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허인회
일러스트 허인회

한국 방송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일주일 만에 종영한 드라마가 생겼다.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다. 지난 3월 22일 첫 방영한 이 드라마의 막을 내리게 만든 건 MZ세대였다.

조선을 정복하려는 악령과 그에 맞서 싸우는 인간을 그린 ‘조선구마사’는 박계옥 작가가 쓴 사극이다.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드라마에서는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 거의 그대로 등장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졌는데 실존인물을 비하하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시대 인물이 중국식 복식을 한다거나 중국 음식을 먹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더 큰 공분을 샀다. 시청자들은 이미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에서 역사왜곡 문제로 한바탕 논란이 있었던 뒤였기에 좀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대로 방영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몇몇 발 빠른 네티즌은 ‘광고주에게 압박을 넣자’는 의견을 냈다. 제작을 지원하거나 광고 협찬을 한 기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정리된 게시물이 공유되었고, 드라마의 제작지원을 맡았던 동진제약의 ‘호관원’이 가장 먼저 지원을 취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이틀 만에 광고 기업 24곳과 제작지원 기업 3곳이 모두 광고와 지원을 취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매우 빠르게 진행된 ‘조선구마사’ 사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똑같이 역사왜곡 논란이 있었던 ‘철인왕후’와의 차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에 올라온 게시물(참고 내용)을 보자.

여기에 동의한다는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ㄹㅇ 금융치료가 답임ㅋㅋㅋㅋㅋㅋ” “21세기엔 금융치료가 최고야”.

흥미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금융치료’다. 최근 만들어진 이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자면 ‘돈으로 본때를 보여주는 행위’ 정도가 될 것이다. 보통 여타의 법률적·제도적 대책이 들어먹히지 않을 때 ‘금융치료’가 더 효과적이라는 식으로 쓰인다.

단어로서 ‘금융치료’는 새로운 것이지만 그 뜻을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얼마 전만 해도 금융치료의 대표적 사례가 전국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 이른바 ‘노재팬 운동’이다. 그간 일본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있을 때마다 국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 뜻’을 표하곤 했지만 막상 ‘불매운동’만큼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둔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금융치료가 정답’이 된 셈이다.

불매운동의 동력은 ‘공정’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누가, 어떤 이유로 금융치료를 주도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금융치료를 외치는 대부분은 MZ세대다. 금융치료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여론조사 전문기업 리얼미터가 당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20대와 30대는 54.2%와 57.2%에 달했지만 60대는 29%에 그쳤다.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을 이끌어낸 세대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온라인상에서 입을 모아 비판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생기면 MZ세대는 움직인다.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상에서 게시물을 퍼다 나르고 댓글을 달며 움직인다. 예전에는 이런 ‘움직임’이 다소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온라인상의 여론이란 시끌벅적하기만 하지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요즘의 변화란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특정되지 않은 다수의 산발적인 움직임이 변화를 이끌어내곤 한다.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맨 처음 남양유업 불매운동은 기업의 ‘갑(甲)질’을 알린 언론보도와 그에 분노한 소상공인들의 항의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2013년 첫 갑질 보도가 나온 이래로 지금껏 불매운동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힘이 컸다. 천혜정 이화여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정치적 소비주의, 소비자불매행동 그리고 소셜미디어’라는 논문을 쓰며 조사한 바를 보면 그렇다. 논문을 보면 어떤 식이든 불매운동에 동참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중 20~30대의 비중이 더 높게 나타났는데, 불매운동 참여자는 소셜미디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소셜미디어가 “불매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할 정도다.

불매운동, 즉 금융치료가 소셜미디어를 활발히 이용하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본다면 MZ세대의 관심사는 불매운동의 주된 동력이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MZ세대의 관심사는 ‘공정’이다. 주간조선 2650호 기사 ‘주린이? 패닉바잉? 우리에게 재테크는 OO이다’에서도 밝혔듯이 MZ세대는 다른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것 또한 싫어한다. 천혜정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불매운동을 해본 사람의 85.2%는 남양유업 불매운동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해본 50.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전통적으로 사회문제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방법은 다소 정치적인 행위였다. 집회에 참여한다거나 시민단체 활동에 동참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치료는 그렇지 않다. 남양유업 불매운동만 하더라도 어느 시민단체가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금융치료는 온라인 촛불시위

좀 더 분석해보자. 사실 MZ세대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다. 지금은 장년층이 되어버린 386세대와의 연결고리는 희미하다. 이들이 대학에 다닐 무렵에 운동권은 고리타분한 몇몇 선배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었고 학생회는 ‘비(非)권’에서 당선되었다. 시민단체는 이미 제도에 편입되었다. MZ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삶을 이어나가는 일이지 정치가 아니다.

더군다나 MZ세대는 시민단체나 제도가 이끄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목격하고 자랐다. 당장 최근에만 하더라도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시민단체 출신으로 사회운동에 앞장섰지만 성추행 가해자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 대표들이 권력기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김영순 전 여성단체연합 대표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피소 움직임을 미리 알려주고 논의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거대담론을 외치는 제도권 정치 집단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불신(不信)은 이들이 이끄는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대신 알아서 움직이는 일이 늘어났다. 다시 말해 정치 참여는 줄어들었지만 사회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다른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익명의 네티즌, 특히 MZ세대는 거대담론 없이도 그때그때의 목적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목표를 위해 행동한다.

이들의 행동이 대개는 ‘돈’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제도권 정치 집단에 대한 불신은 정치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대신 돈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MZ세대는 정치와 분리된 대신에 자본과 가까워졌다.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고, 역사왜곡 드라마의 방영을 막겠다는 의지를 광고주를 압박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돈을 통한 실력 행사는 차선책이 아니라 최선에 가까운 저항 행위가 됐다. 한 연구 결과를 보자.

송유진 충북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관련한 온라인 게시글에서 2만25개 단어를 추출해본 결과는 다소 진취적인 것에 가까웠다. ‘텍스트 마이닝과 언어 네트워크 분석을 이용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특징과 의의 탐색’이라는 논문으로도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불매운동과 함께 많이 언급된 단어는 노력, 이해, 감사, 응원 같은 긍정적인 단어였다. 이 단어들은 자신, 의견, 자유, 개인 같은 주체적인 단어와 얽혀 의미를 더했다. 말하자면 불매운동은 다른 누구의 이끌림 없이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참여자들끼리 격려해가며 이어나가는 것이다. 송유진 교수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과거의 단체 주도 불매운동에서 개인이 주도하는 불매운동으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불매운동의 결과에만 집중하던 예전과 달리 “불매운동 참여과정에서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표현하고 자아의식을 고양하는 과정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불매운동, MZ세대의 금융치료는 MZ세대만의 저항 방식이라는 얘기다. 이제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댓글을 남겨가며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불매운동 넘어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런 점에서 금융치료는 MZ세대의 중요한 가치관을 지켜내는 데에서도 역할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바로 민족주의와 관련된 이슈다.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은 MZ세대의 금융치료가 방어적인 불매운동을 넘어서 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민족주의는 MZ세대에 중요한 가치인데, MZ세대가 대중문화를 폭넓고 자유롭게 누리는 세대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한국의 대중문화 팬덤은 스타를 홍보하고 팬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민족주의 정서에 많이 의지해왔다. ‘국민배우’ ‘국민MC’ 같은 표현을 사용하거나 스타가 외국에서도 얼마나 인정받는지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유튜브에서는 K팝 아이돌그룹의 춤과 노래를 보며 울고 웃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리액션 비디오’가 한창 유행했는데 이 역시 팬덤이 민족주의를 잘 활용한 경우다.

때때로 ‘국뽕’ 같은 단어로 대체해서 쓰이기도 하는 이 민족주의적 정서는 반대로 역사왜곡, 과거사 문제 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이나 중국과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온 것이 MZ세대였던 이유다.

그 MZ세대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융치료’를 선택한 첫 번째 사례가 바로 드라마 ‘조선구마사’다. 그간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는 MZ세대의 공분을 사왔지만 감정적 반응만으로는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을 이끌어내면서 MZ세대는 금융치료를 통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허울뿐인 방통위에 민원을 신고”하는 것은 별 소용없었다는 커뮤니티 게시글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금융치료의 효과를 알게 된 MZ세대는 앞으로도 금융치료를 이어나갈 것이다.

참고 내용(커뮤니티 ‘더쿠’ 게시물)

제목: 앞으로 매국 드라마, 역사왜곡 드라마가 나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버린 대한민국 네티즌들

내용: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울뿐인 방통위에 민원을 신고해서 ‘정상적인’ 절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광고(자본)를 끊어서 1차적으로 타격을 주고 전방위적 압박을 통해 계속해서 커뮤니티에 끌올되게 만들고 이미지에 타격을 줘서 기사와 뉴스가 나게 해야 하는 걸 알아버림

※MZ세대: 밀레니얼과 Z세대를 합친 말로 1980~2000년대 초반 출생한 20~30대를 아우르는 말

김서윤 하위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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