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터진 대정전사태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하는 리스광 전 대만 경제부장(왼쪽에서 두 번째).
지난 8월 15일 터진 대정전사태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하는 리스광 전 대만 경제부장(왼쪽에서 두 번째).

지난 8월 15일 대만 타오위안(桃園) 국제공항 인근의 다탄(大潭) LNG발전소. 이날 오후 4시51분쯤 다탄 발전소의 6개 발전기가 모두 멈춰 섰다. 대만 전체 전력공급의 약 10%, 약 438만㎾(4380㎿)의 전력공급을 담당하던 대형 발전소가 일시에 멈춰 서자 대정전(블랙아웃)이 현실화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만 중앙기상국에 따르면, 타이베이의 전날 낮(12시44분) 최고기온은 38도. 타이베이에서는 10일 연속 낮 최고기온이 36도를 넘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1897년 이래 120년 만에 찾아온 살인적인 무더위였다. 발전소가 멈춰 선 이날도 에어컨 등 전력사용 급증으로 대정전 직전의 전력예비율이 3.17%로 떨어지는 등 이미 간당간당한 비상단계였다.

이날 예기치 못한 발전소 가동중단에 이어 전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만의 국영 전력회사인 대만전력(TPC)은 이날 저녁 6시부터 약 3시간 걸쳐 순환정전을 예고 없이 단행했다. 대만 전역을 3군데로 나눠서 약 1시간씩 전기를 끊은 것. 첫 번째 237만가구, 두 번째 195만가구, 세 번째 236만가구 등 모두 668만가구(중복가구 포함)의 불이 차례로 꺼졌다. 발전소가 있는 타오위안은 물론 수도 타이베이와 그 외곽인 신베이(新北) 등 대만 전체가 대상이 됐다. 심지어 사고 발전소와 거리가 있는 중부 타이중은 물론 남부 타이난과 대만 최대 항구도시인 가오슝(高雄)까지 대만 서부 전역에 걸쳐 순환정전 조치가 단행됐다.

타이베이 총통부 주변의 교통신호등이 꺼진 것은 물론이고, 타이베이시청과 세계금융센터(101빌딩), 세계무역센터가 있는 타이베이의 신시가지 신이구(信義區)까지 영향권에 들어갔다. 홍하이(鴻海)정밀 등 대만 간판 전자기업들도 순환정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력공급이 끊기면서 대만 각지의 고층빌딩과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신베이시 소방국은 “78건의 사고신고를 접수받았다”고 밝혔다. 일부 지역의 수돗물 공급도 중단됐고, 정전 와중에 촛불로 조명을 밝히다가 실화(失火)로 지체장애인이 사망한 사고도 터졌다. 그나마 고속철(HSR)을 비롯해 국철(일반철도), 지하철은 예비전력이 가동되면서 철로 위에서 멈춰 서는 최악의 사태는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한여름 밤의 대정전사태로 암흑시대를 맞이한 대만 국민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기가 없는 불편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대만전력이 전력공급을 완전 재개한 것은 이날 밤 9시40분쯤이다. 이날 4시51분부터 9시40분까지 약 5시간의 대혼란이 빚어진 셈이다. 대정전으로 영향을 받은 가구는 대만 17개 지자체의 약 668만가구. 대만 전체 가구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같은 대정전사태는 1999년 7월 29일 ‘대만대정전’ 사태 이후 18년 만에 터진 최악의 대정전이었다.

18년 만에 재발한 최악의 대정전사태로 인해 대만 민심 역시 요동치고 있다. 리스광(李世光) 경제부장(장관)은 이날 저녁 6시30분쯤, 정전 사고의 직접 당사자인 LNG 공급을 책임지는 대만중유(中油·CPC)와 발전소를 운영하는 대만전력 관계자들을 대동하고 대국민사과를 발표했다. 리스광 부장은 기자회견에 앞서 린취안(林全) 행정원장(국무총리에 해당)에게 전화로 사의를 표명한 상태였다. 경제부는 산업정책과 에너지정책을 총괄하는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에 해당하는 부처다. 결국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사표 수리로 리스광 경제부장은 지난해 1월 차이잉원 총통이 정권교체에 성공하며 집권한 후 경질된 첫 번째 각료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대만 빈과일보는 지난 8월 16일 대만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큰 사장님(차이잉원)이 대정전사태에 진노(震怒)했고, 그 사람(리스광 경제부장)을 직접 지목해 내보내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리스광 경제부장은 이날 대정전 전부터 사퇴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살인적인 무더위에 대만의 전력예비율이 3~4%의 위험수위를 넘나들면서 경질론이 대두됐다. 전력예비율이 바닥을 긴 것은 집권 민진당의 ‘2025 비핵’ 공약 탓이 컸다. 이 공약 때문에 대만 3곳의 원전 가운데 지난 6월 초까지 정상가동 중인 원전은 대만 남부 마안산(馬鞍山)원전(제3원전) 1호기 하나뿐이었다. 급기야 민진당 정부가 ‘2025 비핵’ 목표에도 불구하고 일부 원전의 재가동을 승인했지만, 대정전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7월 30일에는 9호 태풍 ‘네삿’과 10호 태풍 ‘하이탕’이 동시에 대만섬을 내습하면서 곳곳에서 송전탑과 전신주가 넘어져 전력공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기도 했다. 대만 중앙재해대책센터에 따르면, 당시 태풍의 내습으로 65만가구의 전력공급이 중단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 ⓒphoto 민진당
차이잉원 대만 총통 ⓒphoto 민진당

전기요금 135억원 감면

거듭되는 전력위기에 리스광 부장까지 전격 경질되면서 차이잉원 총통의 ‘2025 비핵(非核) 공약’은 최대 시험대에 섰다.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해 1월 총통선거에서 ‘2025 비핵’ 공약을 앞세워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후보를 꺾고 8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오는 2025년까지 대만에서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중지하고,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현재의 4%에서 2025년까지 20%로 끌어올린다는 공약이었다. “나머지는 천연가스(LNG)로 충분히 대체가능하다”고 민진당은 입버릇처럼 장담해왔다. ‘2025 비핵’을 위해 산업과 에너지정책을 관장하는 경제부장으로 발탁된 사람이 대만대 공대 교수 출신의 ‘폴리페서’ 리스광 경제부장이었다.

8·15 대정전 사태로 대만의 취약한 전력수급 사정은 또 한 번 명백하게 드러났다. 대정전이 LNG 공급을 책임지는 대만중유 직원의 기계조작 실수로 인해 발전기가 멈춰 선 ‘인재(人災)’였다고는 하지만 대만 전체 가구의 절반이 암흑시대에 놓이는 엄청난 결과가 초래됐다. 대만전력은 최종집계한 정전 피해 592만가구의 하루치 전기요금을 감면하기로 했다. 총 3억6000만대만달러(약 135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차이잉원 총통의 지지율도 하락할 일만 남았다. 차이잉원 총통의 지지율은 대정전사고 직전 29.8%를 기록해 역대 최저치로 내려간 상태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차이잉원 총통은 18년 만에 터진 최악의 대정전사태에도 불구하고 ‘2025 비핵’ 정책기조를 바꿀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이날 밤 11시28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부를 대표해 전국 인민들에게 사과한다”면서도 “현재 정부는 분산식 녹색에너지 발전을 추진 중으로 이처럼 단일 발전소의 사고가 전국의 전력공급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자는 것”이라고 오히려 사고를 합리화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우리의 정책방향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오늘 사건이 우리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고도 밝혔다. 반면 국민당은 “2025년 비핵을 추진하면서 전력부족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면서 “오늘과 같이 황당무계한 사고는 스스로 뺨을 치는 격”이라고 맹비난했다.

차이잉원 정부의 ‘비핵’은 문재인 정부 ‘탈핵(脫核)’의 모델이다. 앞으로 한국이 겪게 될 대소동을 대만은 미리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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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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