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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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기초과학연구원)가 대전 신동에 짓고 있는 중이온가속기(RAON)는 1조5000억원이라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핵물리학 연구시설이다. 2011년에 사업단이 출범했고 2017년 준공을 목표로 했으나 2019년, 2021년으로 계속 준공이 늦춰진 바 있다. 올해에는 전체 준공에서 ‘단계별 건설’로 아예 계획이 바뀌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로 보인다. 한국의 보기 드문 거대과학(Big Science) 시설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중이온가속기이용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고려대 핵물리학자 홍병식 교수와 함께 현장을 가봤다.

2017년 준공에서 계속 계획 늦춰져

홍병식 교수는 앞으로 완공될 RAON (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for ON-line experiments)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할 대표적인 학자 중 한 명이다. 지난 10월 29일 홍 교수와의 취재 일정에는 한인식 IBS 희귀핵연구단 단장도 합류했다. 한 단장의 연구단 이름에 들어가 있는 ‘희귀핵’은 중이온가속기가 생산하려고 하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RAON은 희귀핵을 만들어내고 그걸 빠른 속도로 가속 운동시키는 핵물리학 실험시설이다.

한 단장의 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30여분쯤 달렸을까? 대전 북쪽 ‘둔곡교차로’ 도로표지판을 보고 빠져나간 후 신동 산업단지 쪽으로 나아가니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라는 표지판이 바로 보였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이명박 대통령이 만든 정책 개념이다. 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 기관이 기초과학연구원(IBS)이고, IBS의 핵심 실험시설이 이날 찾아간 RAON이다. 정문에서 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의 신택수 박사(핵물리학 전공·실험장치부장)를 만나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시설 안으로 이동했다.

신택수 부장이 운전하는 차가 본관 건물을 지나 ‘중앙제어센터’ 앞에서 멈췄다. 천장이 높고 큰 공간 전면에 초대형 디스플레이가 놓여 있는데 중이온가속기의 전반적인 시설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신 박사는 “가속기 운전 관련 모든 정보가 여기에 다 모이고, 스크린에 띄워놓게 된다. 모두 녹색으로 되어 있으면 장치를 운전할 수 있다. 현재 가속기 빔을 만들게 되면 사람은 가속기 터널에 있을 수가 없고 여기에 모여 있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RAON은 세 덩어리로 나눠볼 수 있다.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 가속장치, 실험장치다.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핵물질을 만들어내는데, 생성된 물질은 가속장치로 보내진다. 가속장치는 저에너지 가속기와 고에너지 가속기 시설로 나뉜다. 저에너지 가속기 끝에는 저에너지로 가속된 희귀핵을 갖고 연구하는 저에너지 실험시설이 있다. KOBRA 실험장치가 그중 하나인데 가속관을 달려온 빔이 KOBRA에 공급된다. 가속관이 KOBRA 실험장치에 들어가기 전 180도 위쪽으로 꺾인 굴절부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고에너지 가속을 위한 구간이다. 이제 전체 시설 개념도는 머리에 넣었는데 이 중 무엇이 문제일까?

신 부장이 “가속관을 구동하기 위해 초전도물질을 사용하는데 초전도가속관이 한국에서 자체 제작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초전도 특성이 나오기 위해서는 가속관을 절대온도 4K(섭씨 영하 269도) 이하로 냉각시켜야 한다. 초전도물질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 물체의 전기저항이 사라지게 하여 관 안의 이온을 빠른 속도로 가속할 수 있게 한다. 이 같은 극저온을 만들기 위해서 액체헬륨을 사용한다. 초전도가속관은 액체헬륨에 푹 담겨 있다. 이런 ‘극저온 모듈’이 저에너지 가속기 구간에 모두 54개 들어간다. 이 중 5개가 설치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작하고 모든 모듈의 성능 시험을 해야 하다 보니 사업단이 어려움이 많았다.”

다음에 들른 곳은 저에너지 실험동. IBS는 저에너지 가속기 시설을 내년 여름까지 완성하고, 빔을 뽑아낼 예정이다. 그러면 그 빔을 이용하여 저에너지 핵물리학 실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은 그걸 위해 KOBRA 실험장치를 준비해왔다. 홍병식 교수와 한인식 단장을 비롯한 핵물리학자는 앞으로 KOBRA에 다양한 입자검출기를 설치해 저에너지 핵물리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가로세로 각각 100m는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 한쪽에 KOBRA 실험장치가 있고, 두 명이 검출기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장치 겉면에 ‘핵천체 물리학 연구를 위한 실리콘 검출기’라고 영어로 쓰여 있다.

“실리콘 검출기는 몇 달 전에 설치했다. 그리고 설계한 기본 성능이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한 달 전에 했다. 빔이 아직은 나오지 않으니, 표준 방사선원을 갖고 실험했다. 아메리슘이라는 방사선원에서 5MeV에 해당하는 알파입자(헬륨이온)가 튀어나온다. 알파입자를 이용하여 장치의 모든 걸 시험하고 시운전했다. 알파입자를 전송하고 분리해 KOBRA 장치의 설계 값이 나오는지 테스트 완료했다.” 한인식 단장은 “KOBRA 장치는 빔을 받을 첫 번째 준비를 끝냈다”고 강조했다.

KOBRA 실험장비 옆에 있던 사업단의 곽민식 박사후연구원에게 검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자 이렇게 설명했다. “네온 19번은 핵천체 물리학에서 중요해서 앞으로 많이 연구하고 싶은 핵종(核種·nuclide)이다. 빔이 검출기에 들어오면 검출기 중앙에 있는 표적(탄소원자 1개와 중수소 2개로 구성된 CD₂ 표적)에 충돌한다. 그러면 표적에서 중성자 하나가 튀어나와 빔에 달라붙은 상태에서 앞으로 계속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충돌 순간에 중성자 말고도 양성자와 같은 가벼운 입자들이 사방팔방으로 쏟아져나온다. 이 양성자들을 표적 인근에 배치한 실리콘검출기 세 개로 검출한다. 충돌 순간에 나오는 양성자들을 보면 역으로 충돌 순간에 만들어진 핵종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추경호 박사는 KOBRA 실험과 NDPS 등 저에너지 실험 시설을 구축하는 책임자다. 추 박사는 저에너지 가속관에서 KOBRA 실험 검출기까지는 길이가 40m라고 했다. 희귀동위원소가 가득 찬 빔이 날아오는 진공관 직경은 40㎝ 크기다.

저에너지 실험동을 나와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와 저에너지 가속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ISOL’동으로 들어갔는데 ISOL은 ‘온라인 동위원소 분리장치(Isotope Separation On-Line)’라는 영어의 첫 글자를 딴 용어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페넌트 4개가 벽에 걸려 있다. ‘KOBRA(핵반응 되튐 분광장치) 설치 완료 2020.6.30’이라고 쓴 게, 가장 최근의 공정 완료를 보여주는 내용. 신택수 박사에게 다음에 붙일 페넌트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저에너지 극저온 모듈 54기를 11월 중 완료를 목표로 총력 중이다. 그걸 붙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수입한 양성자빔 가속기 11월에야 설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커다란 공간이 나오고, 금속 광택이 번쩍거리는 수도관 같은 파이프들이 이리저리 꺾여 있는 장치들이 나타났다. 희귀핵물질을 만드는 장치들이다. 희귀핵물질, 즉 희귀동위원소를 만들기 위한 RAON 실험의 출발점은 사이클로트론이다. 사이클로트론은 양성자빔(최대 70 MeV)을 만드는 원형가속기. 사이클로트론 다음에 있는 장치는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 ISOL인데 이 발생장치는 사이클로트론에서 보내온 가벼운 양성자빔을 빨리 달리게 해서 우라늄과 같은 무거운 고정 표적에 충돌시킨다. 그러면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된다. 고정 표적으로는 주로 우라늄 238이 사용될 예정이다.

그런데 사이클로트론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클로트론은 자체 제작이 아니고 해외에서 사와야 하는 물건이다. 사오면 되는데, 왜 안 되어 있는 것일까?

당초 캐나다 업체 BEST에서 사오기로 구매계약을 했다. 그런데 계약 내용과 관련해 제작사의 계약불이행 등의 갈등으로 계약이 2018년 12월 파기됐다. 그런 뒤에 다시 찾은 게 벨기에 업체 IBA다. 벨기에에서 배로 실어온 사이클로트론이 지난 10월 24일 경기도 평택항에 도착했다. 이게 통관되면 11월 12일 설치 착수 예정이라고 했다. 모두 140t이 넘는 무게여서 두 덩어리로 나눠 평택항에서 대전 신동으로 운송해올 예정이다. 전체 제작비용은 180억원 정도.

사이클로트론에서 양성자를 받는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실험은 이미 마쳤다. 사이클로트론에서 나오는 양성자빔이 없기에 세슘 방사선원을 갖고 시험했다. 세슘에 고열을 가해 세슘이온을 만들고, 세슘이온을 전송하면서 전하증식기를 통과시켰다. 전하증식기는 빔에 들어 있는 핵물질에서 전자를 떼어내는 장치. 모든 과정이 설계대로 진행되는지를 확인했다.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 다음에 놓은 시설은 RFQ(Radio Frequency Quadruple·고주파사중극자)를 포함한 입사기다. RFQ는 멋지게 생긴 원통형 장치다. 신택수 박사의 설명을 들어본다. “RFQ는 옛 소련이 개발한 가속기다. 핵자당 10KeV인 빔의 에너지를 500KeV까지 올린다. RFQ까지 연결해서 성능을 확인한 건 지난 화요일(10월 26일)이다. 전체 입사기를 조립하고, 그 빔 라인 안에서 완전한 세트로 테스트한 건 이번 달(11월)이 처음이다. 원래 준비가 지난 5월에 끝났어야 했다. 사업단이 현위치로 옮겨오면서 RFQ와 다른 장치들을 보완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처음 하는 일이라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일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음을 ISOL 희귀동위원소 발생장치 구역과 RFQ에 있는 입사기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RFQ 바로 옆에는 ‘저에너지 가속기(SLC3) 터널’이 있다. 터널 길이는 99m로, 여기가 사업단을 가장 괴롭힌 구간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힘들게 할 곳이라고 한다.

저에너지 가속 구간인 이 터널에는 희귀핵물질이 가득 찬 빔이 날아가는 초전도가속관이 있는데 가속관은 극저온 냉각모듈에 푹 담겨 있다. 가속관이 초전도 성질을 가지려면 온도가 낮아야 한다. 커다란 직육면체 상자 모양인 극저온 냉각모듈은 크기가 다양한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3m가 넘어 보인다. 극저온 냉각모듈은 모두 54개가 들어가는데 현재 49개가 설치되어 있고, 5개의 자리는 비어 있다. 맨 먼저 보이는 극저온 냉각모듈에 ‘09번’이라고 검은 글씨로 쓰여 있다. 9번은 조립해서 성능 실험을 한 순서다. 9번째 실험한 게 맨 앞에 설치되어 있다는 건, 이보다 앞서 시험한 8개의 극저온 냉각모듈은 모두 속을 썩였다는 얘기다. 초전도가속관은 전자빔을 써서 용접하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용접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신택수 박사의 설명을 옮겨 본다. “초전도가속관은 나이오븀(원자번호 41번)이라는 원소를 써서 만든다. 나이오븀은 전자빔으로 용접을 해줘야 한다. 표면이 깨끗하면 할수록 성능이 좋아진다. 그런 다음 화학처리도 하고 표면을 깎기도 한다. 그야말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 안에 먼지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 뭐 하나만 들어가면 그게 나중에 씨가 되어서 방사선(radiation)이 쏟아져 나온다. 냉각을 하고 있는데 방사선이 쏟아져 나오면 온도가 달라지고 초전도가속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초전도가속관과 극저온 모듈은 똑같이 생산하기도 힘들다. 만든 뒤 사업단이 성능 검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고에너지가속기는 2027년이 목표

저에너지 가속기 터널 끝에는 극저온 냉각모듈이 들어갈 다섯 자리가 비어 있었다. 2019년 9월에 첫 번째 극저온 냉각모듈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2년이 더 지나도록 마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단 측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저에너지 가속기 터널 끝에는 가속된 빔을 갖고 실험하는 저에너지 연구시설이 있다. 앞서 보았던 KOBRA 실험이 그것이다. 그리고 저에너지 가속기의 주된 가속관은 계속해서 고에너지 가속기로 이어진다. 홍병식 고려대 교수는 “고에너지 가속기 개발을 위한 선행 연구개발(R&D) 기간이 2년 잡혀 있다. 이어 가속 모듈 세트를 한두 개 만들어 성능 테스트를 하게 된다. 그런 뒤에 양산에 들어간다. 2027년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장은 다 둘러보았다. 본부에서 만난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권영관 부단장은 “사업 진행이 늦어져 죄송한 마음을 뭐라 말할 수 없다”면서도 “한국의 빅 사이언스 실험시설 구축이 겪는 제도와 관리의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과학 실험시설도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시작 때 전체 공사비와 완공 기한을 산정한다. 돈과 시간을 줄 테니 언제까지 완성하라는 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하지만 과학실험은 그렇게 진행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획단계, 개념설계, 상세설계, 공학설계, 제품설계 순으로 단계별로 해야 하는데, 라온은 연구개발이 안 된 상태에서 5년을 주고 만들어내라 하는 식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홍병식 고려대 교수는 “독일 다름슈타트의 GSI(독일 중이온연구소)에 짓고 있는 FAIR(중이온-반양성자 가속기 시설)도 당초 저에너지 가속기와 고에너지 가속기까지 포함해 2014년까지 완성한다는 계획으로 시작했으나 계획을 수차례 변경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저에너지 가속기만 2025년까지 짓고, 고에너지 가속기는 추후에 논의한다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대형 과학 실험시설 구축이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기에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미국 미시간주립대(이스트랜싱 소재)에는 내년 완공 예정인 FRIB(Facility for Rare Isotope Beams)라는 시설이 있다. RAON과 비슷한 이 시설도 알고 보면 1996년부터 25년이 걸린 프로젝트라고 했다. 홍병식 교수는 “매년 10월 노벨상 발표 때가 되면 사람들은 한국은 왜 노벨상을 못 받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RAON에 대해서는 그런 걸 왜 만드느냐고 말한다. 그건 잘못이다. RAON과 같은 기초과학 실험시설이 한국에 있어야 한국의 물리학 수준이 올라가고, 그래야 언젠가는 노벨물리학상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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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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