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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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진학하려는 고3 학생들이 주로 응시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세계적 석학도 풀지 못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지난 11월 18일 치러진 2022 수능에는 생명과학Ⅱ의 ‘킬러 문항’이었던 20번 문항과 제시문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세계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학 석좌교수까지 트위터에서 “터무니없이 어렵고 사실상 풀기가 불가능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응시자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정답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한 결과 평가원은 패소했고, 지난 12월 15일 응시자 전원에게 이 문제는 정답 처리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과연 이 문항만 어려웠던 것일까. 수년 전 수능 국어영역에서 90점(2등급)을 받았던 기자도 이번에 출제된 국어영역 시험을 다시 풀어봤다. 채점 결과 53점이 나왔다. 2022 수능 국어영역(짝수형·화법과 작문 선택) 예상 ‘등급 컷’에 따르면 기자의 점수는 5등급인데, 실제 졸업한 대학에 지원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조용한 환경에서 80분 타이머, 수능 샤프까지 갖추고 풀었는데 나온 결과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역사상 초유의 정답 유예 사태와 이전부터 불거진 ‘불수능’ 논란은 ‘수능 회의론’에 불을 지폈다. 평가자조차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로 제대로 역량을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쏟아진다. 한국에 처음으로 수능 제도를 도입한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를 지난 12월 15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만나 사태의 근본적 원인을 물었다. 그는 “수능이 복잡한 형식의, 높은 난이도의 시험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 국민이 집중하는 중요한 시험인 데다, 경쟁이 하도 치열해 변별력을 과도하게 신경 쓰다 보니 이런 사태가 불거졌다는 것이다.

“수능이란 게 대학에 들어가기 적격인 사람을 뽑는 시험인데, 이상한 일이다. 대학도 끝마쳤고 기자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졸업한 대학에 다시 들어갈 성적이 안 나온다는 것이. 그러면 왜 53점이라는 점수가 나왔느냐 하면 기억이 안 나서 그렇다. 수능에 나올 만한 것을 다 까먹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암기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험이 돼버렸다는 얘기다.”

기자의 성적을 들은 박 교수는 암기 위주로 변질된 수능으로는 제대로 학력을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생명과학 과목은) 출제자가 문제를 낸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몇천 명이나 출제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의도적으로 문제를 배배 꼬았다는 뜻이다. 변별력 있게 출제하면서도, 예상문제나 기출문제와 겹치지 않게 하려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다.”

1980년대 박 교수가 설계한 수능은 난이도도, 구성도 훨씬 단순했다. 애초에 정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이면 누구든 풀 수 있는 통합교과목 시험’이었다. ‘입시제도 변경’을 공약으로 내세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박 교수가 잡지에 기고한 아이디어를 채택했고, 수년의 시범 시행을 거쳐 1994년 수능 제도가 정식 도입됐다. 이후 박 교수는 참여정부 때까지 교육정책 자문을 맡아왔다.

1988년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이 입시 제도를 바꾼다고 발표하자 ‘수능이 대체 뭔 시험이냐’라는 질문이 빗발쳤다고 한다. 박 교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문교부에 모인 기자들에게 박 교수는 시범 출제한 국어영역 문제를 풀어보게 했다. 그는 “당시 거기 있던 기자들이 이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80점 이하를 받는다면 시험 문제를 잘못 출제한 것이라고 했다”며 “그런데 그때 30명이 넘는 기자들이 모두 8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본래 수능은 ‘국어 시험’이 아니라 언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며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 대신 만들어졌기 때문에 암기에 의존하지 않고 역량과 사고력에 의해 풀 수 있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실행한 지 1년도 채 안 돼 도입 취지가 흐려졌다. 시험이 너무 복잡하고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애초 수능 과목은 국어와 수리 두 과목뿐이었다. 대학 강의를 잘 이해하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했고, 논리적 사고는 수리를 통해 기를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영어도 필요하다’는 대학의 요구에 의해 영어가 추가됐고, 과학탐구와 사회탐구 필요성을 요구하는 학계 요구에 따라 선택과목들이 점점 늘어났다. 박 교수는 “정부가 원칙에 따라 취지대로 진행했어야 하는데 표를 의식한 정무적 판단에 흔들렸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수능은 더욱 복잡해졌다. 선택과목이 세분화되면서 암기해서 풀어야만 하는 문제들이 생겼고, 치열해지는 경쟁 탓에 변별력을 키운다고 난이도는 더 올라갔다. 그 결과 해당 과목의 역량을 제대로 판정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도 생겨났다. 박 교수는 변질된 수능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수능 다시 풀어보기’ 실험을 시작했다.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당시 박 교수는 3·4학년 학생 10명을 모아 그해 수능을 다시 풀어보게 했는데, 그중 절반만이 고려대에 재합격할 만한 성적이 나왔다. 박 교수의 실험을 이어받아 교육혁신단체 ‘프로젝트 위기’에서 3년간 대학생을 모아 모의 수능 행사를 진행했는데, 대학생 평균 국어영역 점수가 67~74점이었다.

“수능 취지는 합격·불합격 평가용”

결국 취지대로 수능을 다시 ‘슬림화’해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우선 수능이 갖는 무게를 줄이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애초 수능은 적절한 난이도에 합격·불합격 정도만 평가하는 걸로 설계됐다”며 “국가 단위에서 획일적으로 치르는 시험이 상대평가로 치러지다 보니 경쟁이 과도하게 치열해졌고, 수능이 이렇게나 중요하고 복잡한 시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수능 성적이 입시의 결정적 자료로 사용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1~2점으로 당락을 가르는 시험이 대학에 들어가는 결정적이고 유일한 자료로 사용되면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수능 성적은 다양한 전형 자료 중의 하나로 활용해야 한다”며 “개별 대학이나 학과에서 적격자를 가려내는 역할이 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취지로 생겨난 게 수시 전형이다. 논술, 내신, 입학사정관 등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학생을 모집하도록 한 제도다. 수시 제도는 특히 김대중 정부 당시의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신조를 내세우며 대폭 확대됐다. 그러나 수험생들이 혼돈을 겪으며 ‘이해찬 세대’를 낳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최근에는 조국 사태로 인해 국민적 반감이 더 확대됐다. 대학별로 전형이 다르면 이른바 ‘부모 찬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커지지 않느냐는 우려에서 다시금 ‘수능은 그나마 공정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정시 비중을 30%로 줄였다가 1년 만에 40%로 늘렸다.

정시 확대에 대해 박 교수는 ‘난센스 같은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는 “어떤 입시제도를 가져와도 국민의 70%는 불만족할 것”이라며 “내용의 타당성, 공정성 등을 폭넓게 고려해 교육적으로 정책을 만들어야지, 원칙 없는 정책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국민적 공감대’라며 여론에 그때마다 대응하다 보면 교육 정책의 일관성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수능이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잘 본다’는 점에서 절차적으로 공정한 것은 맞는다. 그러나 내용의 타당성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학이 요구하는 적격자를 선발하는 타당성에도 문제가 있고, 초·중등 교육과정 전반에 시험 하나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문제다. 수능 성적을 고려해서, 대학과 학과별로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게 적절하다. 집단면접 형식이 좋다고 본다.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잘 알 방법이 또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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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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