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공개한 박수현 대변인. ⓒphoto 뉴시스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공개한 박수현 대변인. ⓒphoto 뉴시스

박근혜 전 대통령 재직 당시 작성된 문건이 청와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대통령기록관에 있거나 폐기됐음직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우연한 발견’임을 강조한 반면, 야당은 ‘상식적이지 않다’면서 관련 내용을 공개한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 등을 지난 7월 19일 검찰에 고발했다.

일명 ‘캐비닛 문건’으로 불리는 이전 정부의 자료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지 두 달여 만인 지난 7월 3일 민정비서관실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며칠 뒤 정무수석실, 국정상황실, 국가안보실 등의 캐비닛에서도 박 정권 시절 문건이 추가로 발견됐다고 청와대는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지난 7월 14·17·20일 세 차례에 걸쳐 언론 브리핑을 갖고 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건의 존재를 공개했다.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각 비서관실에서 발견된 메모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작성된 것으로, 총 2161건에 달한다.

이 문건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 직원들이 회의 과정에서 주고받은 대화 내용과 주요 현안을 파악한 메모 등 민감한 내용이 담겨 있다. 예컨대 민정비서관실에서 나온 문건 중에는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를 다룬 자료가 있다. 이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구속돼 재판을 받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또는 당시 민정비서관으로 재직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게 불리한 자료다.

이명박 정부 때 문건도 발견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7월 14일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민정비서관실 공간 재배치 과정에서 캐비닛에 있던 300여건의 이전 정부 문건을 발견했다”면서 “대통령기록물은 맞지만 비밀표기를 해두지 않아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민정비서관실에서 발견한 문건에는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조사’ ‘삼성 경영권 승계 지원 방안’ ‘문화예술계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자료’ 등이 포함돼 있다. 박 대변인은 “2013년 1월 생산된 이명박 정부 시절 자료 1건도 발견됐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정무수석비서관실 행정요원의 캐비닛에서 발견했다는 문건에는 삼성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세월호, 국정교과서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불법적인 지시사항도 포함돼 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국정상황실과 안보실 공간에서 발견된 문건의 내용은 청와대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일부 자료를 복사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기소한 검찰에 넘겼고 원본자료는 대통령기록관에 인계했다고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을 진행 중인 법원은 청와대로부터 넘어온 일부 문건을 증거자료로 채택했고, 해당 문건 작성자인 현직 검사를 증인으로 불러 문건 작성 배경을 캐물었다.

이 검사는 7월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 심리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판에서 청와대가 발견한 삼성 관련 문건에 대해 “2014년 7~9월 우병우 전 수석으로부터 ‘삼성에 대해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쓴 메모”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현 정부가 발견했다는 캐비닛 문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정치권 인사들이 적지 않다. 지난 정부 청와대 재직자들이 문건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2015년 8월, 즉 박근혜 정부 중반까지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실에는 ‘캐비닛’이 없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다른 비서관실이 어떻게 운영됐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홍보수석비서관실에는 문서 보관용 캐비닛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실 집기 구성이 통일돼 있지 않았거나 각 사무실별로 업무 특성에 맞게 집기를 배정받았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민정비서관실, 정무수석실, 국정상황실, 국가안보실 등의 캐비닛에서 지난 정부 문건이 발견됐다고 주장한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을 인정할 수 있다.

퇴임 6개월 전 문건 정리 TF 가동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 청와대에 재직했던 복수의 인사들은 “청와대 곳곳에서 무더기 문건이 발견됐다는 걸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말이 안 된다. 지난 5월 10일자로 청와대를 그만두고 나온 전직 행정관의 말이다. “청와대를 나오기 몇 달 전부터 자료를 정리했다. 불필요한 것들은 폐기했다. 나는 단 한 장의 문건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수천 개의 문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통상 대통령 임기 말이 되면 청와대는 대통령기록물 분류작업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한다. 대통령 퇴임 5~6개월 전에 각 비서관실에서 인력을 지원받아 대통령기록관에 보낼 서류를 분류하고 불필요한 문건은 모두 폐기하는 역할을 이 팀이 맡는다. 박근혜 청와대의 일부 수석실은 출력물 형태 보고서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정기적으로 문건을 파쇄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10일 국회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대선이 치러진 5월 9일까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하에서 청와대가 기록물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이번에 발견된 문건에는 이명박 정부 때 만든 자료도 포함돼 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익명의 행정관은 이렇게 주장했다. “차기 대선이 치러지기 전인 2012년 8월부터 TF팀을 꾸려 기록물 분류작업을 했다. 불필요한 것은 모두 폐기했다. 총무비서관실에서 일일이 점검했기 때문에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 당시 문건이 나왔다는 건 그래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는 총 180여대의 파쇄기를 갖추고 있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발견된 문건 가운데 이명박 청와대 당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롯데월드타워 인허가와 STX 관련 자료가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이명박 정권 관계자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 때 이명박 정권 사람들의 뒷조사를 많이 했다. 두 정권은 여야보다 더 불편한 관계였다. 그런데 박근혜 청와대에서도 노출되지 않았던 문건이 문재인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권에서 대통령기록관으로 옮긴 기록물은 총 1100만건이 넘는다. 이번에 발견된 문건은 2161건. 그럼에도 유독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증거로 활용될 만한 고급 정보가 담긴 문건이 다량 포함된 걸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보수진영 한 핵심 인사는 “비상식적”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분석을 들어보자. “청와대에 입성한 지 두 달이 지나서 지난 정부 문건을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발표하는 걸 보고 의아했다. 일반 가정이 이사를 가더라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는다. 하물며 청와대 안보실은 문건처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겠는가. 누군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사전에 관련 문건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는 백번 양보한다 해도 청와대 주장을 그대로 믿기 힘들다.”

한국당 법률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교일 의원의 말이다. “우리 당에는 과거 청와대에 근무했던 분들이 꽤 있다. 그분들은 뭉텅이 자료가 발견될 수 없는데, 이상하다고 말한다. 당내에서는 누군가 사본을 갖고 있다가 다시 가져다놓은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검찰이 수사로 밝혀야 할 사안이다.”

한국당 일각에서는 현 정부에서 컴퓨터 파일이나 서버를 복원했는지 여부도 검찰 수사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청와대 문건의 경우 언제 만들어졌는지, 즉 생성일자를 알 수 있다. 청와대 전직 행정관의 말이다. “누군가 해당 파일을 고의로 현 정부에 제공했을 것이라는 의심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 정부 입장에서도 보안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선뜻 문서를 제공받기 어렵다. 청와대에 남겨진 컴퓨터나 서버 일부를 복원할 수 있다면 과거 보고서를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과연 현 정부가 그렇게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행정요원이 쓰던 캐비닛에 자필 메모가 보관돼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주간조선은 이와 같은 의혹 제기에 대한 청와대 해명을 듣기 위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에게 몇 차례 연락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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