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상모동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 인근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경북 구미시 상모동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 인근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7월 19일 찾아간 경북 구미시 상모동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生家). 기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약 8개월여 만이다. 지난해 11월 구미를 찾아갔을 당시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 구미역 앞에서 만났던 개인택시 기사는 “딸이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씩씩거리며 분개했었다. 이날 찾아간 박정희 대통령 생가는 8개월 전보다 더 쓸쓸해 보였다. 금오산 자락에 있는 이 초가(草家)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생가를 지키는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 관계자에 따르면, 박근혜 탄핵 전까지만 해도 생가를 찾는 사람만 평일 300~400명, 주말에는 1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여전하다지만, 단체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생가에 상주하는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한 관계자는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탄핵 사태 와중인 지난해 12월에는 생가 앞 추모관이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도 벌어졌다. 이날 찾아간 생가 앞 추모관은 언제 그랬냐는듯 말끔히 복구돼 있었다. 구미시 관계자는 “화재보험에 들어둔 까닭에 보험금을 지급받아 3개월간 긴급복구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한 관계자는 “직원이 발견하고 빨리 119에 신고한 덕분에 불이 생가까지 태우는 것을 겨우 막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추모관 안을 가득 채웠던 화환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 앞에 있던 분향함도 치워져 있었다. 화재사고를 막는다는 이유에서다.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박정희 동상 역시 쓸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경부고속도로와 구미국가산업단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이 동상은 2011년 남유진 현 구미시장과 구미시의 각급 기관과 독지가들이 뜻을 모아 세운 동상이다. 하지만 이 동상 역시 지난해 11월 왼쪽 다리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독재’란 시뻘건 낙서가 칠해지는 봉변을 면치 못햇다. 지금은 낙서가 지워진 동상 앞에 다가서자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박 대통령이 작사·작곡했다는 노래다. 원래 박 대통령의 키가 158㎝에 불과한 단신(短身)이었다지만 동상을 참 작게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미시 한 관계자는 “그나마 동상을 세울 때도 권위적이라는 말들이 많아 겨우 만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방화사건 이후 긴급 복구된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앞 추모관.
지난해 12월 방화사건 이후 긴급 복구된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앞 추모관.

기념사업 ‘올스톱’ 위기감

1917년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곳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구미면은 1969년 국내 최초의 내륙공업단지로 구미공업단지(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착공되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선산보다 커져버렸다. 구미공단조성 계획을 입안한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공장을 세우기에 지반이 단단했고, 낙동강을 끼고 있어 상류의 안동댐으로부터 깨끗한 공업용수를 조달하기 쉬웠다. 공단이 생기자 농촌의 수많은 유휴인력들이 일감을 찾아 구미로 몰려들면서 순식간에 대한민국 대표 산업도시로 탈바꿈했다. 1963년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 구미는 1978년 인근 칠곡군 인동면과 합쳐져 구미시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반대로 선산군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도농(都農) 통폐합으로 구미시와 합쳐지면서 선산읍으로 격하됐다. 모든 것이 구미 출신의 박정희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추모사업을 준비해왔다. 100년 만에 딱 한 번 찾아오는 기회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잊지 못하는 추모객과 관광객들이 국내외 각지에서 몰려들 것으로 내심 기대해 왔다.

하지만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말 촛불시위로 코너에 몰리고 지난 3월 헌법재판소 판결로 대통령직을 상실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지난 5·9대선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구미시에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이 ‘올 스톱’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우정사업본부가 지난 7월 12일,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행하려던 기념우표 발행을 돌연 취소한 것이 단적인 예다. 우정사업본부가 이미 발행을 결정했던 우표를 재심의를 통해 발행 취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79년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찾아온 최대 위기다.

우정사업본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전병억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장은 “지난해 만장일치로 결정한 사항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마음이 바뀌어 뒤집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구미시의회를 비롯해 박정희 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최소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총궐기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생가 옆에 조성하려던 박정희 생가공원 조성사업 역시 지지부진하다. 구미시는 박정희 생가 주위로 생가공원을 조성해 제대로 된 추모관을 신축하고 옛 모습 그대로 원형 생가를 재현하려고 했다. 그 옆으로 1960~197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개발연대의 모습을 재현한 ‘시대촌(村)’ 조성을 계획했었다. 지금의 생가는 1964년 개축된 뒤 1970년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되었다. 생가 앞에 있는 현 추모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해인 1979년 조성됐다. 하지만 정식 추모관이라기보다는 급조된 가건물에 가까울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박 대통령 내외의 생전 사진 수점을 걸어둔 것이 전부다. 실제 박정희 생가 일대는 주말에 1000명 가까이 몰리는 구미 최대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는 모습이다.

2006년부터 10년 넘게 진행 중인 박정희 대통령 생가공원 조성사업.
2006년부터 10년 넘게 진행 중인 박정희 대통령 생가공원 조성사업.

지지부진한 생가공원 조성

하지만 생가공원 조성사업은 2006년부터 사업을 추진한 지 벌써 10년이 넘도록 예산 문제 등으로 차일피일 지연되고 있다. 추모관의 경우 2013년 이미 설계를 끝마쳤지만 잔여 부지매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연되고 있다. 추모관은 짓다만 콘크리트 골조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여름 무더위 때문인지 공사가 재개될 움직임도 없어 보였다. 생가공원에 들어선 것은 화장실 한 동이 전부다. 구미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공원 하나 조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리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박정희 생가공원 옆에 조성 중인 ‘새마을운동 테마공원’도 당초 오는 10월이었던 준공 목표를 못 지킬 가능성이 있다.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은 국비 293억원을 비롯, 총 사업비 882억원을 들여 ‘새마을운동’을 주제로 교육과 체험을 진행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박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회개혁운동이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중국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북한 김일성의 천리마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금도 아프리카 등지의 개발도상국 정부 관계자와 학생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한국을 찾는데, 새마을운동의 시작부터 경과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남아 있는 곳은 새마을운동을 끝마친 현대화된 농촌의 모습뿐이었다. 이에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미에서 열린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에서 검토 지시를 내리면서 새마을운동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공간 조성이 시작됐다.

그렇게 낙점한 곳이 구미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공원 바로 옆이다. 구미시의 한 관계자는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두고 경북 청도와 포항이 각기 서로 발상지라 주장하고 있어 경북도 내에서도 교통정리가 안 된 상태”라며 “결국 새마을운동 중흥지라고 할 수 있는 구미에 테마공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 구미는 경부축(軸) 선상에 있어 찾아오기도 쉽고, 도내 시·군 중 유동인구가 가장 많아 수요 기반이 탄탄했다. 경북도에서 사업을 총괄하고 구미시에서 토지 매입과 보상 등을 담당하는 식으로 사업이 진행됐다. 사업 도중 시행사인 STX건설 컨소시엄이 흔들리는 위기도 찾아왔다. 오는 10월 준공 예정이지만, 2017년 7월 현재 공정률은 59%에 그친다. 구미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올해 말 준공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이 이런저런 외풍(外風)에 흔들리는 원인을 구미 자체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구미는 구미공업단지가 조성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급속히 형성된 공업도시다. 박정희가 만든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구미시 관계자에 따르면, 42만 구미 인구 가운데 80% 이상이 외지에서 흘러온 사람들이다. 평균연령도 36세에 불과하다. 고향 사람인 박정희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외풍에 맞서 기념사업을 지켜갈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구미시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에 반대하는 구미시 시민사회단체들을 모두 합쳐봤자 채 100명이 안 될 것”이라며 “무게중심을 잡고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지역 원로들도 많이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못 먹고 못살던 농촌 구미를 세계 일류 공업도시로 변모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원죄(原罪)인 셈이다.

박 대통령의 생가를 떠나면서 생가 앞 민족중흥관 방명록에 적혀 있던 글귀가 새삼 떠올랐다. 구미시 도량동에 사는 강모씨가 7월 19일 생가를 찾아 남긴 글이었다.

“힘든 시기 잘 견뎌 봅시다. 구미시민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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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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