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푸스산 쪽에서 내려다본 아테네의 전경. 아테네는 그리스 해양제국의 중심지로, 그야말로 델로스 동맹의 ‘가운데 나라’였다고 할 만하다. 산기슭에 펼쳐진 배후지,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세워진 신전, 바다로 이어지는 거주지 및 교역구역 등의 구조가 김해평야 매립 이전의 김해, 즉 가락국이 있었던 곳의 구조와 흡사하다.  출처: Max Pixel Creative Commons License, https://www.maxpixel.net/photo-2589967
올림푸스산 쪽에서 내려다본 아테네의 전경. 아테네는 그리스 해양제국의 중심지로, 그야말로 델로스 동맹의 ‘가운데 나라’였다고 할 만하다. 산기슭에 펼쳐진 배후지,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세워진 신전, 바다로 이어지는 거주지 및 교역구역 등의 구조가 김해평야 매립 이전의 김해, 즉 가락국이 있었던 곳의 구조와 흡사하다. 출처: Max Pixel Creative Commons License, https://www.maxpixel.net/photo-2589967

‘노발리스(Novalis)’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하다. 독일 낭만주의 기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꿈같은 일들이 마치 마술이라도 작용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이런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재 독일의 상황은 너무 참담해서 현실 그대로 글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동화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서 극심한 환경오염문제 및 다양한 사회문제에 시달렸던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가졌을 만한 마음이다.

(왼쪽)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필명 노발리스, 1772-1801)의 초상. (가운데) 노발리스의 영향을 받아 몽상적 회화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초 독일 화가 필립 오토 룽게의 그림 ‘작은 아침’, (오른쪽) 역시 노발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삶의 단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왼쪽)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필명 노발리스, 1772-1801)의 초상. (가운데) 노발리스의 영향을 받아 몽상적 회화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초 독일 화가 필립 오토 룽게의 그림 ‘작은 아침’, (오른쪽) 역시 노발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삶의 단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어쩌면 고려조 승려 일연도 노발리스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 그대로는 기록할 수 없었던 한반도의 역사를 비현실적 요소와 섞어 암묵적으로나마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오랫동안 비현실적인 설화 같은 스타일 속에 담겨 전해져 왔던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이 21세기에 들어서는 역사적 사실이었을 가능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황옥공주가 ‘2만5천리’ 바닷길을 헤치고 와서 가락국의 수로왕과 결혼했다는 얘기를 보자. 고대 온난기 대항해시대에선 이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사실이 현재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DNA 분석이라는 첨단 과학기술 덕분이며, 그 밖에도 유물과 유골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 또 그 형상 특성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다양한 컴퓨터 알고리즘 덕분이다.

선구적 연구로서는 2004년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의 보고가 있다. “약 2,000년 전 가야시대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 등 남방계와 비슷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었다.” 이 연구는 한민족의 조상이 남쪽에서 왔을 가능성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지난 세기엔 한민족의 조상이 한반도 북쪽에서 육로를 통해 왔다는 북방기원설이 주류 학설이었는데 말이다.

유전자 분석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민족 남쪽 기원설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2020년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박종화 교수 팀에 의하면, 현재 한국인의 DNA 중 70% 이상이 남방 기원이라고 한다. 지난 4만 년간 인류 이동을 DNA 분석으로 추적한 결과다.

또한 우리는 이 연재의 지난 기사에서 기원전 5~4세기 동안 인도에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는 신속한 인간 집단 이동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원전 350년 인도-베트남-한반도 '제철인 핫라인'의 탄생’ 참조)

(왼쪽) 고령 대가야박물관 내부 전시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시대 왕릉 유적. 가야의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출토되는 유골을 분석해서 유전자형 및 외형 등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른쪽)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을 토대로 원래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출처: (왼쪽) 위키미디어 커먼즈 라이선스, 고령 대가야박물관 제공,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rea-Gaya_royal_tombs_inside.jpg(오른쪽) 뉴시스
(왼쪽) 고령 대가야박물관 내부 전시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시대 왕릉 유적. 가야의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출토되는 유골을 분석해서 유전자형 및 외형 등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른쪽)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을 토대로 원래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출처: (왼쪽) 위키미디어 커먼즈 라이선스, 고령 대가야박물관 제공,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rea-Gaya_royal_tombs_inside.jpg(오른쪽) 뉴시스

이 정도 과학적 증거에 기초해서 보자면 2000년 전 가야와 인도의 왕실 사이에 혼인이 있었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가락국기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된 수로왕-황옥공주 혼인 스토리는 역사적 실재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 가야의 역사가 묻히는 바람에 오랫동안 허황된 이야기로 간주되어 왔고, 더불어 그 이야기가 전하는 가락국의 위세 역시 묵살되어 왔던 것뿐이다.

이렇게 가야의 상당한 위상을 전하고 있지만, 후대에 와서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로 무시받아온 대목이 ‘가락국기’에 더 있다. 석탈해가 수로왕의 왕권에 도전하는 얘기다.

석탈해라는 사람이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와서 왕에게 나가, 나라를 빼앗으러 왔다고 한다. 왕은 물론 양보할 뜻이 없었고, 결국 둘은 둔갑술 경쟁을 하기로 한다. 탈해가 매가 되고 왕은 독수리가 되고 등등의 경쟁을 거친 후 탈해는 본모습으로 돌아와 패배를 인정한다. 되돌아 바닷길로 도망가는데, 왕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500척의 배로 뒤쫓도록 했다. 그러다 그의 배가 신라 쪽으로 가는 걸 보고 추적군을 거둬들인다.

이 에피소드는 총 244자의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사건 중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된 편이다. 종전까지는 이 중에서도 수로왕과 탈해의 둔갑술 경쟁 대목이 주로 전래동화 책에 소개됐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탈해를 수상히 여긴 수로왕이 500척이나 되는 배로 그를 추적하도록 하는 등, 해양대국 가락국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또 있다. ‘중국’을 지칭하는 단어가 두 군데 나오는데, 쓰임새가 심상치 않다.

탈해가 왕위를 뺏겠다고 말하자 수로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중국’을 안정되게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天命我俾卽于位 將令安中國 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

왜 왕은 나라를 다스려야 할 자신의 천명을 얘기할 때, 가락국이라는 말 대신 ‘중국’이라는 말을 썼을까?

이런 용법은 탈해가 왕과의 시합에서 지고 물러나는 상황의 묘사에도 등장한다. “도린교외도두 장중조래박지수도이행(到隣郊外渡頭 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이라고 기록된 부분이다. ‘도린교외도두(到隣郊外渡頭)’ 즉 인접한 교외의 나루터(포구)에 도착했다는 대목까지는 무난하다.

이어서 나오는 ‘장(將)은 ‘나아간다’는 뜻이고, ‘중조(中朝)’는 ‘중국의 조정’, 혹은 ‘중국’이라는 의미로 보통 번역되는데, 직역하면 ‘가운데 왕국’이라는 뜻이다. ‘중조래박지수도’는 가운데 왕국으로 와서 머무는 물길’이라고 직역된다. 그래서 이 문장 전체를 직역하면, ‘가운데 왕국으로 와서 머무는 물길로 나아가서 가버렸다’가 된다.

탈해가 수로왕궁을 벗어나 인접한 포구에 도착하고, 이어 중국으로 오는 배가 머무는 물길로 나아가서, 거기서 신라 쪽으로 가버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으로 오는 배가 머무는 곳’이 가락국의 왕궁에 인접한 교외 포구에 바로 이어진다고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다. 즉 여기서 ‘중국’은 가락국을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말 되는 문장이 되는 것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가락국 및 그 본토 연맹 국가의 양쪽으로 동아시아 상당 지역에 가야의 파트너 도시국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판도에서 가락국이 스스로를 ‘중국’, 혹은 ‘중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시에는 ‘중국(中國)’이라는 말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지역의 중심이 되는 국가 혹은 왕실이라는 의미로 일반명사로 쓰였기 때문이다. 지도: 이진아 제공
붉은 원으로 표시된 가락국 및 그 본토 연맹 국가의 양쪽으로 동아시아 상당 지역에 가야의 파트너 도시국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판도에서 가락국이 스스로를 ‘중국’, 혹은 ‘중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시에는 ‘중국(中國)’이라는 말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지역의 중심이 되는 국가 혹은 왕실이라는 의미로 일반명사로 쓰였기 때문이다. 지도: 이진아 제공

사실 우리의 이웃나라를 가리키는 ‘중국(中國)’이라는 말이 지금과 같이 하나의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최근의 일이다. 청나라 때인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문에서부터다.

그 이전엔 이 단어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쓰였다. (국가명이 고유명사로 표기될 때는 진(秦), 한(漢), 당(唐)과 같이 왕조명으로 지칭했다.) 정확한 의미는 시대와 왕조에 따라, 그리고 그 단어가 등장하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면 서주(西周) 때는 제후국이 아니라 황제가 사는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시경(詩經)’에서는 그저 ‘왕도(王都)’라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 잠깐, 그동안 우리가 이 연재를 통해 복원해보았던 가락국의 세력 판도를 다시 보자.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낙동강 줄기를 따라, 최소한 지금의 안동 정도까지, 서쪽으로는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중국의 양쯔강까지, 동남쪽으로는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체가 가락국 영향권에 있었고, 이 세 방향의 바다와 강의 길을 따라 파트너 도시들이 점점이 연이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락국이 자신을 ‘중국’, 즉 ‘가운데 나라’라는, 글자의 원 뜻에 가장 충실한 일반명사로서 불렀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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