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외교부 조현동 전 기획조정실장. 고용노동부 박종길 전 기획조정실장. 통일부 서호 기획조정실장. 기획재정부 구윤철 예산실장.
(왼쪽부터) 외교부 조현동 전 기획조정실장. 고용노동부 박종길 전 기획조정실장. 통일부 서호 기획조정실장. 기획재정부 구윤철 예산실장.

정권이 바뀌면 정부 각 부처 기획조정실장 같은 1급 요직은 새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물로 교체된다. 그러나 새로 임명된 장관 인사청문회와 차관급 인사에 가려 부처 1급 인사의 면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지난 11월 21일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임명을 끝으로 조각(組閣)이 완료됨에 따라 각 부처 실장급 고위직 인사 또한 사실상 마무리됐다. 이런 가운데 일부 부처에서 “과거 노무현 정부 때의 인연(因緣) 또는 악연(惡緣)으로 인해 1급들의 진퇴가 결정됐다”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조현동 전 실장의 악연

외교부의 경우 강경화 장관 인사청문회를 총괄한 조현동(외시 19회) 기획조정실장이 사실상 옷을 벗게 됐다. 조 실장을 비롯한 외교부 직원들은 인사청문회 당시 불거진 각종 의혹을 적극 해소하며 강 장관의 입각을 지원했지만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조 실장은 지난 9월 인사에서 외무고시 3기수 후배인 서정인(외시 22회) 주아세안대표부 대사에게 자리를 내줬다. 서정인 신임 기획조정실장은 아시아 지역을 주로 담당했던 인사다. 이밖에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부 임승남 1차관을 유임시켰고 2차관에는 조현 주(駐)인도 대사를 임명했다. 차관급 자리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는 조 전 실장의 외시 동기인 이도훈 전 청와대 외교비서관이 임명됐다. 이에 따라 차관 승진을 내다보던 조 전 실장은 보직을 받지 못하고 밀려났다.

조 전 실장이 이번 인사에서 제외되자 외교부 안팎에서는 과거 노무현 정부와 그와의 ‘악연’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그는 2004년 1월 북미3과장으로 있을 때 사석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 그리고 청와대 내 386 인사들의 대미(對美)외교 정책을 비판한 사실이 청와대로 전달돼 곤욕을 치렀다. 그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향해 “영어도 못하고, 미국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어떻게 대미외교를 하겠느냐”는 식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발언과 관련해 그를 조사한 청와대 민정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조 전 실장에게 보직해임이라는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외교부 내 주류인 ‘동맹파’로 분류되던 조 전 실장은 징계 후 한동안 한직을 맴돌았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건 2008년 3월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뒤 외교부 내 북미국 출신들이 대거 중용됐는데, 이때 조 전 실장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선임 행정관이 됐다. 이후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며 외교부 차관을 바라보는 기획조정실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과거 노무현 청와대를 폄하한 외교부 공무원의 인적쇄신을 주장하며 조 전 실장의 경질을 압박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질이 현실화되면서 현 정부 들어서도 노무현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부 내 주류인 동맹파의 입지가 다시 크게 줄어들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경우 차관 승진을 바라보던 박종길 전 기획조정실장이 지난 9월 말 인사에서 사실상 경질됐다. 박 전 실장도 지난 8월 고용노동부 김영주 장관의 인사청문회 대응을 총괄 지휘했다. 고용부 내부에서 차관 승진이 유력하다는 예상을 깨고 그가 경질된 이유는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이른바 ‘양대지침’ 설계에 관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2016년 1월 고용부 기획조정실장에 임명된 그는 정부가 ‘양대지침’을 발표할 당시 이를 설계한 인물로 노동계의 비난을 받았다. 양대지침은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를 가능하게 하고 기업의 사내 취업규칙을 바꿀 때 노조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민주당과 노동계는 공동으로 비판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정부 방침에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민주당 현역 국회의원이자 노동계 출신인 김영주 장관은 지난 9월 25일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양대지침의 폐기를 선언했다. 정부의 폐기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는 사업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실태조사까지 벌였다. 박 전 실장은 김 장관이 양대지침 폐기를 선언하기 하루 전 발표된 인사에서 경질됐다. 그는 인사 발표가 있기 전 사의(辭意)를 표명했다. 신임 기획조정실장에는 박 전 실장(행시 30회)보다 4기수 아래인 부산 출신 박화진 중앙노동위 상임위원이 임명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노동계가 박근혜 정부의 적폐정책으로 양대지침을 지목했고 김영주 장관이 이를 받아들여 관련 노동부 관료들을 교체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호 실장의 화려한 부활

문재인 정부와 코드가 맞는 고위직 공무원의 경우 거꾸로 한직(閑職)에 있다 요직으로 등용된 사례도 있다. 통일부의 경우 지난 10월 초 인사에서 신임 기획조정실장에 서호 전 통일준비위원회 사무국장을 임명했다. 서 실장은 박근혜 정부 초기 개성공단 가동중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남북실무회담 도중 경질된 인물이다.

2013년 7월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중단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북한의 약속을 받아오라고 통일부에 지시했다. 당시 우리 측 실무회담 수석대표가 서호 현 기조실장이었다. 당시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으로 있던 그는 1~2차 회담이 끝나고 이례적으로 경질됐다. 이로 인해 3차 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는 김기웅 당시 통일부 정세분석국장이 맡았다. 당시 통일부 내부에서는 북한의 재발방지 약속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개성공단을 가동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게 화근이었던 것으로 해석됐다.

통일부 한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개성공단 가동중단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한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아오라고 통일부에 주문했다. 만약 북한이 이런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을 경우 우리도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라는 게 청와대 ‘오더’였는데, 서 실장이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회담 도중 경질됐다. 서 실장은 성품이 워낙 부드러운 사람이라 북측에 강한 압박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서 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청와대 시절 안보정책비서관을 지낸 조명균씨를 통일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화려하게 컴백했다. 6급 특채로 통일부에 입부한 후 교류협력국장,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 남북출입사무소장 등을 맡아온 그가 1급인 기획조정실장으로 영전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개성공단 재가동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기 때문에 조명균 장관 체제에서 서 실장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획재정부 최고 요직인 1급 예산실장에 임명된 구윤철 실장의 경우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5년간 근무한 인물이다. 정당이나 캠프 출신이 아닌 인사가 청와대에 파견 나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특히 구 실장은 노무현 청와대 말기 국정상황실장을 맡으며 문재인 대통령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이명박 정부로 교체된 후 한동안 해외에 파견을 나가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기재부로 복귀해 예산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실세였던 최경환 의원과는 미국 위스콘신대 동문이다.

지난 8월 금융위원회 최고 요직인 금융정책국장에 임명된 유재수 국장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부속실에 파견 나가 문재인 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유 국장은 개인사정을 이유로 지난 11월 중순부터 병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고 있다. 유 국장에 대한 내사설 등이 금융당국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금융위는 조만간 유 국장을 교체할 예정이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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