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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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으로는 청문회에 못 나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국회서 나를 부르겠다는 게 논란을 확대하고 김상곤 후보자랑 나를 맞대결시키려는 의도라면 내가 말려들 이유가 없다.”

지난 6월 19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병준(63) 국민대 교수는 6월 28일로 예정된 김상곤 교육부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참석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 언론에서 ‘김병준이 벼른다, 복수하려고 한다’고 보도했던데 서부극도 아니고 그런 것은 없다”면서도 “2006년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 되씹어보고 반성하자는 차원의 얘기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미 알려졌듯이 김병준 교수와 김상곤 후보자는 11년 전의 악연으로 얽혀 있는 사이다. 2006년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상곤 후보자는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막 통과한 김병준 교육부총리를 향한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되자 교수노조 차원의 사퇴 성명을 주도했었다. 당시 교수노조는 성명서에서 ‘그(김병준 교육부총리)는 이미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지휘 감독하고 교수들의 연구를 촉진해야 할 교육부총리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상태’라며 ‘당장 사퇴하라’고 촉구했었다. 이 성명서는 현재 그대로 부메랑이 돼 김상곤 후보자를 겨냥한 상태. 김 후보자 역시 석·박사 학위 논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논문을 수십 군데나 갖다 썼다는 표절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1년 전 표절 의혹 공격을 받고 결국 교육부총리직에서 낙마했던 김병준 교수가 청문회에 나가 거꾸로 김상곤 후보자를 몰아세운다면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날 논문 표절 의혹을 주제로 시작된 김병준 교수와의 인터뷰는 결국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는 현재 대학에서 행정학을 가르치는 교수지만 정치담당 기자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다. 그만큼 그가 보여온 정치적 굴곡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 5년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지내면서 정권의 핵심으로 일했다. 당시 노 대통령과 국정 철학을 공유했던 측근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후 실용주의 성향의 친노(親盧) 인사쯤으로 평가받던 그는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던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느닷없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물론 국회 인준을 통과하지 못한 채 지명 철회되고 말았지만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이목이 집중됐던 돌출 사태 중 하나였다. 심지어 최근에는 그가 자유한국당 대표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런 정치적 굴곡과 그 사이사이 녹아 있는 그의 생각까지 더듬느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김상곤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원론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입장인데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 “표절 문제는 한번 낙인이 찍히면 학자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만큼 치명적인 문제다. 그래서 의혹을 제기하려면 최소한 본인에게 물어도 보고 논문 내용과 작성 일시 등 기본적인 것들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2006년 김상곤 후보자는 전화 한 통 없이 내 표절 의혹을 너무 쉽게 제기했다. 왜 그랬는지를 묻고 싶다.”

- 당시 제기된 표절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내가 제자 논문을 베꼈다고 했는데 내 논문은 1986년 11월 학회에 제출된 것이고 제자의 박사 논문은 1987년 2월 작성됐다. 그런데 당시에는 학회에서 1년에 한 번만 논문을 찍었기 때문에 내 논문이 제자의 논문보다 늦게 1987년 8월에 인쇄됐다. 이 때문에 누군가 착각을 하고 의혹을 제기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 현재 표절 의혹을 사고 있는 김상곤 후보자 논문은 읽어봤나. “읽어보지 않았다.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만 봤다.”

- 김상곤 후보자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서울대 검증 과정에서 44군데가 출처 표기 없이 사용된 점이 확인됐는데 이 정도면 사퇴 사유가 된다고 보나. “나는 김 후보자의 논문이 표절인지 아닌지 말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 김 후보자의 논문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표절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이다. 내가 국회 청문회에 나가게 되면 하고 싶은 얘기도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너무 감정적·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표절 의혹을 무겁게 엄중하게 접근하자는 것이다. 김 후보자 박사 논문의 경우 서울대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검증했지만 의혹이 제기되는 논문들은 두 군데 정도의 전문기관에서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김상곤 후보자 측은 2006년 사태가 다시 주목을 받으니까 당시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논문 표절 의혹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교육관이 더 문제였다는 식의 발언을 했는데. “신자유주의 교육관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면 상당히 곤란하다. 내가 당시 교원평가를 하자고 했고, 인력양성도 산업경제 부문의 수요를 감안해 하자고 했는데, 이런 구체적 사안을 놓고 논쟁하자고 해야지 싸잡아서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면 곤란하다.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산업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산업체 교육을 강화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적인가 진보적인가. 현실은 이념으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사안을 그렇게 뭉뚱그리면 안 된다.”

- 당시 논문 표절 의혹에 자신이 있었다면 왜 교육부총리직에서 사퇴했나. “당시 내 논문 표절 의혹이 말이 잘 안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연구비 문제, BK21 문제 등 다른 의혹들이 불거졌다. 다 말이 안 되는 의혹 제기였지만 나는 상처를 입고 교육수장으로서 권위를 상실했다. 교육계는 규범적 요소가 강한 곳이어서 상처를 입고 그대로 가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냥 관둘 수는 없어 내가 거꾸로 국회에 다시 청문회를 열자고 덤볐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청문회가 열려 내가 7시간 동안 나를 둘러싼 의혹들을 해명했다. 내 청문회를 지켜본 노무현 대통령이 내가 압승했다고 표현했지만 조간신문에 내 해명이 실리는 것을 보고 바로 노 대통령께 사표를 제출했다.”

- 교육계는 규범적이라고 했는데 교육부총리는 다른 장관 후보자보다 더 도덕성이 요구된다고 보나. “교육부총리는 교수들을 상대하며 대학 행정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논문 표절 같은 의혹은 정말 무겁게 제기되어야 한다. 내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됐을 때 한 유명 사립대 교수가 흥분해서 당장 사퇴하라고 발언한 걸 어디선가 봤다. 그런데 그분도 나중에 총장에 선출되자마자 표절 의혹이 제기돼 사퇴했다.”

- 다른 문제 제기지만 김상곤 후보자는 석·박사 학위 논문 외에는 한 편의 논문도 안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교수 하면서 논문 한 편도 안 쓴 게 관행은 아니지만 함부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분이 소속된 학교의 문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 한 편 안 써도 다른 쪽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 이 정부가 인사 문제에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이중잣대를 적용한다는 비판이 많은데 동의하나. “대통령이 인사 5대 원칙이라는 걸 너무 빨리 얘기해버렸다. 이걸 적용하면 필요한 인재를 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내가 지금 60대 초반인데 50대 후반 이후 세대는 위장전입, 다운계약서 작성 같은 걸 별 죄의식 없이 했다고 본다. 물론 음주운전은 다르지만. 5대 원칙을 그야말로 원론적 기준, 지침 정도로 해놓고 문제가 있으면 국가운영에 필요한 사람이니 이해해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 문제가 불거진 장관 후보자를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니까 협치니 뭐니 다 물 건너가는 분위기인데. “대통령이 과욕을 부려서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 현 정부가 야당과 강대강(强對强)으로 맞서는 기류가 예상 외로 빠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사 문제는 야당이 시비를 걸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추경과 원전 문제 등 정책적인 문제도 이미 몇 개 보이지만 부딪히는 게 정치다. 특히 철학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 이런 건 여야가 논쟁을 세게 해야 한다.”

- 이 정부가 처음 약속대로 협치를 할 것으로 보나. “얼마나 설득력을 갖고 해나갈지 모르겠지만 협치에 대한 생각이 야당과 서로 다른 듯하다. 야당은 협치를 연정 내지 연대로 이해하는데 대통령과 여당은 시민사회나 국민 일반과의 소통으로 보는 것 같다. 서로 같은 단어를 놓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야당과 같이 가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청와대와 정부는 자신들이 진짜 하려는 게 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국가를 위한 중요한 문제 몇 가지를 고르면 야당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간단한 건 혼자 갈 수 있지만 큰 문제는 절대로 혼자 못 간다. 정권의 국회 의석 수가 모자라는 차원이 아니라 정권 자체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업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을 이동해야 하는데 이건 어마어마하게 어렵다. 합의를 통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면서 이 방향으로 간다는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상황이 바뀌어 야당이 힘이 세지면 결국 일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선 안 된다.”

- 메시아 같은 대통령은 없다고 주장해왔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지지율만 보면 메시아 같다. “정권 초반에는 기대심리 때문에 지지율이 대체로 높다. 처음에는 비판할 것도 별로 없고 스타일만 본다. 하지만 정책 문제가 나오기 시작하면 실질적인 문제들, 이해관계가 불거지게 된다. 대통령이 커피잔 들고 돌아다니면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부동산값이 오르고 내리면 누군가의 이해를 해치게 된다.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여론이나 대중의 생각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 속에 국가를 위한 비전이나 개혁 전략은 없다”는 조언도 했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스르며 날듯이 때로는 여론과 대중의 생각을 거스르며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진짜 국가 개혁이 이뤄진다. 세종대왕도 여론을 몹시 중시했지만 한글 문제, 불교서적 간행 문제 등 몇 가지 사안은 여론, 공론과 맞서며 밀어붙였다. 그게 지도자의 덕목이다.”

- 노무현 정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일했을 텐데 노무현·문재인 두 사람을 비교하면 어떤가. “내가 정책실장 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을 지냈지만 사실 문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대체로 인권을 존중하고 노동·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정도만 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는 비서실과 정책실이 서로 떨어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노무현 두 사람은 다른 게 많다.”

- 어떤 점이 특히 다른가.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시장과 공동체에 굉장히 무게를 뒀다. 시장과 공동체의 역할에 큰 관심이 있었고 시장의 활력을 이용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공동체는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될 때부터 천착해온 문제였고. 노 대통령은 국가와 시장과 공동체가 서로 어떻게 역할을 나눠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이에 비하면 훨씬 국가주도 경향이 강한 것 같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노 대통령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자는 계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문화가 개혁과 혁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검사와의 대화를 했고, 공무원들 앉혀놓고 행복론도 이야기하고 그랬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힘을 쓰는 것 같다. 검찰개혁만 해도 시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바로바로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나.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

- 국가주도 경향이 문제인가. “나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식민시대를 거쳐 이승만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거버넌스 구조가 다 국가주도였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기성 권력집단이 패권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온 것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 그런 레짐(regime) 속에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우파 국가주도주의라면 문재인 정부는 좌파 국가주도주의에 가까울 뿐이다. 국가가 시장과 공동체 위에 군림하면서 끌고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다. 나는 이것 자체가 틀렸다고 본다. 시장과 공동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국가와 시장과 공동체, 세 바퀴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세 바퀴 국가’가 내 지론다.”

그는 낡은 국가주도주의를 벗어던져야 한다면서 이런 현실을 문제삼았다. “우리는 교육부가 대학의 재정까지 간섭한다. 회계 투명성 같은 걸 요구하면서 이것저것 보고하라고 한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하나. 대학 교수와 직원 노조, 학생, 학부모 등이 경영에 참여해서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관리하면 안 되나. 집단소송제도도 마찬가지다.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면 기업이 소비자들을 무서워하면서 스스로 물건을 더 정성 들여 만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정위가 고발권을 독점하고 있다. 우리는 시장 군수가 몇 ㏄짜리 관용차를 타야 하는지도 행자부가 일일이 규제한다. 유권자들이 다 지켜보고 나중에 심판할 텐데 왜 이런 식의 규제를 해야 하나. 바로 어여삐 여기는 백성들이 능력이 없으니 국가가 보살펴주고 일일이 규제 통제해야 한다는 낡은 발상이다. 이렇다 보니 시장은 늘 규제에 묶여 있고, 공동체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에, 국가는 재정능력 부족에 시달린다. 세 바퀴가 다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처럼 국가주도주의가 심한 나라는 이제 세계 어디에도 없다.”

-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연방제에 버금가는 지방분권을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문 대통령의 지방분권 발언 자체에 모순점이 있다. 시도지사를 불러모아 제2국무회의를 하겠다고 하는데 어느 지방분권 국가가 그런 국무회의를 여나. 지방분권을 하겠다는 대통령이 시도지사 모아놓고 국무회의 하겠다는 발상이 모순이다. 이 정부의 철학이 아직 정리가 안 돼 있는 것 같다. 비정규직 문제도 대통령은 세게 나가는데 경제부총리는 기업의 자율성을 얘기한다. 비정규직 해결을 공공부문만 하겠다는 건지 진의를 잘 모르겠다.”

- 노무현 정부도 좌회전 깜빡이 켜놓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을 듣지 않았나. “그런 비판의 대상이 됐던 한·미 FTA 문제도 시장의 힘을 높이 산 노 대통령의 일관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산업구조조정이 시급한 과제였지만 법안 하나 통과하는 데 35개월이 걸리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시장의 힘을 빌리자는 이른바 ‘메기론’을 들고나온 것이다. 메기를 풀면 미꾸라지 몇 마리는 죽겠지만 한국은 멕시코와는 다른 저력이 있다고 믿었다. 시장을 개방해서 메기가 들어오면 도전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진보주의자들은 미꾸라지가 죽으니까 아예 문을 열지 말자고 했지만 산업구조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답은 못 내놓았다. 토니 블레어가 얘기하면 제3의 길이라고 하고, 노 대통령이 얘기한 건 ‘좌회전 깜박이 우회전’이라고 비판하는데 우습다.”

- 문 대통령과 현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그걸 만능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다. 고작 5000만명의 내수시장으로 국민소득 4만~5만달러가 가능하겠나. 내수만 갖고 그 정도 소득을 올리려면 연 소득 2000만원인 사람이 10만원짜리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먹어야 할 것이다. 내수는 내수대로 가더라도 결국 성장은 혁신과 수출산업 경쟁력 제고를 통해 이뤄야 한다. 시장이 성장을 주도하도록 규제를 폴어야 한다. 국가는 시장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보듬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 전략이 다소 모호하다는 비판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 때와 한 가지 다른 점도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선거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다 정부 주변에 뒀다. 그런데 이 정부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당장 장하성 정책실장의 경우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없지 않았나. 장하성씨가 뭘 약속했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나면 뭔가를 내놓지 않겠나.”

- 지금과 같은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책임은 잔뜩 짊어지고 권한은 줄어드는 역삼각형의 구도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보나. “지금과 같은 대통령제에서는 3년쯤 지나면 권력기반이 점점 형해(形骸)화되면서 일을 하기 어려워진다. 국민들이 메시아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도 그즈음이다. 관료조직은 잘 작동하지 않고 당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 바로 등을 돌린다. 선진국의 경우는 정당 구조가 안정화돼 있기 때문에 당의 힘으로 관료조직을 이끌 수 있다.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같은 당이 정권을 잡으면 정책이 연속성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는 박근혜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 때 사람들 다 쳐내지 않았나. 지금과 같은 대통령제는 일을 하는 측면에서 보면 최악의 절름발이다. 자동차가 고장났는데 다들 기사 탓만 하다가 막상 자기가 직접 타보면 자동차가 고장난 걸 안다. 자동차를 어떻게 고칠지 이제 논의해야 한다.”

-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가장 염두에 둘 게 뭔가. “이 정부에 대해 내가 제일 우려하는 건 큰 흐름을 놓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주도 경향으로는 이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인데 국가주도 메커니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함정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대중을 베이스로 삼을 텐데 국가주도 경향과 대중주의가 결합하면 좌파 포퓰리즘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지금 보수세력도 큰 문제”라며 다음과 같은 진단을 했다. “보수세력은 ‘나를 따르라’는 박정희식 국가주도주의에 대한 환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길을 잃은 것이다. 서구형 보수주의자라면 시장과 공동체를 누르려 할 게 아니라 이제 개방과 자율을 고민할 것이다. 이제는 좌파든 우파든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걸 고수하면 우파는 길을 잃고 좌파는 대중주의에 빠진다.”

- 작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박근혜 대통령의 총리직 제안을 왜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당초 나는 박 대통령한테 나를 총리로 지명하더라도 인준 가능성이 10%라고 얘기했다. 또 1년3개월 남은 정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책임과 고통을 넘겨달라고 했다.”

- 책임과 고통을 넘겨받아 뭘 하려고 했나. “나는 1년3개월 동안 우리 사회의 문제가 뭔지 드러내려고 했다. 총리로서 마이크를 잡고 산적한 현안을 매일 얘기하며 정치권에 답을 내놓으라고 독촉할 생각이었다. 특히 나는 박 대통령에게 내각의 50%를 내가 고른 야당 인사들로 채울 것이라고 했다. 야당 인사들을 대거 내각에 앉혀 그 사람들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제기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했으면 아마 대선 때 담론 수준이 높아졌을 것이다. 나는 거국 내각총리를 하면서 내가 꿈꾸던 연정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 총리직을 수락할 때까지 박 대통령을 자주 만났나. “네 번 정도 만난 것 같다. 길을 걷다가 ‘박근혜입니다’라는 전화를 받을 만큼 통화는 수시로 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총리직을 받도록 계속 설득했다.”

- 당시 사태가 대통령 탄핵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나. “내가 인준이 안 되면 야당이 추천하는 총리가 들어오는 정도로 사태가 수습될 것이라고 봤다. 탄핵에 대해서는 국회가 좀 더 시간을 갖고 국정조사라든가 청문회를 한 후 거기에 근거해 탄핵소추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 일각에서 자유한국당 대표로 거론되던데 전당대회에 나설 생각이 있나. “내 생각을 받아준다면. 하지만 내가 나서면 친박 믿고 나왔다는 말이 나올 텐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낡은 국가주도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자유한국당의 미래는 없다.”

그는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 동안 좌파든 우파든 낡은 국가주도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길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내내 역설했다. 현실의 벽 앞에서 거국내각 총리와 연정의 이상이 한번 좌절됐던 그가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접목할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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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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