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래종 말 중 한 종류인 요나구니 우마. 이런 재래종 말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출처: Wikipedia Creative Commons
일본 재래종 말 중 한 종류인 요나구니 우마. 이런 재래종 말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출처: Wikipedia Creative Commons

빙하시대 이후 오랫동안 고립되어 왔던 일본에 처음 대륙의 문물을 전해준 것은 가야, 특히 수로왕이 건국했던 가락국(금관가야)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에서 가야의 흔적이 철저히 지워져 있기 때문에, 종전까지는 그런 사실이 묻혀져 왔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 구전 콘텐츠, 당시의 기후 및 천문 등 환경 상황에 대한 과학적 재구성, 동아시아의 지리 및 지질학적 특성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통합해 분석해보면, 일본은 가락국이 본격적으로 찾아온 서기 2세기 끝 무렵 이전에는 유라시아 대륙과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바다를 건너 온 가락국 사람들을 처음 본 일본 원주민, 당시 중국의 기록에서 ‘왜인(倭人’)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가락국 사람들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서기 2세기라면 한반도와, 아마도 중국에도 존재했던 가야 연맹 국가들이 이미 3세기가 넘는 동안의 경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동아시아 최강의 제철 해양제국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때다. 그리고 그 중심이 가락국이었던 때다. 당시 일본은 아직 국가도 형성하지 못했었다. 가락국 사람들이 타고 온 배며, 무기, 복식 등은 왜인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화려하고 정교한 수준을 과시했을 터이다.

그보다 왜인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요소는 아마 ‘말(馬)’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부여국의 중심이었던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 사이 산기슭(녹색 원 부분)은 지구상에서도 가장 먼저 말이 대규모로 서식했던 곳 중의 하나다. 위 지도는 빙하시대였던 최신세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서 말 화석의 분포를 보여주는 것으로, 부여국이 있었던 자리에서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말 화석이 출토됐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PLOS Biology, “Evolution, Systematics, and Phylogeography of Pleistocene Horses in the New World: A Molecular Perspective”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부여국의 중심이었던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 사이 산기슭(녹색 원 부분)은 지구상에서도 가장 먼저 말이 대규모로 서식했던 곳 중의 하나다. 위 지도는 빙하시대였던 최신세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서 말 화석의 분포를 보여주는 것으로, 부여국이 있었던 자리에서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말 화석이 출토됐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PLOS Biology, “Evolution, Systematics, and Phylogeography of Pleistocene Horses in the New World: A Molecular Perspective”

한반도는 지구상에서도 가장 먼저 말이 서식했던 지역 중 하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북부에서 말의 서식은 빙하시대였던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이 지역의 주인은 우리와 같은 한민족(韓民族)인 부여국 사람들이었고, 가락국은 그 부여국의 유민이 세운 나라였다. 부여국 사람도 가락국 사람도 기마민족이었다.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의 건국주 수로왕이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공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목이다. 장거리 이동시 배에 말을 실어 이용했으며 좋은 말은 국빈을 맞을 때, 즉 국가의 위세를 과시할 때 필수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언제부터 말을 이용했을까? 기록을 보면 일본 열도에서 말을 사육한 흔적 중 가장 오래 된 것이 서기 4세기 중엽이며, 일본 재래종 말의 혈통은 한반도에서 온 것으로 밝혀져 있다. 원래 일본에는 말이 없었고, 가락국 사람들을 통해 말이 도입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이라는 동물이 아예 없었던 곳의 사람들이 처음 말을, 그것도 사람이 탄 말을 봤을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 대해서는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웅변해준다. 유럽의 신대륙 정복 중 특히 효율적이었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악명 높았던 스페인의 잉카 제국 정복 이야기다.

1532년 11월, 프란치스코 피사로는 단 37명의 오합지졸로 수만 명의 정예 병사가 지키고 있던 잉카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황제를 포로로 삼았다. 당시 잉카는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던 남미 최강의 제국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이 주는 임팩트다.

피사로가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카하마르카의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유럽의 판화. 출처: 퍼블릭 도메인
피사로가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카하마르카의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유럽의 판화. 출처: 퍼블릭 도메인

잉카 원주민들은 말도 처음 보거니와 어떤 동물이든 사람이 올라타 붙어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배에서 말을 타고 내리는 흰 피부의 사람들 모습 자체가 충격이었고, 신(神)이 내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스페인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말을 달려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수만 명의 부하들과 접견 행사를 하고 있는 장소로 뛰어들어갔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도 모두 이들을 신으로 믿고 두려워하며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피사로의 동료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피사로가 탄 말이 뿜는 콧김에 황제의 머리장식 깃털이 흔들릴 정도로 가까이 갔는데도, 황제는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보다 1400년 전, 기마민족 가야인의 모습을 처음 접한 일본인들의 충격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강렬한 인상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무형유산 콘텐츠에 남아 있는 듯하다. 야쯔시로의 오랜 전통, ‘묘켄 마쯔리’에서다. 이 지역 전통 민간 신앙의 중심인 ‘묘켄(妙見)’이라는 신적 여성의 존재를 기리는 행사로, 규슈 3대 마쯔리 중 하나로 꼽힌다. 필자는 2007년 이 마쯔리를 참관한 적이 있는데, 거의 5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본행사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말’ 퍼포먼스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전통 축제에 등장하는 퍼포먼스에는 다 스토리가 있다. 야쯔시로 묘켄마쯔리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인 거북배 퍼포먼스의 경우, 묘켄신이 거북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전설을 말해주는 것이다.(한국인 관람자로서 놀라웠던 점 하나만 짚고 가자.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서 흔들어대는 그 거북배의 형상이 우리의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던 거북선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말’ 퍼포먼스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에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잠깐 보자.

얕은 여울이 길게 흐르는 시냇가 둑에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관중들이 앉아 있다, 한쪽에서 말한 마리와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나온다. 말은 준마였다. 커다란 체격, 정교하게 얽혀 움직이는 굵고 잔 근육들, 반질반질한 털…. 공들여 키워진 게 딱 보인다. 안장이 없이, 일본 전통 장식에서 흔한 빨강, 하양, 금색 실을 꼬아 만든 화려한 고삐만 매어져 있었다. 그 고삐를 잡은 사람 및 그를 따르는 이들은 일본의 전통 축제인 마쯔리 행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짧은 소매와 짧은 바지의 기모노 차림, 에도 시대 하급 무사 비슷한 복장이다.

야쯔시로 묘켄마쯔리 주요 콘텐츠 중 하나인 천마 퍼포먼스. 사진: 묘켄마쯔리 동영상 캡쳐.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hUQDGmhKPRk&ab_channel=dydojp
야쯔시로 묘켄마쯔리 주요 콘텐츠 중 하나인 천마 퍼포먼스. 사진: 묘켄마쯔리 동영상 캡쳐.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hUQDGmhKPRk&ab_channel=dydojp

관객이 잘 보이는 곳에 오자 말은 첨벙거리며 물줄기를 따라 혈기 왕성하게 겅중겅중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남자들은 마치 축구시합에서 외곽에서 움직이며 언제 튀어올지 모르는 볼에 대비하는 수비수 비슷한 분위기로 말 주위를 서성거린다. 클라이맥스라고 해봐야 말이 좀 더 심하게 뛰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그걸 통제하려는 듯한 동작을 좀 더 크게 하는 것뿐,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찾아보기 어려운 느긋한 분위기다.

한동안 그렇게 어른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모두 냇가 한 쪽에 세워진 아치를 통해 퇴장한다. 그럼 관중들은 박수를 친다. 이 퍼포먼스를 여러 팀이 차례로 보여준다. 말과 사람들 복장만 조금씩 다를 뿐 진행은 똑같다.

퍼포먼스만 봐서는 당최 스토리를 가닥잡을 수 없었다. 현지 지자체의 해설로는 이것이 ‘천마(天馬)’, 즉 하늘에서 내려온 말을 기리는 행사라고 하는데, 왜 천마가 와서 어떻게 했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밋밋한 퍼포먼스가 반복되면서 30분 이상 진행되는데, 모두 집중해서 보는 모습이었다. 더 잘 보기 위해 강둑 위 높은 곳에 올라가 서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에는 대체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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