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일 오전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당 혁신 방향을 담은 ‘혁신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이덕훈 조선일보 기자
지난 8월 2일 오전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당 혁신 방향을 담은 ‘혁신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이덕훈 조선일보 기자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지난 8월 2일 지난 9년 동안 한국당(옛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집권하며 보였던 행태를 ‘정치적 타락’으로 규정하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보수·우파 세력을 통합하고 재집권하겠다”는 내용의 ‘혁신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당 재건의 기반이 될 새로운 노선으로 ‘신(新)보수주의’를 내걸었다. 한국당을 신보수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가치정당’으로 만들어 정권을 탈환하겠다는 청사진이다. 최근 우리나라 보수당은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좌·우 구분 없이 각종 개념을 당헌·당규에까지 반영했고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가치 정당으로 전열을 정비해 1~2년 앞의 선거 승리가 아닌 수십 년의 장기적 집권을 도모하겠다는 전략이다.

선언문에 담은 ‘건국절’

혁신위는 이날 발표한 선언문에서 현재의 한국당에 대해 “권력 획득과 유지라는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등 무사 안일주의와 정치적 타락으로 자유민주 진영의 분열과 대통령 탄핵, 대선 패배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당 재건의 기본이념으로 신보수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 현대사에 대한 긍정적 역사관과 △대의민주주의의 강조 △서민 중심 경제 등이 골자다.

혁신위는 “신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기초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 옳고 정의로운 선택이었다는 ‘긍정적 역사관’을 갖는다”고 했다. 광복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보는 우파의 이념을 강조한 것이다. 류석춘 혁신위원장은 그동안 교수 시절부터 “3·1 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1948년 탄생한 이승만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갖는다”며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혁신위는 또 “대의제 민주주의는 광장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위험을 막고 다수의 폭정에 따른 개인의 자유 침해를 방지하고 더불어 사는 공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라며 “국민주권의 원리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계기로 부각된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등의 ‘광장정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경제 분야에서는 “부정부패와 반칙, 특권을 배격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법치주의에 기초해 경제적 자유를 추구한다”며 “특히 경쟁에 뒤처진 사람들도 함께 꿈을 이룰 수 있는 국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서민 중심 경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혁신위 이옥남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 때는 보편적 복지를 지향했는데 한국당 신보수주의는 그것과 구별되는, 시장경제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민 경제 활성화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선별적 복지가 포함되는 이념”이라고 했다.

右클릭하는 한국당?

이날 발표된 혁신선언문은 전반적으로 “우(右)클릭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민 중심 경제’를 내세웠지만, 지난 정부 당시 내걸었던 ‘경제 민주화’보다는 선별적 복지에 가깝고, 광장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성이나 인적 청산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혁신위는 이런 비판들이 이번에 발표된 혁신선언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혁신위 관계자는 “이번 혁신선언문에 박 전 대통령 당적 관련 논란이나 인적 청산이 언급되지 않은 건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7월 11일 출범한 혁신위는 그동안 본격적으로 인적 청산 관련 논의를 시작한 적이 없다. 다만 “인적 청산의 시기가 언제이냐”를 두고 혁신위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한다. “인적 청산이 먼저냐, 이념 정립이 먼저냐”를 두고 많은 논의가 있었고, 내부적으로 혁신 순서상 이념 정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혁신위 관계자는 “혁신위의 ‘타임테이블’에서 인적 청산은 3개월 정도 밀렸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혁신위는 ①이념 정립 ②조직 정비 ③인적 청산 ④인재 영입의 순서에 맞춰 당 혁신을 진행해 가기로 했다. 이 중 8월 2일 혁신선언문 발표로 ‘이념 정립’은 완료됐다. 두 번째 과업인 조직 정비는 이미 홍준표 대표가 스타트를 끊었다. 홍문표 사무총장은 최근 조직 혁신 방안을 발표하며 ‘당협위원장 정비’와 ‘당 사무처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령 당원’으로 지구당을 관리하거나 제 역할을 못 하는 당협을 찾아내 개혁하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면서 ‘슬림화’가 필요해진 당 사무처 직원 중 일부를 구조조정하겠다는 게 골자다. 혁신위는 이 과정에서 조직 정비의 큰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당과 혁신위 관계자들은 본격적인 인적 청산은 조직 정비가 완료되는 오는 10월쯤부터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때 박 전 대통령 출당 문제나, ‘친박(親朴) 인적 청산’ ‘바른정당 복당파 인적 청산’이 본격적 논의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류 위원장은 “보수 정권의 대통령을 지켜내지 못하고 호가호위에 급급했던 친박도, 보수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던 사람들도 모두 문제”라는 입장을 꾸준히 견지해왔다.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인재영입도 인적 청산과 동시에 가속화할 전망이다. 홍준표 대표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을 인위적으로 인적 청산하는 것은 어렵다”며 “결국 3년 뒤 국민의 선택으로 청산되는 수밖에 없다”고 해왔다. 하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인적 혁신으로 일부 인적 청산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게 혁신위의 생각이다. 한 혁신위 관계자는 “어쨌든 내년 선거를 계기로 일부 인적 청산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며 “박 전 대통령 출당 등 관련 문제도 이때쯤 자연스럽게 논의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하지만 혁신위는 초반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혁신위원 중 한 명이었던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8월 2일 혁신선언문 발표 직후 위원직을 사퇴했다. 선언문에 ‘서민 중심 경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는데 “헌법 가치 가운데 하나인 시장경제에 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장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성과 인적 청산을 원하는 당 안팎 개혁 세력들엔 “개혁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개혁 대상으로 언급된 친박, 탈당파 인사들의 공개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혁신위 관계자는 “혁신선언문을 만드는 데 당초 예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생산적 논의가 오갔기 때문”이라며 “혁신위가 짜둔 시간표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한 한국당 관계자는 “시작부터 암초들을 만난 혁신위가 자신들의 생각대로 끝까지 갈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라며 “정계 개편 등 당 안팎의 변수들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양승식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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