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로마의 기마 무사 모습 비교. 둘 다 유물로 발굴되어 있는 마구와 복장의 디테일을 적용해서 복원한 플라스틱 조형물이며, 비슷한 시기인 3~4세기 경의 복장이다. 사진 출처: (왼쪽) 부산 복천박물관 전시품을 촬영한 Gorekun 작품. flickre 무료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gorekun/3975025884 (오른쪽) 영국 캔터베리 로마박물관 전시품을 촬영한 Linda Spashett의 작품. Wikimedia Commons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man_Museum_007.jpg
가야와 로마의 기마 무사 모습 비교. 둘 다 유물로 발굴되어 있는 마구와 복장의 디테일을 적용해서 복원한 플라스틱 조형물이며, 비슷한 시기인 3~4세기 경의 복장이다. 사진 출처: (왼쪽) 부산 복천박물관 전시품을 촬영한 Gorekun 작품. flickre 무료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gorekun/3975025884 (오른쪽) 영국 캔터베리 로마박물관 전시품을 촬영한 Linda Spashett의 작품. Wikimedia Commons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man_Museum_007.jpg

앞선 연재 기사에서 우리는 가야, 특히 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이 로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의 사회를 이룰 조건을 여러 모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봤다. 로마는 현재 세계사적으로 화려한 문명으로 손꼽히며 상당히 속속들이 그 역사의 디테일이 전해지고 있다. 반면 가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20세기 말 토목 공사 등으로 땅 속이 열리면서, 예상 외로 많은 가야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그 많은 유물들을 계기로 가야사를 다시 봐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감대가 굳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가야는 여전히 “오랜 옛날 남쪽 바닷가에 있었던” 신화 속 작은 나라인 것처럼 표상되는 실정이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시회, ‘가야 본성 칼과 현’과 같은 공식적 담론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발전했다가 약해져 갔을 가능성이 높은 가야와 로마, 쇠망 이후의 운명에는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조상이 빛나려면 자손이 잘 되어야 한다고, 두 국가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한 후 그 문화유산이 이어지는 과정이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로마 제국은 쇠락해가는 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유데아의 종교인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고, 거기서 더 지중해 서쪽으로 기독교를 전하는 허브와 같은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이후 중세기를 통해 지중해역의 북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유럽 종족들의 정신적 구심으로서, 지중해역 동쪽과 남쪽에 위치한 아랍‧아프리카의 종교인 이슬람교와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됐다. 이렇게 기독교가 유럽 전체의 종교가 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서의 파워를 잃은 이후에도 여전히 무시 못할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지오반니 크레스피의 그림 ‘십자군’. 성모자의 가호 아래 이방인들과 싸우는 십자군 무사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이 시대에 기독교가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굳게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iovan_battista_crespi_detto_il_cerano,_strage_degli_albigesi,_1628-32.jpg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지오반니 크레스피의 그림 ‘십자군’. 성모자의 가호 아래 이방인들과 싸우는 십자군 무사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이 시대에 기독교가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굳게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iovan_battista_crespi_detto_il_cerano,_strage_degli_albigesi,_1628-32.jpg

이후 근대기에 접어들면서, 그때까지는 유럽에서도 후진지역이었던 서유럽 국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이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도 식민지를 개척했다. 지구상 최강자가 된 서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로서 그리스와 로마를 내세웠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행적이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됐다. 이 부분이 지금까지도 지구상 어느 지역의 역사보다 상세하게 밝혀져 있는 까닭은 이런 지식-권력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비해 가야는 쇠망 후의 운명이 조금 달랐다. 일단 가야보다 오래 국격을 유지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가야의 화려했던 행적을 지우려는 동기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이유로 가야 쇠망 후 그 장대했던 위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영토 중에서도 노른자 땅을 상당 기간 가야에게 빼앗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리즈들에서 보았듯이, 바닷가와 강가의 비옥한 지역으로 배후에 산이 둘러쳐져 있는 곳에서는 가야의 흔적들이 상당히 발견된다. 특히 백제와는 남서해안을 거의 공유하다시피 하면서 영토 경쟁을 했던 것 같다. 마치 한 때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지중해역의 패권을 나누어 가지며 경쟁했듯이 말이다.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 해안 지역의 판도. 주로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나누었으며, 부분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일리리아, 이집트, 리디아 등도 점유하고 있었다.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지도에 기반, 이진아 작성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 해안 지역의 판도. 주로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나누었으며, 부분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일리리아, 이집트, 리디아 등도 점유하고 있었다.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지도에 기반, 이진아 작성

신라는 더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가야와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중국 정통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대목을 보자.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변진은 진한과 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대체로 비슷하나 언어와 풍속이 다르다)”고 했다. 변진, 혹은 변한은 나중에 고대국가로서 가야로 발전하고,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다.

즉 신라와 가야는 고대 국가 이전의 부족 사회 단계에서부터 거의 경계도 없이 살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고대 국가로 발전한 이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수도 없이 영토 싸움을 했다는 것을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가야가 쇠망하고 거의 대부분 신라에 통합됐다. 그 시점 이전에는 가야가 여러 모로 신라보다 문물 수준이 앞서 있었다. 그 유산을 전부 흡수한 신라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가야에서 받은 거고, 원래 우리 거는 이 정도였다고 일일이 밝혀놓았을까? 가야의 문화적 유산은 당연히, 세계사의 모든 사회들에서 그랬듯이, 승자인 신라의 것으로 되어버렸을 테다. 또한 신라는 당연히 한때 자신보다 앞서 갔던 가야의 모습을 축소하려 했을 테다.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한반도의 국가들은 서기 7세기 끝 무렵부터 약해지기 시작한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적절한 맥락에서 분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중국이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만일 가야가 그 전성기에 중국에서도 노른자 땅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면, 새롭게 강자가 된 중국이 그 사실을 전해주는 흔적을 그대로 두었을까?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건, 요즘 중국이 한반도의 문화유산과 관련해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중세가 지나가고 근대기도 상당히 접어들어 중국이 약해져 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는 일본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한반도 강점 이후 한민족을 미개하고 무력한 민족으로 만들어버리려고, 또 그런 것처럼 알리고 교육하려고 한 노력들에 대해서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웬만큼은 안다. 가야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전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면, 일본은 한민족의 역사 중에서 그 부분을 가장 집중해서 지우려고 했으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가야사를 복원하려면 종전과 같은 역사 연구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종전의 연구 방식이란 기본적으로 실증주의 역사학의 틀이며, 그 기본 입장은 ‘역사연구는 반드시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 발굴, 소개 및 그 분석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확립한 전통이다. 당시 식민지 개척으로 지구상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접하게 된 서구의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자기중심적인 추측성 역사학의 궤변을 늘어놓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실증주의 역사학은 이후 지금까지도 역사연구의 기본적 틀을 이루면서 역사 탐구를 진지한 학문의 영역으로 다듬어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경직된 실증주의는 또 다른 문제를 나을 수 있다. 구체적인 사료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연구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료가 왜곡되어 있을 경우에는 역사적 진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이 흘러갈 수도 있다는 문제다. 20세기 후반부터 실증주의 역사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이유다.

가야의 영역, 실증주의적 역사관 및 환경역사학 관점 비교. 지도 출처: (왼쪽) Historiographer의 Wikimedia Commons 지도를 한국어로 번역한 Grampus의 지도에 변한 부분 표기하고 표제를 붙임. 원본 지도 링크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C%82%BC%EA%B5%AD_%EC%8B%9C%EB%8C%80#/media/%ED%8C%8C%EC%9D%BC:History_of_Korea-001_ko.png (가운데) KJS615의 Wikimedia Commons 지도에 가야 부분 표기하고 표제 붙임. 원본 지도 링크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_%EC%8B%9C%EB%8C%80#/media/%ED%8C%8C%EC%9D%BC:History_of_Korea-Three_Kingdoms_Period-375_CE.gif (오른쪽) Wikimedia Commons의 동아시아 백지도를 토대로 이진아 작성
가야의 영역, 실증주의적 역사관 및 환경역사학 관점 비교. 지도 출처: (왼쪽) Historiographer의 Wikimedia Commons 지도를 한국어로 번역한 Grampus의 지도에 변한 부분 표기하고 표제를 붙임. 원본 지도 링크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C%82%BC%EA%B5%AD_%EC%8B%9C%EB%8C%80#/media/%ED%8C%8C%EC%9D%BC:History_of_Korea-001_ko.png (가운데) KJS615의 Wikimedia Commons 지도에 가야 부분 표기하고 표제 붙임. 원본 지도 링크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_%EC%8B%9C%EB%8C%80#/media/%ED%8C%8C%EC%9D%BC:History_of_Korea-Three_Kingdoms_Period-375_CE.gif (오른쪽) Wikimedia Commons의 동아시아 백지도를 토대로 이진아 작성

환경역사학은 실증주의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는 지금까지 서구 학계에서 시도되어 왔던 환경역사학의 방법론을 더욱 확대 적용하고자 한다. 그런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볼 때, ‘가야’라는 국호를 쓴 고대 국가의 출발은 기원전 350년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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