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9월 15일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그후 1년’을 주제로 열린 디지털 성범죄 사례 발표 화상 세미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9월 15일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그후 1년’을 주제로 열린 디지털 성범죄 사례 발표 화상 세미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안타깝게도 ‘n번방 방지법’이 ‘n번방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긴 어려워 보인다. 정작 n번방 사건이 벌어졌던 텔레그램은 ‘n번방 방지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n번방 방지법’은 오픈 채팅방에서 이뤄지는 정보만을 필터링의 대상으로 삼는데 텔레그램은 사적 대화방 기능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n번방 사건에서처럼 성착취 음란물이 유통되는 주요 통로는 사적 대화방이고 사적 대화방의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n번방 방지법’이 있든 없든 수사기관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반면 국민 대다수가 늘상 사용하는 카카오톡과 네이버 라인 등은 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종로에서 뺨 맞고 눈은 한강에서 흘기는 셈이다. 무엇보다 ‘n번방 방지법’은 국가가 사실상 국민의 사적 대화를 검열하게 된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사전검열을 우려하는 야당의 비판에 대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이재명 후보는 침소봉대라는 입장이다. 사전검열이 아니라 ‘필터링’이고, 필터링의 대상도 사적 대화방이 아닌 오픈채팅방이라 괜찮다는 이유다. 필터링은 성범죄물의 디지털 코드와 일치하는지 여부만 확인해서 걸러낼 뿐이고 사람이 개입하지 않기에 사전검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명백한 궤변이다. 같은 논리라면 중국과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도 검열이 없는 국가다. 여권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더라도 필터링은 국가가 지정해 놓은 특정 대상을 인터넷에서 이용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배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인터넷을 통제할 때 쓰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두고 검열이라고 부른다. 정확히 같은 것을 두고 중국을 향해서는 사전검열로 비판하면서, 필터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대한민국에서 용인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전검열’과 ‘필터링’ 사이

어떠한 경우에서도 사전검열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필터링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여러 원칙 가운데 우리 헌법재판소가 절대적 금지를 선언한 원칙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고문 금지의 원칙이고, 다른 하나가 사전검열 금지 원칙이다. 사전검열을 절대적 금지로 해석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일관적인 태도다. 다른 기본권의 경우 법률이 규정한 특별한 조건들을 충족했을 때 그 권리 일부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헌법재판소가 사전검열 금지를 절대적 원칙으로 새기면서 그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전검열을 예외적으로라도 허용할 경우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칠 해악이 지대할 것이라는 판단이 담긴 사려 깊은 결정이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표현의 자유를 다른 기본권보다 우월한 권리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연히 법안 통과에 일조한 국민의힘에도 책임은 있다. 총선 참패 이후 ‘n번방 방지법’에 대한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판단은 미흡했다. 임기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여론에 떠밀려 법안 통과에 찬성했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제라도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의힘이 입장을 선회하여 ‘n번방 방지법’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당론으로 내세운 것이 그 일환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도 응답해야 한다.

그럼에도 요즘의 민주당은 거꾸로 간다. 박근혜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입을 모아 항의하던 그때의 민주당 모습이 낯설 정도다. 대통령을 욕해서 기분이 풀리면 괜찮다던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비방하는 전단지를 돌린 30대 청년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전단지는 현장에서 강제로 빼앗겼고, 그 청년은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뒤 10개월 이상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블랙리스트 없는 나라’를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버젓이 만들어졌다. 최근까지 민주당은 언론의 숨통을 죄는 언론중재법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2016년에는 ‘테러방지법’에서 규정된, 테러리즘 지원 정보에 대한 인터넷 게시물의 ‘사후 삭제’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을 수 있다며 필리버스터 투혼을 보여준 것이 민주당 자신 아닌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전검열도 아닌 사후 삭제조차 반대할 만큼 민주당은 표현의 자유 사수에 진심이었는데 말이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이라고는 권력을 잡은 것뿐이다.

민주당은 권력을 얻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감수성을 잃었다. ‘n번방 방지법’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재명 후보는 원래부터 비판과 의혹 제기에 대해 고소·고발로 맞대응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만큼,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이재명 후보에게 처음부터 기대할 바가 없었다 치자. 그러나 스스로 독재정권과 싸운 사람들이라 자처하던 이들조차 권력을 잡은 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무뎌진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n번방 방지법’의 취지는 무색하게 해당 법안은 n번방 사태를 방지하지 못할 뿐더러 사실상 사전검열을 허용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법 하나 뚝딱 만들어서 될 일이 아니다”

문재인 행정부는 사이버범죄 수사의 국제공조를 위한 협약인 부다페스트협약에 가입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n번방 사태와 같은 디지털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잠입수사와 국제공조수사, 내부고발자를 대상으로 한 포상이나 면책, 다크웹이나 딥웹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를 추적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 동시다발로 이루어져야 한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복잡하게 설계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디지털 범죄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의원들 몇 명이 뚝딱 법 하나 만들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n번방 방지법’은 실효성 없는, 대단히 행정편의주의적 입법에 불과하다. 전면적인 재검토가 절실하다. 모기를 잡기 위해 칼을 휘두르면 모기가 아니라 사람이 다치는 법이다.

고(故) 박원순 시장은 그의 비서를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해 음란한 문자와 사진을 지속적으로 전송하며 성적으로 괴롭혀왔다고 한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김지은씨 역시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을 통해 안 전 지사와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성폭행 후 텔레그램 비밀 대화에서 “다 잊어라” 등의 메시지도 보냈다고 했다. 디지털성범죄를 막기 위해 ‘n번방 방지법’을 만들면서 사실상의 사전검열까지 허용하자는 민주당의 논리와 태도라면, 민주당의 권력형 성범죄 재발을 막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민주당 텔레그램 사용 방지법’부터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김재섭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도봉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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