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외항 자파의 구(舊) 항구 지역 모습. 자파는 인간이 지중해역을 항해하던 시기부터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기후변화 온난기에는 물이 차올라 바로 배를 대기 좋은 해상무역의 중계지가 된다. 안드로메다와 페르세우스 신화 및 요나‧솔로몬‧성 베드로 등 성서 인물을 포함한 무수한 이야기 속 주인공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가야 전성기에도 가락국의 외항은 이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creative Commons License, Sama093의 작품, https://www.flickr.com/photos/sama093/30246318696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외항 자파의 구(舊) 항구 지역 모습. 자파는 인간이 지중해역을 항해하던 시기부터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기후변화 온난기에는 물이 차올라 바로 배를 대기 좋은 해상무역의 중계지가 된다. 안드로메다와 페르세우스 신화 및 요나‧솔로몬‧성 베드로 등 성서 인물을 포함한 무수한 이야기 속 주인공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가야 전성기에도 가락국의 외항은 이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creative Commons License, Sama093의 작품, https://www.flickr.com/photos/sama093/30246318696

‘동이전’(東夷傳), 즉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글이라는 기록이 있다. 서기 3세기, 그러니까 가야가 몇 백 년 이상 제철제국으로 이름을 떨쳐오고 있던 때, 중국 촉나라 출신으로 서진(西晉)의 관료였던 진수가 쓴 ‘삼국지’라는 역사서의 일부다.

고대 한반도에 살던 집단에 대한 많지 않은 기록 중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수의 입장에서 본 동쪽의 오랑캐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한(韓: 마한, 진한, 변진), 그리고 왜(倭)까지 포함된다.

‘가야’, 혹은 ‘가락국’ 같은 이름은 여기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가야보다 훨씬 더 미미했을 나라들, 심지어 왜와 같은 변방에 대해서도 나름 충실히 기술하면서도, 가야라는 나라는 아예 동쪽 오랑캐로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나라들,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마한‧진한‧변진에 대해 후대 사학자들이 비정하는 위치. 한민족의 국가가 토끼 모양의 한반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중 읍루, 옥저, 예는 연해주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자리했던 해양국가적 성격의 사회였을 것이다. 지도: 위키피디아 CC 지형도 위에 주로 한글 위키백과 자료에 근거하여 표시.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나라들,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마한‧진한‧변진에 대해 후대 사학자들이 비정하는 위치. 한민족의 국가가 토끼 모양의 한반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중 읍루, 옥저, 예는 연해주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자리했던 해양국가적 성격의 사회였을 것이다. 지도: 위키피디아 CC 지형도 위에 주로 한글 위키백과 자료에 근거하여 표시.

그러는 가운데도 지울 수 없었던 부분이 드러난다. 내놓고 가야라는 이름을 쓰진 않았지만, 가야에 대한 기술이라고 간주되는 곳은 두 곳 있다. 하나는 ‘변진’(弁辰)이며 또 하나는 ‘구야한국’(狗邪韓國)이다. 이 중 변진 부분은 제철강국으로서 가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술을 포함하고 있는데, 지금의 맥락과 직접 관련되지 않으므로 건너뛰려 한다.

이 외에도 가야의 또 다른 이름 구야한국이 왜(倭)에 대한 기록 부분에서 등장한다.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가는 경로에 대한 것이다.

“(대방)군에서 나와 왜까지 가는 데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쳐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갔다가 해서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에 도달하니 7천리가 넘는 길이다. 거기서 다시 바다를 건너 천 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른다.(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이 기술로 알 수 있는 중국 대륙 쪽에서 일본 열도로 가는 노선에 대해, 한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부분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이 아니라, 그런 논쟁에 가려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조명하고 싶다.

즉 당시 중국 대륙 쪽에서 일본 열도로 가려면 가락국의 제1 항구인 현재 김해시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됐다는 것이다. 역방향으로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동아시아 전역이 가야를 중심으로 교류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은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800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해류를 살펴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일본열도는 지도상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쿠로시오 해류의 큰 흐름으로 중국대륙 및 한반도와 격리되어 있다. 고대에는 배가 지금처럼 큰 동력을 낼 수 없어서,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거나 해류를 타야 항해가 가능했다. 따라서 쿠로시오 해류처럼 에너지가 큰 바닷물의 흐름을 거슬러, 동아시아 대륙부와 일본열도 사이를 횡단하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을 테다.

그러다가 가야가 서기 2세기 후반부터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 해류를 무난히 횡단할 정도로 항해술을 발달시켜, 어느 정도 일상적인 항해가 가능해진다. 이 연재의 지난 기사들에서 보았듯이, 이는 중국 양쯔강 유역의 제철기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해외 제철기지를 확보해야만 하는 가야인들 쪽의 절실한 니즈(needs) 때문이었다.

(왼쪽)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가락국↔일본 교류의 경로. 일본과 중국은 가락국을 거쳐야 왕래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이종기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가운데) 한중 고대 항로. 원본 항로도 출처: 한국해양재단(2013), ‘한국해양사’  (오른쪽) 일본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7세기~9세기 당나라에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이용 경로. 서기 3세기 이전에 정착된 가락국의 항로가 7세기까지 그대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Wikipedia Japan, 퍼블릭 도메인
(왼쪽)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가락국↔일본 교류의 경로. 일본과 중국은 가락국을 거쳐야 왕래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이종기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가운데) 한중 고대 항로. 원본 항로도 출처: 한국해양재단(2013), ‘한국해양사’ (오른쪽) 일본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7세기~9세기 당나라에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이용 경로. 서기 3세기 이전에 정착된 가락국의 항로가 7세기까지 그대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원본 지도 출처: Wikipedia Japan, 퍼블릭 도메인

이때부터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계획 왕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 이전엔 있었다 하더라도 표류 등 의도치 않았던 위험으로 인한 것이었을 테다.) 위 세 지도 중 왼쪽 것이 그 상황을 보여준다. 파란선으로 표시된 뱃길로만 가는 길을 택하든, 중간에 갈색선으로 표시된 뱃길+육로로 된 노선을 택하든, 결국 동아시아 대륙부를 떠나 일본 열도로 향하려면, 가야연맹 중에서도 가락국의 관할인 구 김해만 소재 항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운데 지도가 보여주듯,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뱃길이 해안선을 떠나 좀 짧아진 경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서기 5세기의 일이다. 이후 중국과 일본은 오른쪽 지도에서 타원으로 표시된 부분의 노선을 이용해서 왕래했다. 여전히 김해의 항구를 중계지로 이용하는 노선이다.

서기 700년에 접어들면서, 왜는 오랜 세월동안 이용되어 왔던 이 안정적인 노선을 버리고, 김해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중국의 남부로 향하는 길고 험난한 뱃길을 새로이 개척한다. 오른쪽 지도에서 타원형 표시 아래 부분에 보이는 두 가지 노선이다.

우린 681년 문무왕이 붕어할 때, 왜의 노략질을 막고자 바다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긴 사실을 알고 있다. 가야를 합병하여 김해 일대를 장악한 신라가 그만큼 철통 방어하는 바람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던 게 아닐까? 환언하면, 그 이전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가락국은 이 천혜의 무역 중계지를 제대로 활용해서 비즈니스를 했던 전형적인 해상국가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대 동아시아의 항해 노선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만 해도, 해상국가로서 가락국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 특히 낙동강 하구 일대의 주인이었던 가락국이 명실공히 동아시아의 허브였다는 사실은 확연하다. 아무리 중국과 일본이 후대에 그 사실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지중해 시실리섬의 메시나 항구를 그린 16세기 지도. 천 년 이상 이후, 지중해역의 경관이긴 하지만, 이 지도는 중요한 항구 도시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잔잔한 물에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깊숙이 들어온 만, 그 해안을 따라 밀집해서 발달했던 도시의 가옥들, 그 주변으로 이 도시 주민들에게 생필품, 특히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농지, 과수원, 저수지들, 도시 뒤쪽으로는 험산이 둘러쳐져 있고, 그 경계면에는 육지로부터의 침략자를 막기 위한 봉화대 및 기타 방어시설이 늘어서 있다. 당대엔 동아시아 최고의 중계 무역항이었던 가락국 외항도 이런 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자료 출처: 퍼블릭 도메인
지중해 시실리섬의 메시나 항구를 그린 16세기 지도. 천 년 이상 이후, 지중해역의 경관이긴 하지만, 이 지도는 중요한 항구 도시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잔잔한 물에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깊숙이 들어온 만, 그 해안을 따라 밀집해서 발달했던 도시의 가옥들, 그 주변으로 이 도시 주민들에게 생필품, 특히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농지, 과수원, 저수지들, 도시 뒤쪽으로는 험산이 둘러쳐져 있고, 그 경계면에는 육지로부터의 침략자를 막기 위한 봉화대 및 기타 방어시설이 늘어서 있다. 당대엔 동아시아 최고의 중계 무역항이었던 가락국 외항도 이런 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자료 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런 중국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가 진수가 사용했던 가야의 명칭이다. 그 많은 한자들 가운데 하필이면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개 ‘구’(拘)자에, ‘작은 마을’을 뜻하는 ‘야’(邪)자를 골라 썼다. (‘邪’자는 ‘마음새가 바르지 못함’을 의미할 때는 ‘사’라고 읽지만, ‘야’라고 읽어 ‘작고 초라한 마을’을 가리키는 용법도 갖는다.)

중국 한족 출신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역사 기록자들이 자국, 자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유독 어떤 집단에 대해서만 아주 나쁜 어감의 글자로 표기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다. 동이족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 가치중립적인 명칭을 사용하던 진수가 가락국을 지칭할 때는 “개들이나 모여 사는 초라한 마을”이라는 모욕적인 명칭을 썼다는 건, 뭔가 반감을 표현해야 할 욕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욕구를 가졌던 역사기록자라면 가락국으로 대표되는 가야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하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이유로 가야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만일 가야가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위세를 떨치던 대국이었고, 그로 인해 중국과 일본이, 그리고 아마도 신라도, 자존심 상할 일이 많았다면, 당연히 이들은 가야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엄연한 문자 사회였던 가야 당대 및 그에 대한 후대의 기록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만큼 흔적이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만일 한반도 국가가 후대에 어떤 이유로든 국세가 갑자기 위축되어서, 중국, 그리고 짧은 시기 동안이긴 하지만 일본에 의해 압박을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면, 그런 역사 왜곡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내면화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다는 말을 누누이 들어야 하고, 내놓고 그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는 세월이 길어진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미미하게 남아서 전해지는 기록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흐려지기도 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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