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국기들이 태극기와 함께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photo 연합
외국 국기들이 태극기와 함께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photo 연합

김모(36)씨에게 주한 외국 대사관은 선망의 직장이었다. 개인사로 인해 2009년 유학을 중단하고 국내에서 일할 계획을 세워야 했던 김씨는 “당시 공무원 열풍이 불어 공무원 준비 학원을 다녀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겨를은 없었다”며 “대신 대사관 직원도 공무원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유학 경험을 경력 삼아 몇 개 대사관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 합격 소식을 알린 곳은 동남아시아권의 한 주한 대사관이었다. 그는 2012년 12월부터 해당 대사관으로 출근했다. 동남아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국가의 대사관이라 직원은 열댓 명에 불과했지만 ‘대사관’이기에 남부럽지 않은 대우에 적지 않은 급여를 손에 쥘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기대는 해를 거듭할수록 무너져내렸다. 급여는 그해 최저시급보다 조금 높았고, 대사관 측과의 연봉협상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김씨를 포함한 한국 직원들은 추가근무수당은 물론이고 4대보험, 퇴직금 등 기본적인 처우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직군에 따라선 월급이 아니라 일급으로 급여를 챙기는 직원들도 있었다. 입사 당시 한 선임 직원은 그에게 “싱가포르나 태국처럼 더 좋고 큰 대사관을 놔두고 왜 하필 여기로 왔냐”라고 말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유를 조금씩 알아갔다고 한다.

대사관은 동료 직원의 퇴직금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 비상식적인 고용행정을 이어갔다. 직원들은 처우개선을 요구했지만 변화되는 건 없었다. 당시 김씨의 동료는 이를 해당 국가 최고지도자에게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곤 2019년 부산에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개최되던 때 수행원 근무를 자처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최고지도자에게 전하는 편지에서 ‘저는 ○○○○(나라 이름)에 충성을 다했지만 ○○○○는 저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는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해주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못했다.

김씨를 포함한 일부 직원들은 나중에야 자신들의 고용계약서에 다음과 같이 불공정한 내용이 포함됐다는 걸 인지했다. ‘the Embassy and the Government of ○○○○ will not be responsible to compensate fringe and retirement benefits after completing the service.(○○○○ 정부와 대사관은 퇴임 후 퇴직수당과 부가 혜택을 줄 책임이 없다.)’ 김씨는 “계약서 자체가 불공정하게 이뤄진 게 많았는데 영어를 알지 못하는 일부 직원들은 퇴직을 앞두고서야 이런 내용을 깨닫고 한탄하기도 했다”라며 “대사관은 너희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냐라며 맞대응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 같은 처우 문제를 이메일을 통해 본국에 전했지만, 돌아온 건 대사관 측의 압박이었다. 결국 그는 올해 2월 10년 가까이 일하던 대사관에서 나와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는 신세에 놓였다. 아직 대사관에 남은 직원들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해 문제제기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실정이다.

“직원 처우는 해당국 대사 마음”

외교부에 따르면 올해 기준 주한 공관은 총 146개로 대사관 113개, 총영사관 8개, 국제기구 25개다. 여기서 근무하는 전체 한국인 직원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최소 1000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전·현직 직원들 말에 따르면 이들 대사관의 처우와 복지는 대사관마다 천차만별인데 주요국을 제외하면 상당수 국가의 대사관이 앞서 김모씨 근무처와 닮았다고 한다.

중동권에 속한 한 주한 외국 대사관 전직 직원은 “일반 기업과 같은 복지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계약서상에 명시되어 있는 상여금을 몇 년간 받지 못하는 직원들도 있었다”며 “계약상의 문제는 담당 외교관을 통해 본국에 보고하는 식으로 해결되는데 직원들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아시아권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전직 관계자는 “주요국들의 경우 급여를 조금 더 높게 쳐주는 대신 4대보험 등은 보장할 수 없다고 하는 곳도 있다”며 “주한 대사관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2018년부터 외교 공관들에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가입을 보장할 것을 권고해왔는데 현장에선 전혀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대사관 직원들의 처우 문제가 이렇게 심화하는 이유는 주한 공관이 일반 기업처럼 한국 노동법을 적용받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의 이상혁 노무사는 “국내 근로기준법 준수 규정이 계약서에 없거나 이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어도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국내 영토에 있는 근로자는 모두 보호받을 수 있다. 이들 법규는 당사자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강행법규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사관이 한국법을 적용받는 주체냐는 따로 떼서 봐야 한다. 대사관 영토가 특수한 지위를 갖는 것과도 비슷한 것인데 이에 대한 국내 논의나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아무 말 못 하는 국내 정부

하지만 한국법이 적용돼 노동법 위반 사안이 적시된다 해도 대사관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국제협약인 ‘외교 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따르면 외교사절단은 면책특권을 갖는다. 국내에서 시시비비를 따져 묻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1989년 국내 법원은 프랑스대사관이 한국인 직원 노조를 결성한 노조위원장을 해고한 데 대해 판결 권한이 없다며, 노조가 제기한 해고무효확인 청구소송과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모두 각하한 바 있다. 최근 벨기에대사 부인의 갑질·폭행 논란 등 주한 대사관 안팎에서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앞서의 이상혁 노무사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대사관처럼 직원이 많은 곳과 달리 규모가 작은 곳에선 대사의 의중이 복지나 내부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지난해 외교부 측에 관련 문제를 전하기도 했는데 당시 외교부 측은 “주한 공관은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우리 국내 법률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라면서도 “대사관의 고용 관련, 구체적인 고용·근로 조건 등 상세 사항에 외교부가 별도로 관여하고 있지는 않다”라고 답했다. 외교부와 고용노동부는 “직원의 고용은 전적으로 대사관 재량에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2018년 한국노총은 산하에 외교 공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 처우개선을 위한 노조(전국노동평등노동조합 재외공관행정직지부)를 결성했지만 해당 노조는 아직까지 외교부 소속 재외공관 행정직 직원들로만 구성돼 있는 형편이다. 주한 공관 직원들은 아직 가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국노동평등노동조합의 문현군 위원장은 “주한 공관 직원들의 노조 가입을 위해선 해당 대사나 주재국과 교섭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보니 도움 요청이 와도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앞서의 김씨는 “한마디로 우린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 지위를 얻고 싶다. 재직 중에 이런 문제를 밖으로 꺼내기는 사실상 불가하다. 정부와 국회의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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