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photo 위키미디어
알렉산더 대왕 ⓒphoto 위키미디어

지리는 통치자의 학문이다. 군대에서 독도법은 장교급 이상의 지휘관만 배운다. 병졸은 지휘관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전쟁은 지도를 보면서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일종의 땅따먹기 게임이다. 적에게 우리 편의 지도를 넘기는 건 심각한 반역행위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가진 지도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기원전 3세기 소국 마케도니아의 왕자로 태어나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어릴 때부터 지리학자의 특별과외를 받았다. 지리적 상상력이 풍부한 지도자였던 그가 택한 동방원정 루트는 전략적 요충지를 하나씩 점령해가면서 자연스럽게 전력을 보강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된 코스였다. 그는 병사들이 먹고 쉬면서 재충전하기 좋은 곳, 무기를 약탈해 전력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을 미리 지도에 찍어놓고 하나씩 정복해 나가며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하는 효율적 공간 전략을 구사했다. 비록 인더스강 주변의 낯선 지역에서 무더운 기후와 코끼리 부대의 위력에 밀려 고전했지만 자신이 잘 아는 익숙한 지역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지도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지리적 상상력을 반영한다. 정치·경제·문화적 암흑기였던 중세 유럽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비과학적인 T-O 종교지도가 유행했다. 비슷한 시대에 과학적으로 제작된 정확한 지도를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는 번영을 누렸다. 유럽 변방의 초라한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를 보면 배경으로 화려한 지도와 지구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녀는 해적 드레이크와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동방으로 가는 무역 항로의 지배권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아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선구자였다.

대영제국의 빛나는 전성기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였는데,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달콤한 자장가 대신 지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계지리 동화책(Nursery Geography)’을 들려주었다. 이튼·킹스·해로와 같은 영국을 이끌 지도자를 길러내는 사립학교에서 지리는 중요 과목으로 분류되었다. 영국의 세계 진출 전략은 ‘대영제국의 심장’으로 불리던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소속 지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수립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의 저택 내부 벽면에는 가문의 영지(領地)가 그려진 지도가 걸려 있었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예술적 감성과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는 지도학자이자 전문출판인이었던 고산자 김정호가 있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해 평민들도 쉽게 지도를 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했지만, 당시 지배층인 조선 사대부들은 지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의 변화에 캄캄했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세계지도를 등한시했고 소모적인 당파싸움과 예법 논쟁에 빠져 있었다. 반면 서구와 적극 교류하며 선진 문물과 기술을 도입해 눈부시게 발전한 일본은 유럽 상류층과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신세계로 인식되었다. 20세기 초 세계인의 지리적 상상력을 독점했던 영국의 세계지도 속에서 일본은 크고 자세하게 표현되었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인의 세계지도·지리교육에 대한 무관심은 그대로이고, 독도와 동해를 둘러싼 일본과의 지도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리적 무지와 빈약한 지리적 상상력으로 나라를 망친 지도자의 대표적 사례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이다. 예일대 역사학과를 간신히 졸업한 그는 독서와 여행으로 교양을 넓히기보다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텍사스 카우보이였다. 매일 성경을 읽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지만 낮은 지리적 문해력(geographical literacy)으로 인한 외교적 결례와 말실수가 반복되었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여전했다. 충격적인 9·11테러가 일어나자 격분한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토안보부를 신설했다. 부시는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병력을 강화했지만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부시 대통령은 또 다른 악마가 되어갔다.

그가 통치하던 8년간 미국의 경제 상황은 계속 나빠졌고, 중동에서는 참전군뿐 아니라 민간인의 피해도 커져갔다. 9·11테러 직후에는 미국 편이었던 국가들조차 부시의 편협한 외교정책과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에 등을 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자연재해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는 부시 행정부의 한계와 함께 심각한 흑백 인종갈등, 낙후된 인프라, 열악한 주거환경 등 미국 내부의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photo 위키미디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photo 위키미디어

대선후보 5인, 지리적 상상력 안 보여

미국 내부의 누적된 분열과 갈등, 특히 지역 격차의 틈새를 파고드는 지리적 상상력으로 미국 대통령 자리를 거머쥔 자가 도널드 트럼프다. 세계 경제의 살벌한 전쟁터인 뉴욕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부동산 재벌의 배짱과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이민자 가정 출신임에도 세계화를 멈추고 보호무역주의를 실현하여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장 무슬림과 이민자들을 추방하고 무역장벽을 높여 미국 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전략이다. 광대한 영토에 축복받은 자연환경, 세계 3위 인구대국이자 석유부국인 미국에는 어쩌면 실현가능한 시나리오일지도 모르겠다.

좁은 국토에 부존자원은 빈약하고 대외무역 의존도마저 높은 한국은 미국처럼 배짱을 부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의 최대 무역국인 중국은 사드 배치를 핑계로 한국 기업을 탄압하고 한류를 가로막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지난 4월 5일 동해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열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더 센 경고장을 날리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중국에 강력한 대북 제재에 동참을 압박할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가는 중이다.

대통령 선거에 나설 5당 대통령 후보들이 다 결정되었다. 5명 후보들의 발언을 통해 지리적 상상력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국내용 ‘표밭 분포도’에 갇혀 있는 듯하다. 북한의 핵 위협과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세계지도를 들고 담대하게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 후보를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다. 국내 정치 이슈에 매몰되어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둔감한 21세기 한국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기력하게 대처하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구한말 상황과 놀랄 만큼 닮았다.

뿌연 안갯속에서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한국호를 이끌어갈 선장을 뽑을 때 그의 역사관 못지않게 지리적 상상력도 철저히 검증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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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대선
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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