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수현 대변인이 “캐비닛에서 지난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속 문건에 대해선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인다”고 말했다. ⓒphoto 연합
지난 7월 1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수현 대변인이 “캐비닛에서 지난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속 문건에 대해선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인다”고 말했다. ⓒphoto 연합

2165건. 8월 28일 여기에 9308건이 추가됐다. 최근 발견됐다는 박근혜 청와대 문건 얘기다. 7월 14일부터 7월 20일 사이에 발견됐다는 2165건은 인쇄물 형태라고 문재인 청와대는 발표했다. 후에 발견됐다는 9308건은 파일 형태다. 민정수석실, 정무수석실, 정책조정수석실에서 발견됐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 설명이 맞는다면 박근혜 청와대 직원들이 문건을 여기저기 흘리고 떠났다는 얘기다.

청와대 행정관은 크게 ‘어공’과 ‘늘공’으로 나뉜다. 각각 ‘어쩌다 공무원’ ‘늘 공무원’의 약자다. 어공은 다시 출신에 따라 민간 영역과 여의도로 갈린다. 민간 영역은 학계, 재계 등이다. 여의도는 국회와 당 등 정치권을 뜻한다. ‘국회 어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늘공은 각 부처에서 뽑혀 청와대로 파견근무를 온 공무원을 가리킨다. 근무를 마치면 자신의 부처로 돌아간다. 어공은 다르다. 청와대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청와대 이후’를 개척해야 한다.

가장 매력적인 ‘청와대 이후’ 시나리오는 이거다. 정권 출범에 맞춰 청와대에 들어가, 정권이 건재한 대통령 임기 중반에 원하는 기관으로 가거나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다. 정권 말기까지 청와대에 남아 있는 어공들을 흔히 ‘순장조’라 부른다.

박근혜 정권 마지막을 지킨 국회 어공은 40여명이다. 현재 이 중 절반 이상이 실직 상태라고 한다. 나머지는 국회 보좌진으로 돌아가거나 기업에 취직했다. 청와대 문건이 계속 이슈가 되는 요즘, 박근혜 청와대를 끝까지 지킨 국회 어공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5명에게 물었다. 이들 중 4명은 정권 출범 때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우다.

잇따른 문건 발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인쇄물 형태로 발견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165건의 문서라면 적어도 A4 규격으로 3000여장이라는 얘긴데, 문서 더미를 남겨놓고 사무실을 떠난다는 게 말이 되나?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엔 ‘중요 현안 자료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며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해줬다고 비난했다. 그때는 없었던 게 세 달 후에 갑자기 발견된다는 게 납득이 가나.” A씨는 잘라 말했다. “우리가 이런 처지라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믿지만 중요 문서를 사무실에 남기고 가는 경우는 없다. 특히 정무수석실의 경우 출력 자체를 자제했고, 출력한 문서는 반드시 파쇄했다. 검찰에서 제대로 의지를 갖고 조사하면 즉시 밝혀진다.”

“우리는 아마추어였다.” B씨가 입을 뗐다. 그는 5월 9일 이후 근 넉 달째 쉬고 있다. “현 정부는 ‘매일 홍보 1건’ 원칙을 너무나 충실하게 지키고 있지 않나. 우리 중엔 탁현민 행정관 같은 사람이 없었다. 청와대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홍보할 줄 몰랐단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도 한몫했다. 인위적으로 꾸미는 걸 싫어했다. 예를 들면 문화융성 행사를 열 때나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처음 문을 열 때, 언론이 다루기 좋게 행사를 기획했는데 박 대통령이 반려했다.”

“지금은 그저 엎드려 있다.” C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원래 정권이 끝나면 함께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끼리 계속 모임을 갖는다. 어공, 늘공 함께 하는 자리다. 우리는 모임은커녕 서로 전화 통화도 잘 못한다. 요즘 같은 때 우리가 공무원 동료들에게 연락해봤자 누만 끼치지 않겠나.”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박근혜 청와대와 이전 정권의 청와대가 확연히 달랐던 점이 있었다. 두 가지다. 첫째는 청와대를 거친 어공이 적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은 달랐다. 1기, 2기, 3기 식으로 끊임없이 인사를 냈다. 박근혜 청와대 행정관이었던 C씨의 말이다. “청와대를 거친 어공은 정권과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이 모여 우군이 된다. 충성심보다 더한 안전장치다. 지난 청와대는 우군은커녕 적군을 양성했다. 심지어 소위 ‘십상시’로 거론된 인사 중에도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한 인사가 둘이나 있었다. 밀려 있는 인사 후보자들을 안 받아준 게 당청 관계가 경색된 주된 원인이다.”

인사가 적체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주된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꼽힌다. 알려져 있다시피 박 전 대통령은 주변 사람들을 잘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여기에다 ‘낙하산 인사’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받는 것, 보내는 것 모두에 해당됐다. 탄핵 사태 훨씬 전인 박근혜 정권 중기에 청와대를 떠난 모 행정관의 경우, 1년 가까이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낙하산을 내려보냈다는 비난을 의식한 청와대의 비협조 때문이었다. 탄핵 전후 제기된 ‘최순실 인사 청탁 의혹’을 떠올리면 의아스러운 부분이긴 하다.

어공들의 고민

박근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D씨는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던 밤을 떠올렸다. “남아 있던 모든 직원이 배웅을 나갔다. 나는 사무실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이 너무 이상해서 내려갈 수 없었다. 요즘도 배신감과 자책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최순실 의혹을 어떤 행정관이 사전에 제대로 알고 있었겠나. 다만 사태의 전개를 멈출 수 있었던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된다.”

세월호 사태와 최순실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하자, 국회 출신 행정관들은 나름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고 한다. E씨의 말이다. “어공들은 ‘대통령이 팽목항에 직접 가보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사태가 시작되자 여의도의 지인들에게 조언도 구했다. 그런데 지난 청와대는 어공의 의견을 듣는 곳이 아니었다. ‘어공이 설쳐대면 끝장이다.’ 이게 출범 초기부터 청와대의 시각이었다. 이정현 당시 수석이 수시로 국회 출신 행정관들을 모아놓고 입단속을 할 정도였다. 탄핵이 결의되자 수뇌부가 조금씩 어공에게 의지하더라.”

C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어공이 뭘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어공은 문제점을 짚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 아닌가. 반면 직업공무원들은 자신의 원 소속 부처가 잘하고 있는 점 위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엔 위험요소에 대한 지적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데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C씨는 대기업 정책을 예로 들었다. “어느 시점부터 경제, 문화, 스포츠 각 분야에서 대기업을 향한 압박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게 보였다. 기금 후원해라, 어디에 투자 늘려라, 하다못해 온누리상품권도 얼마 이상 구입해라 등등 다양했다. 이게 과연 종합적으로 보고되고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어공들끼리 따로 보고를 취합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내부에서 제기됐다. 물론 묵살됐다.”

박근혜 청와대의 두 번째 특징은 어공들 사이에 유대관계 혹은 협력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권력 중심기관의 직원들이 화합을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여부는 차치하고, 화합을 이끌 구심점이 없었다. 이명박 정권 때는 ‘왕실장’ 박영준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행정관들끼리 모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더했다. “청와대엔 두 가지 직급밖에 없다. 형님 혹은 동생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 공공연히 돈 말이다. 박근혜 청와대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얘기다.

B씨는 “청와대 들어가자마자 직원들 사이에 열흘간은 매일 소위 ‘십상시 명단’이 SNS로 퍼졌다. 매일매일 서열이 바뀌어 있더라”고 말했다. 문고리 권력과 그 외 직원들 사이에 위화감이 컸다는 얘기다. 취임 5개월 만에 청와대를 떠난 허태열 전 비서실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청와대 안의 젊은애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젊은애들은 박 전 대통령을 오래 수행한 3명의 비서관을 뜻한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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