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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3호]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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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인류사]옛 가야 터의 이국적 ‘돌’... 남방 해양교류의 역사 품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2021-11-16 오전 9:01:35

▲ 이진성은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남아 있는 아주 오래된 석성터다. 다른 곳의 석성들이 대부분 그 지역에서 나는 것으로 동일한 재질인 데 반해서, 이진성을 이루는 돌들은 종류가 다양하다. 옛날, 풍요로운 바닷가 나라였던 이곳에는 먼 곳으로부터 곡식을 사러 배를 타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배들이 돌을 싣고 와서 내려놓고 대신 곡식을 싣고 돌아갔기 때문에 다양한 돌들이 모이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제공: 박필수
한반도 남서해안,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에 가면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마을에 돌담이 많다는 점이다. 마을 외곽 이진성엔 돌담 비슷한 모양으로 석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오래 된 돌담이나 석성의 흔적은 한반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대개는 그 지역에서 난 돌을 쓰기 때문에 석질이 동일하고, 주변 자연 풍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진마을의 돌담이나 이진성터에는 처음 본 사람의 시선을 붙드는 특이한 점이 있다. 아래 왼쪽 사진처럼, 담이나 성을 구성하는 돌들의 외관, 즉 재질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 중엔 선명하게 낯선 느낌을 주는 돌들이 꽤 섞여 있고, 이 지역에선 나지 않는 게 분명한 현무암도 포함되어 있다.
   
   사소한 것으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특이성이다. 하지만 이곳 향토문화연구가 박필수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 이 또한 우리의 망각된 역사 흔적이 소리 없이 우리에게 보내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신호임을 알 수 있다.
   
   
▲ (왼쪽) 이진성 돌담 일부. 이 지역에서는 나지 않는 게 분명한 현무암과 함께 다양한 재질의 돌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일반적으로 돌로 쌓은 성은 그 지역에서 나는 석재로 통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양 도살성 흔적이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듯이 말이다. 사진: (왼쪽) 박필수 제공, (오른쪽) Wikimedia Commons License, 류금열 작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8F%84%EC%82%B4%EC%84%B1_%EC%88%98%EC%A7%81%ED%99%88.JPG

   “이곳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하시는 얘긴데요, 그 어르신들이 어릴 적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고, 또 그 어른들도 그 이전 어른들께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얘기랍니다. 오래 전 옛날, 여기는 아주 큰 항구여서 큰 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답니다. 이 일대 땅이 워낙 비옥해서, 온 천하가 다 흉년이어도 여기서는 곡식이 풍부했다 하네요.
   
   그래서 먼 남쪽 나라들에서 배가 많이 와서 여기 정박하고 곡식을 사갔는데, 빈 배로 먼 바닷길을 오면 풍랑에 배가 흔들리니까, 무게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서 배 밑 바닥에 돌을 싣고 왔답니다. 돌아갈 때는 곡식을 싣고 돌아가니까 돌을 내려놔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마을엔 우리 땅에서는 나지 않는 특이한 돌들이 많이 모이게 됐고, 사람들은 그 돌로 담도 쌓고 성도 쌓게 된 거랍니다.”
   
   십여 년 전,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박필수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서 있던 이진마을 바닷가는 수심이 낮은 작은 만이어서, 그렇게 큰 배가 많이 드나든 항구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이곳 해안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꾸준히 간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곳이라, 고대 온난기에 이진포구는 지금보다 훨씬 크고 수심도 깊은 항구였을 것이다.)
   
   그보다는 아마도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대량으로 곡식을 퍼주었을 만큼 풍요로운 나라였다는 얘기가 낯설게 들렸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도 그랬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다 비슷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굶주리고 힘들었던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고, 역사를 통해 내내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였다가 경제발전 이후로 형편이 나아졌다는 게 거의 암묵적인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가야의 옛모습을 찾으려는 노력 가운데 점차 바뀌어 왔다. 가야가 철을 중심으로 일어선 나라라 하더라도, 풍요로운 배후지가 받쳐주지 않으면 그 정도의 대국으로 오랜 세월 파워를 구가할 수가 없다. 철기 문명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에서 아라비아와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가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그랬다. 그러다가 배후지가 무너지면 철의 왕국도 무너지는 것이다.
   
   여기서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 허황옥 공주가 수로왕을 찾아오는 대목이 연상된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부모가 배우자로 추천해준 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나서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갔다. 그 부모는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달래준다’는 돌탑을 싣고 가라고 했고, 그랬더니 문제없이 순항하여 금관국 남쪽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싣고 온 돌탑이 현재 김해시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이다. 왕은 황옥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리고, 공주를 수행해온 15인의 사람들에게 쌀 열 섬과 직물 30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 (왼쪽 위) 미황사 쪽에서 본 달마산 (왼쪽 아래) 달마산 뒤편에서 바다 쪽으로 본 풍경. 수정이 많이 포함된 규장질의 암석이 주는 단아한 분위기가 먼 거리에서 보면 흡사 잘 만들어진 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오른쪽) 달마산 미황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방불교의 문화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매년 10월이면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괘불재’가 열려 감사의 기도와 함께 한 해의 수확을 바치고 나누는데, 인근 마을들과 공동체적 유대를 중시하는 남방불교 문화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왼쪽 상하) 박필수, (오른쪽) 뉴시스

   ‘돌’ 이야기가 우리나라 남쪽 바닷가에서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예는 여기 머무르지 않는다. 이진마을에서 아주 가까운 산 속에 있는 역사 깊은 절, 미황사의 창건 설화에도 돌은 미장센의 중요한 부분이다.
   
   “신라 경덕왕 때 어느 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의조화상이 나가보니 배에는 금인(金人)이 타고 있었고, 불교 경전과 미술품, 검은 돌이 실려 있었다. 검은 돌이 갈라지자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보니 만분의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어서 여기에 우리도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를 몰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그 말대로 해서 소가 마지막 머문 자리에 미황사를 창건했다.”
   
   허황옥 공주, 미황사, 이진마을—얼핏 관련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들에 공통점이 있다. 먼 곳에서 사람들이 배에 무거운 돌을 싣고 와서 그 돌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남방 해양교류라는 맥락에서 전해지는 설화, 그 몇 개 안 되는 이야기들에 모두 남쪽나라와의 관련성과 함께 ‘돌’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들에 나오는 돌들의 석질에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파사석탑을 이룬 돌에 붉은 무늬가 있어, 이곳(한반도)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런데 파사석탑과 유사한 재질의 돌, 즉 얼핏 화강암처럼 보이나 더 석질이 무르고 붉은 줄무늬와 함께 살짝 금사가 섞인 듯한 외관, 한 마디로 이국적인 느낌의 이런 돌은 해남군 바닷가 일대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무심하게 이진마을 해변 민간 가옥의 돌담을 이루기도 하고, 미황사 경내 돌계단이 되어 있기도 한다.
   
   황옥공주 이야기에서는 공주가 탄 배가 파사석탑을 싣고 와서는 그걸 내려놓았다. 현재 남아있는 돌만 하더라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을 테다. 뱃사람들은 총 쌀 150가마, 직물 450필이라는, 역시 상당한 무게의 물품을 싣고 돌아갔다.
   
   미황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것은 소를 품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검은 돌이니, 그 무게가 파사석탑 못지 않았을 테다. 그와 함께 경전과 미술품도 실려 있었다는데,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빈 배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벼워진 배가 풍랑을 만난다면 심하게 요동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되돌아갈 때 무엇을 싣고 갔을까?
   
   
▲ 미황사에서 가까운 이진포구는 달마산 기슭 해안과 완도 서쪽 해안 사이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항구로, 조금만 나가면 동남아시아를 거쳐 더 넓은 세계로 이어지는 바닷길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위치다. 지도 및 사진 출처: (왼쪽) 위키미디어 커먼즈 라이선스 (가운데) 구글 지도 (오른쪽) 박필수 제공.

   답은 이진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먼 남쪽나라에서 돌을 싣고 온 배들은 이진마을에서 돌을 내려놓고 대신 이 지역에 항상 풍부했던 곡식을 싣고 돌아갔다고 했다. 이진마을은 미황사에서 현재 임도로 불과 5.5킬로미터 정도인, 가장 가까운 포구다. 미황사 건설에 참여했었을 인도 출신 뱃사람 중 일부는 이진마을에서 곡식을 싣고 귀국했을 가능성도 크다.
   
   남방 해양 교류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설화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모티브, 즉 무거운 돌을 실은 배가 남쪽으로부터 와서 돌아갈 때는 곡식을 싣고 돌아갔다는 얘기의 행간을 보자. 한반도는 곡식이 풍부해서 외국에도 널리 나누어 줄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였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추정을 좀 더 들여다보자. 다양한 과학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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