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8일 소련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제2수상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대화록. 기밀해제된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의 현대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문서 오른쪽 위에 ‘극비’란 문구가 적혀 있다.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1971년 10월 8일 소련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제2수상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대화록. 기밀해제된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의 현대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문서 오른쪽 위에 ‘극비’란 문구가 적혀 있다.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기 위해 북·소 동맹을 깨자”는 김일성의 제안이 담긴 구(舊)소련 기밀문건이 발견됐다. 1971년 10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당시 수상)의 특사로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에게 건넨 제안이다. 브레즈네프와 만난 자리에서 박성철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 조·소우호조약(북·소 동맹)을 파기하겠다는 선포를 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브레즈네프에게 던지고 양해를 구했다. 대신 “조·소(북·소) 동맹이 깨져도 공산주의자들 간의 우호협력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성철은 북한 정권수립의 핵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항일연군(구소련 88독립보병여단) 출신으로 6·25전쟁 때 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참전하고 후일 외무상, 제2부수상, 정무원 총리, 부주석까지 지낸 김일성 정권의 핵심이다. 7·4남북공동성명 체결 직전인 1972년 5월에는 김일성의 특사로 배편으로 서울에 와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마주 앉기도 했다. 브레즈네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후임으로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공산권의 일인자였다. 박성철은 1982년 브레즈네프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을 때도 조문단을 이끌고 소련을 찾았다.

3대에 걸친 “주한미군 철수”

50년 만에 최초 공개된 박성철-브레즈네프 대화록은 최근 북한이 한·미 연합군사훈련 취소와 주한미군 철수를 거듭 요구하고 나선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지난해 6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단절한 남북통신선을, 지난 7월 27일 복원해주는 대가로 한·미 연합훈련 취소를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 사전연습 첫날인 지난 8월 10일에도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명의의 조선중앙TV 담화를 통해 “연습의 규모가 어떠하든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든 전쟁 시연회, 핵전쟁 예비연습이라는 데 이번 연습의 침략적 성격이 있다”며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여정은 이날 담화가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위임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할아버지(김일성) 때부터 주장해온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손자손녀(김정은·김여정)대까지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한반도 적화통일의 최대 걸림돌로 간주해온 주한미군을 어떠한 위협으로 느끼는지 잘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50년 만에 기밀해제된 해당 대화록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자료를 보관하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현대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고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국민대 책임연구원이 주간조선에 제공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소련 공산당 국제부 부부장을 지낸 바딤 트카첸코가 이 같은 주장을 언급한 바 있으나 대화록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조약 깨도 우리는 공산주의자”

양자 간의 대화는 브레즈네프와 김일성의 건강을 묻는 말로 시작한다. 이후 “브레즈네프 동지, 우리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김일성 동지의 생각을 전달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본격화하는 해당 대화에서 박성철이 힘주어 강조하는 부분은 “남조선(남한)이 미국, 일본과의 기존 조약들을 무효화하면 저희(북한)도 조·소(북·소) 동맹조약을 취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선포할 것”이란 대목이다.

이와 함께 박성철은 소련 측에 국제사회에 몇 가지 지지도 요청한다. △남조선에서 미군의 완전철수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 △미군의 정찰과 군사훈련 등 적대적 행위의 중단 △북남 사이의 정치적 토론의 지속 등이다. 이와 함께 “남조선 괴뢰군(국군을 지칭)을 미사일과 핵무기를 포함한 현대적 무기로 무장하지 아니할 목표”도 소련 측에 도와달라고 요구한다. 박성철은 “모든 행위들은 우리 공화국에 적대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반(反)소련 행위”라며 “미국이 이런 행위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긴장상태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조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성철은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소련 측에 △유엔군의 이름으로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해산 △조선 문제 토론 시 조선(북한) 대표 초청 등에 관해서도 유엔에서 힘을 실어줄 것을 주문한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대화가 이뤄진 1971년 10월 8일은 중국(중공)이 대만(중화민국)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대체하기 직전”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유엔 안보리 가입은 같은 해 10월 25일로, 회담 당시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편을 들어줄 국가는 소련이 유일했다.

1971년 10월 8일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박성철-브레즈네프 회담은 중·소 분쟁 와중에 공산권에서 북한의 몸값이 극대화됐던 시점에 진행됐다. 1971년 7월 극비리에 이뤄진 헨리 키신저-저우언라이(周恩來) 간 미·중 회담에 이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訪中) 계획이 이미 발표된 시점이다. 이에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소련과 중국은 북한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던 시점이었다.

이 같은 국제정세를 반영하듯 당시 대화에서 브레즈네프는 박성철에게 “중국 측과 본문제(북·소 동맹 파기)를 토론하지는 않았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이에 박성철은 “(중국과) 토론하지 않았다”며 “귀측(소련)과 이 문제를 토론하고 귀측으로부터 반대가 없으면 이 문제를 다시 우리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에서 토론할 것”이란 계획도 밝힌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브레즈네프는 중·소 분쟁이 한창인 와중에 북·소 동맹이 파기되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위상이 약화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성철은 북·소 동맹 파기에 대한 소련 측의 우려를 의식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설사 북·소 동맹 조약이 파기되더라도 이는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기 위한 ‘평화 공세’의 일환일 뿐이고, 북·소 간의 동맹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것임을 소련 측에 확신시키는 것이다. 박성철은 “(북·소 동맹) 조약 무효화는 남조선에서 미·일 침략자를 제거하고, 남조선 괴뢰의 침략군사조약(한·미 동맹) 무효화를 목표로 하는 전술적 조치일 뿐”이라며 “형제적 사회주의 국가들은 조약 때문에 동맹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레닌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으로 공고한 동맹관계를 세운다”고 설명한다.

박성철, 김대중 높은 평가

한편 당시 대화에서 박성철이 남한 정계의 거물로 부상한 김대중에게 상당한 관심을 드러낸 것도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회담이 이뤄지기 5개월여 전인 1971년 4월, 7대 대선 때 김영삼, 이철승을 제치고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위협하며 최대 정적(政敵)으로 떠올랐다. 박성철은 브레즈네프에게 남한 정세에 대해 설명하면서 “김대중은 출마 캠페인에서 좋은 구호들을 내세웠다”며 “권력을 잡으면 향토예비군, 중앙정보부, 정보원 파견을 중단하고 북남 교류를 세우고 북조선(북한)과 평화통일 문제에 대한 회담을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고 설명했다.

박성철은 김대중의 또 다른 공약이라며 △남베트남에서 군대 철수 △소련·중국과 수교 △일방적 친미·친일 외교정책 포기 △한반도 4대국(미·일·중·소) 부전(不戰)보장론 등을 브레즈네프에게 소개하며 “그의 구호 중 주한미군 철수만 없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성철은 이에 대해 “우리는 그가 미 제국주의자들의 압박을 피하도록 그랬다고 본다”며 “그(김대중)는 젊고 영향력이 크지는 않지만 인기가 많다”는 점을 브레즈네프에게 강조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북측은 김대중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봉암(진보당 당수)과 달리 ‘자기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이 과거 발견한 또 다른 구소련 외교문건에서 김일성은 방북한 드미트리 폴랸스키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겸 내각 부의장에게 “1956년 남한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은 우리 측 사람”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주간조선 2608호 참조>

“브레즈네프, 김일성 도발 우려”

결과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기 위해 북·소 동맹 파기를 선포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대화에서 브레즈네프 역시 “양 국가 사이에 책임 있는 조약으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정치국에서 상의하겠다”고 즉답을 피한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북·소 동맹은 구소련 몰락 때까지 유지됐다”며 “소련이 러시아로 바뀐 다음에 동맹조약은 중단되었고, 2000년에 군사동맹이나 한반도 유사시 자동개입 조항이 빠진 일반적인 외교조약으로 대체됐다”고 설명했다.

50년 전 김일성이 ‘북·중 동맹’(조·중우호조약)과 함께 북한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탱해준 북·소 동맹을 파기할 의사를 내비치면서까지 눈엣가시로 여겼던 주한미군도 여전히 남한에 주둔 중이다. 김여정의 압박에 밀려 비록 규모는 대폭 축소됐지만, 북한이 ‘대북 적대시 행동’이라고 늘상 비난해온 한·미 연합훈련 역시 지난 8월 11일부터 정상 실시 중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박성철-브레즈네프 회담이 이뤄진 1971년은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 일촉즉발로 치닫던 한반도 안보위기가 막 끝난 시점”이라며 “브레즈네프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북·소 동맹마저 파기되면 김일성이 제2의 한국전을 도발해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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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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