(왼쪽 위) 가와하라 다이진구 신사. 일본의 다른 신사에 비해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 외양이다.  (왼쪽 아래) 가와하라 다이진구 뒤쪽 숲으로 올라가는 길.  (가운데) 신사 뒤쪽 산 정상 부근 동굴에서 1979년 이종기 선생의 2차 탐사시 촬영한 훼손된 아난도상 석상과 제를 지낸 흔적.  (오른쪽) 2019년 1월 촬영한 구글 어스 항공 사진으로 확인된 동굴 추정 위치 확대 사진.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동굴이 훼손됐을 가능성도 있다. 사진 출처: 가운데는 이종기, 다른 사진들은 모두 구글 어스 사진.
(왼쪽 위) 가와하라 다이진구 신사. 일본의 다른 신사에 비해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 외양이다. (왼쪽 아래) 가와하라 다이진구 뒤쪽 숲으로 올라가는 길. (가운데) 신사 뒤쪽 산 정상 부근 동굴에서 1979년 이종기 선생의 2차 탐사시 촬영한 훼손된 아난도상 석상과 제를 지낸 흔적. (오른쪽) 2019년 1월 촬영한 구글 어스 항공 사진으로 확인된 동굴 추정 위치 확대 사진.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동굴이 훼손됐을 가능성도 있다. 사진 출처: 가운데는 이종기, 다른 사진들은 모두 구글 어스 사진.

신사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선생에게 한 노파가 다가와서, “이 고장에 관심이 많은 분인가 본데, 그래도 아직 ‘아난도상’은 못 보셨지요?” 하고 묻는다. 그리고는 신사 뒷산 산정 절벽 부근에 있는 동굴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날이 어두워져 하마터면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던 고비를 거치면서 선생은 그 동굴, 즉 ‘구멍’에 모셔져 있는 석상을 발견하게 된다. 복식과 제작형태로 보아 가야인으로 추정되는 그 석상은 현지인들이 ‘구멍님’, 즉 ‘아난도상’으로 모시는 존재였다.

홀로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만 의지하는 상황에서도 선생은 그 동굴이 가락국의 제철작업장임을 직감했다. 4년 후, 밝은 낮 시간에 현지인과 동행한 길에서는 더욱 여러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철을 제련하던 장소라는 점을 확신하게 됐다.

이종기 선생은 고대사회에서 품질 좋은 철을 만들어내는 노하우는, 요즘 개념으로 말하자면 특급 산업 기밀이어서 동굴 안에서 그 작업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 동굴 속의 비밀 제철기지, 상상만 해도 열악한 노동 환경일 것 같다. 엄청난 양의 숯과 더 무거운 철광석을 동굴 안으로 날라야 했을 테다. 또 아무리 시원한 종유동 동굴 안이라 해도 강철을 만들어낼 정도로 불을 땐다면, 동굴 안의 온도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높아질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락국 철 유물을 생각해보자. 엄청나게 많은 철을 보유했었다는 얘기다.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는 서기 200년 이후엔 가락국 본토에 삼림이 더 귀해져서,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내는 철에 의존했을 테다. 정말 그 많은 양의 철을 그렇게 불편하게 동굴 속에서 만들어냈을까?

골똘한 생각이 여기 머물러 더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곳이 ‘석회암’ 동굴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 더욱 강하고 탄력 있는 고품질 철로 만들어주는 비결인 첨가물, 탄산칼슘은 조개껍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석회암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석회암 지대는 그 자체로 엄청난 탄산칼슘의 공급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200톤 이상의 석회암이 제철용으로 쓰인다고 한다.)

필자가 확인해본 결과 야쯔시로 일대는 일본에서도 중요한 석회암 산지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우한 남쪽의 산림 인접지대, 한때 가야의 제철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시(黃石) 시 일대도 철광, 동광, 석회암이 많이 나오는 지대였다.) 야쯔시로 일대에서는 철광석이 많이 날뿐 아니라, 강과 얕은 바다 해변에서 나오는 사철(砂鐵), 즉 모래에 섞인 쇳가루도 상당히 많이 난다고 알려졌다.

(왼쪽) 규슈의 지질구조. 야쯔시로는 석회암대에 속해 있다. 원본 지도 출처: 일본 오시카무라 중앙구조선 박물관.  (오른쪽) 왼쪽 지도 위에 표시한 규슈의 철광 산지. 야쯔시로는 규슈에서 석회암지대이면서 사철과 철광석 산지를 겸한 유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飯田賢一(1982)、<日本人と鉄>.   재구성: 이진아.
(왼쪽) 규슈의 지질구조. 야쯔시로는 석회암대에 속해 있다. 원본 지도 출처: 일본 오시카무라 중앙구조선 박물관. (오른쪽) 왼쪽 지도 위에 표시한 규슈의 철광 산지. 야쯔시로는 규슈에서 석회암지대이면서 사철과 철광석 산지를 겸한 유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飯田賢一(1982)、<日本人と鉄>. 재구성: 이진아.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 사철을 채집, 쇳가루를 모으거나 철광석을 캐는 일은 공개해도 되는 부분이어서 현지 노동력에 의존했을 것이다.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드는 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석회암을 채굴, 가열해서 철광과 섞어 일차로 굽는 일은 가락국인들만이 지닌 노하우였다. 이 작업은 동굴 속에서 진행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선철 덩이를 동굴 밖으로 내보내 더 크고 고온을 내는 용광로 속에서 녹여, 최종적으로 고품질 강철로 완성했을 것이다.

석회암 동굴에는 지표면과 지하 동굴 내부를 연결하는, 천연으로 형성된 좁고 긴 통로가 있다. 그 통로를 다듬어 굴뚝으로 만들면 열기가 잘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동굴 속 1차 용광로를 돌과 진흙 같은 것으로 두툼하게 잘 만들기만 하면, 태양이 들어오지 않는 시원한 종유동굴 안에서, 그리 높은 고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조성됐을 것이다. 목재는 숯으로 만들고 철광석 혹은 쇳가루는 잘 정제하여, 산 속 동굴로 운반해야 하는 원료의 무게를 줄였을 것이다. 전체 과정 중에서 동굴 내부 석회암을 캐서 부수어 철광에 섞은 후 가열, 녹였다 굳히는 부분만 동굴 안에서 했다면 얼마든지 할 만한 작업이었을 테다.

가락국은 일본 규슈에서도 가까이 있는 후쿠오카와 구마모토를 지나 더 남쪽에 있는 야쯔시로를 제철기지로 삼았다. ‘철+산림+바다로 이어지는 물길+비교적 다른 지역과 차단된 지형’이라는 조건을 갖춘 곳은 후쿠오카와 구마모토에도 널려 있다.

하지만 석회암 지형이라는 조건까지 본다면, 이 모든 것을 갖춘 곳은 야쯔시로 뿐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 너른 규슈 지역에서도 처음부터 야쯔시로를 찍어 탐사하기 시작한 이종기 선생은 과녁의 정중앙을 맞춘 셈이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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