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시엠 레압 주 벼농사 지대 전경.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벼는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부양력이 높은 작물이다. 철기 문명과의 결합으로 일약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이 일대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풍요를 가져왔다. Credit: Dmitry A. Mottl,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
캄보디아 시엠 레압 주 벼농사 지대 전경.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벼는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부양력이 높은 작물이다. 철기 문명과의 결합으로 일약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이 일대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풍요를 가져왔다. Credit: Dmitry A. Mottl,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

“기원전 5세기쯤, 캄보디아 남쪽 해안부 영토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사랑스러운 공주 나기 소마가 있었다. 그녀는 벼농사를 주관하는 여신이며, 또한 뱃사람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바닷가로 나갔다가 인도에서 온 프레아 타옹 왕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공주는 바다의 왕인 부왕 나가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왕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상당한 땅을 만들어주었는데, 젊은 부부는 여기서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현재 캄보디아의 기원이다.”

캄보디아의 건국 설화이며, 동시에 인도가 동남아시아 쪽으로 동진하며 문화를 퍼뜨리던 ‘인도화’(Indianization) 과정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구전이기도 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변형되고 신비화된다 하더라도, 구전 설화란 기본적으로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대대손손 기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 설화는 캄보디아 건국이 원주민과 이주민이 협력해서 평화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마이클 D. 코우 박사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앙코르와 크메르 문명’(2018)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앙코르 제국 성립 이전의 선주민들이 인도 문화를 받아들인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사람들은 기꺼이,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인도화 과정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했다.” 레이저를 쏘아 땅 속 유물을 확인하는 첨단 탐사법까지 활용하여 연구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이 연재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과거 역사의 윤곽을 짐작하는 방법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기후변화와 철기문명의 속성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방법이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까지는 기후변화 주기에서 온난기였던 데다 지구자기장도 안정돼있어서, 갠지스강 유역의 철기 기반 베다문명이 1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기문명은 빠른 속도로 삼림을 파괴한다. 때문에 기후가 한랭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어떤 곳이든 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는 갠지스강 유역의 제철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초기 인도화 과정이다. 코우 박사에 의하면, 인도인들은 동남아 각 지역에 자신의 문화를 전파했지만 무력을 통해 식민지를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우선 식량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충분한 목재와 철광석, 그리고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제철기지였을 테다. 당시 최고의 첨단 고부가가치 아이템인 철과 철기만 충분히 만들 수 있다면, 부와 권력은 저절로 따라왔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폭력적 정복을 통해서 강제로 뺏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기존의 원주민 지배계급과 손을 잡는다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지배계급 사람들로 봐서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철기 제작인들과 손을 잡으면, 질 좋은 무기와 농기구를 이용할 수 있어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인도화 과정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의 기후 및 지구자기장 변화 상황 (오른쪽) 거시적 환경변화에 따라 제철인이 살 길을 찾아 이동한 경로.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350년까지를 인도화 과정 시기로 본다. 사진 출처: (왼쪽) Randy Mann & Cliff Harris의 기후변화 그래프(2017)를 기반으로 작성, (오른쪽) Wikimedia Commons 백지도를 기반으로, 최근 연구 결과들을 통합하여 작성.
(왼쪽) 인도화 과정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의 기후 및 지구자기장 변화 상황 (오른쪽) 거시적 환경변화에 따라 제철인이 살 길을 찾아 이동한 경로.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350년까지를 인도화 과정 시기로 본다. 사진 출처: (왼쪽) Randy Mann & Cliff Harris의 기후변화 그래프(2017)를 기반으로 작성, (오른쪽) Wikimedia Commons 백지도를 기반으로, 최근 연구 결과들을 통합하여 작성.

나기 소마 공주의 부왕이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넓은 땅을 새로운 왕국으로 선사했다고 했다. 메콩강 하구처럼 경사가 완만한 개펄은, 이 전설의 배경 시기와 같은 한랭기가 되면 해수면이 낮아져 육지 면적이 넓어진다. 여기에 강한 철기 도구를 이용, 간척지를 만들면, 더 넓고 안정적인 육지를 확보할 수 있다. 철제 무기로, 식량이 부족해진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비옥한 메콩강 삼각주 지역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것도 더 잘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제철 노하우를 가진 인도로부터의 이주민, 비옥한 땅의 지배권을 가진 캄보디아의 선주민들. 이 두 집단의 결합은 윈-윈 전략의 정석이다.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오는 과정은 어땠을까? 이 또한 구전 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앞 기사 ‘옛 가야 터의 이국적 ‘돌’... 남방 해양교류의 역사 품었다’에서 소개했던 미황사 창건 설화다. 다시 간략히 소개한다.

“신라 경덕왕 때 (서기 8세기) 어느 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에는 금인(金人)이 타고 있었고, 불교 경전과 미술품, 검은 돌이 실려 있었다. 검은 돌이 갈라지자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인도 우전국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보니 만분의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어서 여기에 우리도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를 몰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그렇게 소가 머문 자리에 미황사가 세워졌다.“

이 설화는 한반도에 남방 불교가 전래되던 상황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4세기에 중국을 통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보다 400년 정도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왼쪽 위) 미황사 쪽에서 본 달마산 (왼쪽 아래) 달마산 뒤편에서 바다 쪽으로 본 풍경. 백두산과 비슷히게 수정이 많이 포함된 규장질의 암석이 주는 단아한 분위기가 먼 거리에서 보면 흡사 잘 만들어진 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오른쪽) 달마산 미황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방불교의 문화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매년 10월이면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괘불재’가 열려 감사의 기도와 함께 한 해의 수확을 바치고 나누는데, 인근 마을들과 공동체적 유대를 중시하는 남방불교 문화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왼쪽 상하) 박필수, (오른쪽) 뉴시스
(왼쪽 위) 미황사 쪽에서 본 달마산 (왼쪽 아래) 달마산 뒤편에서 바다 쪽으로 본 풍경. 백두산과 비슷히게 수정이 많이 포함된 규장질의 암석이 주는 단아한 분위기가 먼 거리에서 보면 흡사 잘 만들어진 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오른쪽) 달마산 미황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방불교의 문화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매년 10월이면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괘불재’가 열려 감사의 기도와 함께 한 해의 수확을 바치고 나누는데, 인근 마을들과 공동체적 유대를 중시하는 남방불교 문화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왼쪽 상하) 박필수, (오른쪽) 뉴시스

필자는 이 설화가 캄보디아 설화와 마찬가지로, 초기 인도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기원전 4세기, 한반도 남부에 철기문화와 함께 힌두교권의 문화가 전래되던 상황이 후대로 가면서 변형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볼 근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이 설화가 인도인이 한반도 남쪽 해안에 처음 도착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시기가 서기 8세기인 것은 너무 늦다. 최근의 연구성과들을 통해 한반도 남부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350년에 인도 유래 제철인들이 동남아시아 쪽으로부터 와서 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인도인과의 처음 접촉이 아니라 오직 남방불교의 전래만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시기 비정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인도와 한반도가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바닷길로 그렇게 쉽게 연결되어 있는데, 남방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지 1000년 세월은 족히 지난 후에 한반도에 처음 소개됐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북방불교가 어렵사리 육로를 통해, 불교문화가 성행하지도 않았던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도입되고 400년 이상 지난 후에 말이다.

셋째는, 구전 설화란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왜곡되기 마련이라는 일반론에 입각해서 보면 더욱 그렇다. 한반도 남해안에 해양교류를 통해 인도의 철기 문화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50년 무렵이었고, 이때는 인도 땅에 아직 불교문화가 크게 일지 않았던 때다. 이 인도화 과정을 통해 전파된 문화가 힌두교 문화였다는 사실은 최근 인도 및 동남아시아 역사학자들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한반도에서 불교문화가 일반화되고, 그런 세월이 지나면서 이 설화에 힌두교적 색채가 지워지고, 불교적인 모티브들이 추가됐을 것이다. 그와 함께 이 설화의 시기를 나타내는 부분도 수정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것은 무엇이든 중국을 통해 온 거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고(古)천문학 전문가 박창범 한국고등과학원 교수가 말했듯이, 아무리 역사왜곡이 발생해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과거의 흔적들이 새로운 연구를 통해 조명을 받으면 역사가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네번째 근거로 이어진다. 미황사 창건 설화에도 원래의 팩트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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