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랑공동체 교회 담벼락에 설치된 베이비박스의 모습.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사랑공동체 교회 담벼락에 설치된 베이비박스의 모습.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 출생일 2021년 ○월 ○○일’.

지난 5월 1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의 아기방 칠판에는 아기 1명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창문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피부가 아직 불그스름한 신생아가 자원봉사자 품에 안겨 있었다. 주사랑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에 며칠 전 들어온 아이였다. 베이비박스를 국내에서 최초로 만든 이종락 목사가 아기방 왼편에 있는 베이비박스의 바깥쪽 문을 열자 건물 전체에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 음악이 울려퍼진다는 것은 긴급 보살핌이 필요한 아기가 왔다는 말이다. 음악 소리에 놀라 깬 아기가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베이비박스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부모가 아기를 키울 수 없을 때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는 특별한 상자이다. 벼랑 끝 아기의 마지막 피신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아기의 ‘유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돼왔다. 베이비박스는 이종락 목사가 2009년 교회 담벼락에 상자를 설치한 것이 시작이었다. 가끔 교회 앞에 버려진 아이가 얼어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2년 입양특례법 시행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입양특례법의 골자는 친모가 출생신고를 해야만 입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실명 신고에 부담을 느낀 미혼모들이 입양기관이나 시설을 기피하고 베이비박스를 찾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2013년부터는 거의 매일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퍼졌다. 2014년부터는 경기 군포시의 새가나안교회도 교회 입구 옆에 베이비박스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2021년 5월까지 주사랑공동체와 새가나안교회에는 각각 1879명, 135명의 아이가 거쳐갔다.

법·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베이비박스

베이비박스의 문이 열리기까지 사연은 다양하다. 막상 출산은 했는데 아이를 키우기가 막막한 미혼모나 청소년,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생모, 도저히 아기를 양육할 여유가 없는 부모 등이다. 대부분 아이를 포기하는 경우지만 ‘잠시만 맡아주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절절한 사연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기자가 주사랑공동체 교회를 찾은 5월 11일에도 한 미혼부가 아이를 위탁하러 왔다. 친모가 아이를 맡기고 잠적했는데, 혼자 기를 수가 없어 ‘아기와 죽자’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베이비박스를 떠올리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 목사는 “아기 아버지가 어떻게든 다시 데려갈 테니 그때까지만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전했다. 양승원 주사랑공동체 사무국장은 “돌아올 부모를 위해 성심성의껏 아기를 위탁하고 있다”며 “어려운 사정에도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그래도 아기를 살리려고 온 거다”라고 말했다.

베이비박스 운영은 전적으로 교회의 몫이다. 베이비박스를 공인 시설로 인정하는 법이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인력과 비용 모두 교회에서 해결해야 한다. 신생아를 돌보고, 언제 울릴지 모를 베이비박스 벨에 대비해 교회에 상주하는 사람들 모두 신도나 자원봉사자다. 새가나안교회는 지난 1월 8일 이후로 아기가 들어온 적이 없지만, 관계자가 오전 11시부터 자정까지 사무실에 머물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한다. 심야에는 새벽 예배를 기다리는 신도들이 숙직한다. 지난 5월 10일 찾은 새가나안교회 아기방에는 요람, 젖병소독기뿐 아니라 신생아의 유전자검사 동의서를 작성하는 펜까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영아 관리를 전담하는 김은자 권사가 주기적으로 청소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인이 사건’에 이어 양부모의 입양아 학대가 연달아 터진 가운데 베이비박스 아기 학대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 5월 10일 주사랑공동체의 자원봉사자 A씨가 생후 8일 된 베이비박스 아기를 학대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지난 2월까지 4개월간 자원봉사를 해 온 A씨는 아기방에서 심야 근무를 하던 중, 같이 일하던 봉사자가 우는 아기를 데리고 방을 나간 틈에 아기를 거꾸로 쥐고 흔드는 등 학대했다. 나중에 다른 봉사자가 아기 얼굴에 긁힌 자국을 발견하고는 교회에 알렸고, 교회는 A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종락 목사는 “좋은 일 하러 오신 분이라 믿었는데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며 “자원봉사자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자원봉사에 의지해 시설을 꾸려갈 수밖에 없는 시설의 입장에서는 관리에 한계가 있는 셈이다.

지난 5월 13일 새가나안교회 입구에 설치된 베이비박스가 보인다. 주사랑공동체는 부모가 보다 안전하게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방 형태의 베이비박스인 ‘베이비룸’도 운영하고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5월 13일 새가나안교회 입구에 설치된 베이비박스가 보인다. 주사랑공동체는 부모가 보다 안전하게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방 형태의 베이비박스인 ‘베이비룸’도 운영하고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비극

이처럼 베이비박스의 아이들은 법적·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법의 보호권 밖에 있는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더 큰 비극은 ‘입양’을 가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양부모 학대 사건으로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지만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양부모가 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근거도 없다. 아동권리보장원이 발표한 ‘2019년 아동학대 사례로 판단된 피해 아동의 가족 유형’에 의하면 입양 가정에서 일어난 학대는 0.3%이다. 이지현 서울시 아동복지센터 사무관은 “아동학대는 친부모, 양부모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새가나안교회의 김은자 권사는 “고아원으로 가는 것에 비하면 입양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라며 “18세가 될 때까지, 그 이후에도 부모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비박스의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 가정의 보호를 받는 대신 보육원 등 시설로 가게 된다. 원칙적으로 친모가 출생신고를 해야만 입양이 가능한 입양특례법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미등록’ 아이들은 바로 출생신고를 할 수도 없다. 아기가 들어오면 교회는 경찰에 신고해 유전자검사를 진행하고, 시에서 운영하는 일시보호소로 일단 인계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시설(보육원)이나 입양전문기관으로 보내진다. 보육원에 간 아이는 원장의 성씨를 따서 출생신고를 하게 된다. 원장 재량에 따라 입양이나 위탁을 갈 순 있지만, 보육원의 입양 노력을 지원하거나 강제하는 제도는 없다. 2018년 감사원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베이비박스 아동 가운데 97%가 시설로 보내지고, 입양이나 위탁 등 가정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3%에 불과했다.

베이비박스는 법적으로 공인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가 입양전문기관에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다. 시설에 보내지 않으려면 주변 지인들을 동원해 입양을 권장할 수밖에 없다. 베이비박스의 아이를 입양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은 입양을 희망하는 사람이 직접 구청에 신청한다. 신청이 접수되면 구청은 신청자의 성씨를 따서 아기에게 주민번호를 발급한다. 가정법원이 입양 희망자가 후견인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면, 마지막으로 예비 양부모 심사를 통과해야 아이를 입양할 수 있다. 주사랑공동체, 새가나안교회에서는 아이가 일시보호소로 가기 전에 입양을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아이는 가정 보호를 받기가 더 어렵다. 이종락 목사는 “베이비박스에 들어오는 아이 중 상당수가 장애아”라며 “이런 아이들은 입양이 어렵기 때문에 무조건 시설로 보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베이비박스를 합법적인 보호시설로 인정해야 더 많은 아이를 가정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베이비박스가 입양기관과 협력하면 입양 통로가 늘어나는 셈이다. 이종락 목사는 “영아일시보호소로 인정해주면, 여기서 직접 입양기관과 연락하며 위탁, 입양 부모를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병원 등에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외국에서는 병원을 합법적 아동보호소로 인정해, 아이들을 쉽게 입양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체코, 독일은 아기가 들어온 지 6~8주가 지나면 자동으로 아이를 입양 대상자로 등록한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지케이병원 역시 정부가 ‘불법이 아니다’라고 승인했다. 미국은 부모가 익명으로 경찰서나 소방서에 아이를 맡겨도 바로 입양될 수 있도록 하는 ‘세이프 헤이븐’ 법을 모든 주에서 시행하고 있다.

한편 베이비박스를 합법화하기보다는 기존 법을 강화해 유기 아동을 줄이자는 의견도 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베이비박스는 궁극적으로 없어져야 할 시설”이라며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 대한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는 보편적 출생등록제를 도입하면 유기 아동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산 기록을 부담스러워할 미혼모 등에 대해서는 “부모가 원하면 신원을 철저히 보장하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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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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